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비평/김영덕/김영덕|염하강에서 검정고무신 타고 대양으로-정남석 시인의 시세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645회 작성일 14-08-08 18:30

본문

비평

김영덕|염하강에서 검정고무신 타고 대양으로-정남석 시인의 시세계

 

 

1.

오늘날에도 영어권 국가에서는 함께 있던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재빨리 (God) Bless You!라고 말해주는 풍습이 있다. 부지불식간에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에게 신의 가호와 축복이 있기를 빌어주는 것이다. 재채기Sneeze는 사실 페스트의 첫 증상이기도 하다. 이성理性이 개입할 틈이 없는 이 찰나刹那의 해프닝을 통하여 우리는 시대를 가로질러 유럽인들에게 페스트가 얼마나 크고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일찍이 ‘어떤 인간도 섬은 아니다.’라고 설파한 시인이 있었다. 17세기 전반의 존 던John Donne이다. 그는 지구라는 이 행성의 본토本土, 유라시아대륙의 지리적 변방 섬나라 영국에 여장을 풀고 한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다. 존 던은 모든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그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통하여 논증했다. 요컨대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국굴기大國堀起 계기가 되었던 산업혁명은 물론 계몽주의조차 아직 동트기 전, 수백 년에 걸쳐 운명처럼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음울한 도시, 런던의 골목길을 가득 채운 짙은 안개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시에는 다양한 수사적 장치, 이를테면 확장된 은유extended metaphor, 직유simile, 암시allusion, 행두반복anaphora과 두운법alliteration 같은 기법들이 정교하게 축차적으로 사용되어 이후 근현대시단에서 하나의 전범典範이 된다.

18세기 영국의 비평가 사뮤엘 존슨은 존 던의 시들을 ‘가장 이질적異質的인 아이디어들이 거칠게 서로 결합된 것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실례實例를 들거나, 비교하고 암시하기 위하여 자연과 예술이 샅샅이 징발徵發되었다는 것이다. ‘The most heterogeneous ideas are yoked by violence together; nature and art are ransacked for illustrations, comparisons, and allusions.’

이와 같은 참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논쟁과 이미지들의 극적인 대비를 즐겨 사용했던 존 던은 후대의 앤드류 마블, 헨리 본, 조지 허버트 등 영국 주지주의 형이상학파Metaphysical School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예이츠W.B. Yeats와 엘리어트T.S. Eliot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스트 시인들에 의하여 화려한 재조명을 받았다. 엘리어트는 존 던의 시들이 열정과 지성의 융합으로 ‘감정의 해리解離’를 증명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가치를 다시 발견했다. 좁은 시각에서 볼 때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결합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볼 때는 그 의미의 유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현대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존 던은 일부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장 사랑받는 영어권 시인the greatest loved poet in the English language의 반열에 올랐다.

 

2.

21세기 한국의 시단에 ‘언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시인이 있다. 정남석이다. 정시인은 인천의 강화江華 출신이다.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인천이 유럽대륙의 프랑스 쯤이라면 강화는 염하강 손돌목, 아니 도버해협 건너 영국이다. 내친김에, 석모도는 아일랜드이다. 유럽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유럽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에라스무스 플랜 이전의 영국처럼 인천의 일부이면서도 시퍼런 자긍심을 유지하며 일정 부분 독자성을 추구하는 강화는 분명 닮은꼴이다. Santa Monica를 ‘쌔나마니카’라고 발음하며 허풍스러울 만큼 강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미국식 영어와 달리 애초의 발음기호 그대로 ‘산타모니카’를 대쪽같이 고집하는 본가本家 영어처럼, 반갑다는 말인 ‘오셔씨꺄’ 같이 ‘꺄, 다, 겨’로 끝나는 그의 강화 사투리가 새삼 고풍스럽게 들린다. 조촐하면서도 정겹다.

오십대 중반에 낸 첫 시집 ‘검정고무신’에 수록된 개성 있는 시들을 통하여 예사롭지 않은 시 세계 한 자락을 슬며시 드러냈던 정남석은 아라문학 창간호에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외 총 여덟 편의 시를 발표했다. 정시인은 ‘시작메모’에서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시는 우주의 요소들, 형태들, 그리고 사물들의 형제애에 기반을 둔 생존 모델이다.’라고 술회한다.

정남석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일상의 이미지까지도 거침없이 잘라내 허공에 띠우고 액자를 둘러 벽에 걸어놓고는 시치미 뚝 떼고 관객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이다. ‘시는 사물들의 형제애에 기반을 준 생존모델’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대하는 그의 심층 고백은 시의 고금古今과 양의 동서東西를 초월하여 서두에 소개한 존 던의 시구와 분명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다.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흙덩이 한 줌이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더 작아진다.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그런데 정남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들의 형제애’까지도 언급하며 사물들과의 화해, 사물들 사이의 화해까지도 시도한다. 정남석은 지구라는 이 행성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우주적 차원에서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3

술래인 나는 골목의 끝을 잘라내고 싶었다.

골목은 더디게 사라지는 것을 도왔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한 발 한 발 점자를 짚어가듯 모퉁이를 돌아설 때

누군가 반대편에서 경계가 느슨할 때를 노렸다.

 

이쪽이야 이쪽.

 

고장 난 냉장고의 문을 닫고 씩씩한 속도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서로 비슷비슷하게 기웃거리는 골목

가깝지만 아득히 먼 틈이 벌어진다.

 

끊어진 고무줄을 잇듯 골목은

차가운 연탄재를 굴려 술래를 달랬다.

 

술래를 달래느라 밤잠을 설쳤으므로

누가 술래였는지 기억 못할 것이 뻔하다.

 

낯익은 발소리를 들었을 때

이런 날에는 내가 아닌 척을 한다.

―「끝이 훤히 보이는 것은 골목이 아니다」 전문

 

정남석은 ‘술래인 나는 골목의 끝을 잘라내고 싶었다.’고 했다. 술래인 나는 은밀하게 아이들과 공모하여 그들이 더디게 사라지는 것을 돕고 있는 골목의 끝을 잘라내고 싶었을 정도로 골목이 미웠을 것이다. 술래인 나에게 골목은 아이들과 한 편이다. 골목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눈을 감고 돌아서서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를 천천히 외치는 것으로 보아 술래인 나는 게임의 규칙에 아주 충실한, 놀이의 초보자이다. 요령 부리지 않고 아이답게 순진한 모습으로 이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 품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와 혼자 술래가 된 나는 사실 그 무대가 무척 낯설고 외롭다. 동무들이 ‘이 쪽이야, 이 쪽’ 하고 놀리며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남기고 사라지지만, 결정적으로 아이들과 한편이 되어 비슷비슷하게 기웃거리는 골목들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찾아내지 못한다. 나는 무척 막막하고 혼자 고립되고 말았다는 슬픔이 차올라 이제 거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그 순간 냉랭하게 기웃거리기만 하던 골목이 차가운 연탄재를 굴려 술래인 나를 달래며 따뜻한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나는 못이기는 체, 내가 아닌 척을 하며 골목의 화해 요청을 받아드린다는 시적 장치가 신선하다.

아득한 내 유년의 뜰은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있다. 오랫동안 분지형태로 존속해왔던 자연부락인 내 고향 마을 뒷산으로 큰 도로가 뚫리며 생긴 엄청난 분량의 토양이 준공된 댐으로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듯 철거가 끝난 동네를 뒤덮었고 그 위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위의 크고 작은 산과 낯익은 언덕, 능수버들 냇가를 기준하여 어릴 적 내가 올라가 놀던 우리 집 뒤란 감나무와 참죽나무가 있던 자리가 어딘지를 알 수 있으며, 내가 동무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언놈이네 싸리나무 울타리와 언년이네 초가집 굴뚝 사이의 골목과 붙돌이네 마당 우물자리가 어딘지, 눈을 감고도 거의 정확하게 짚을 수 있다.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의 눈으로는 그 땅 밑에 있는 과거의 인물과 사물, 정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시인도 그 동안 기억의 심연에서 잠겨있던 어린 시절 스틸 사진 한 컷을 건져 올린 것이리라. 정남석은 시에서 ‘낯익은 발소리를 들었을 때, 이런 날에는 내가 아닌 척을 한다.’고 했다. 골목과도 이미 화해한 나에게 있어서는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술래인 나이고 내가 곧 씩씩한 소리로 사라지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술래인 나와 그 낯익은 발자국 소리와 사라지는 그림자는 이제 마침내 서로 ‘형제애에 기반을 둔’ 끈으로 서로 연결된 것이다. 어떤 인간도 언제까지나 하나의 섬일 수는 없다.

 

4.

정남석의 시 ‘가루받이’는 배꽃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묻혀 수정을 시켜 열매를 만들어 내는 꽃가루받이(수분) 풍경을 그린다. 배꽃가루를 묻혀 배꽃에 슬쩍 대면 수정되며 꽃가루 수분의 결과 배꽃은 핑크빛으로 변한다. 수술은 분명 생식기관이다. 봉지를 씌워줌으로써 이 과정은 완성된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짝짓기와 그것을 통한 유전자 남기기일 것이다. 시인은 자칫 통속적 에로티시즘에 빠질 수도 있는 묘사에 적절한 긴장을 장치하고 유지함으로써 이 과정을 매우 거룩하며 숭고하게까지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집단적 경험을 통하여 ‘십년 넘도록 꽃이 그냥 쉽게 떨어지고 만’ 종부와 그 당사자들이 느끼는 절실함이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하얀 배밭은 달빛 초례청이다.

밤이 이슥하도록 과수원 영감은

꽃잎을 더듬으며 가루받이를 한다.

단내 물씬 풍기는 김씨 할머니는

봉지를 묶으며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떠올린다.

그 집 종부의 꽃은

십 년이 넘게 그냥 쉬 떨어지고 말아

하는 수 없이 종부도 가루받이를 하였다.

손주를 받아 안은 영감은

과수원을 팔고 도시로 이사를 갔다.

영감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

M&B 산부인과 빌딩에는

가루받이를 기다리는 하얀 배꽃들이

밤마다 층층 줄서기를 하고 있다.

―「가루받이」 전문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문득 ‘점입가경’, ‘무릉도원’, ‘무아지경’같은 한자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마치 내가 극락에, 샹그릴라에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숨이 멎을 만큼 몽환적이다. 정남석은 교교皎皎한 달빛에 젖은 새하얀 배 밭을 달빛 초례청Wedding Hall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포함하여 적어도 사춘기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부리기 어려운 표현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며 햇솜처럼 포근한, 휘영청 달빛 환한 봄날 저녁의 산기슭 배밭, 소복처럼 백설기처럼 새하얀 배꽃이 서로 엉켜서 흐드러지게 핀 풍경은 ‘르노아르’의 그림 속에서 방금 나온 듯 원초적이며 농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초례청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는 신랑신부처럼 배나무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수줍게 도열해 있는 가운데, 과수원 영감 부부가 짝짓기를 도와준다. 자연임신이 어려운 경우, 시험관을 통하여 인공수정시술을 하듯, 배꽃에 꽃가루를 묻혀 수정을 도와주는 것이다. 하얀 배꽃은 ‘엄마와 아가M&B’ 산부인과 병동 임상의 메타포이다.

옛날 먼 길을 가던 길손이 날이 저물자 밤이슬 피할 데가 없었다. 마침 어느 외딴 산골의 초가집을 발견하고 젊은 주인 부부에게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청한다. 나그네는 저녁까지 얻어먹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마루에서 들리는 기이한 남녀의 화접 소리에 잠이 깬 나그네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문틈으로 내다보니, 촛불 아래 개다리소반 위에 조촐한 제사상이 보이고 그 앞에서 남녀가 엉겨 붙어 꿈틀대는 망측하고 해괴한 장면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그네는 무언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그 다음날 아침 작별인사를 하며 넌지시 물어보니, 젊은이의 돌아가신 부모 살아생전 소원이 손주를 안아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소원을 고인의 생전에 들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젊은 부부는 어젯밤 부모의 제사상 앞에서 생산을 약속하는 부부관계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꽃잎을 더듬으며 가루받이를 하는 과수원 영감이나 단내 물씬 풍기면서 봉지를 묶으며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떠올리는 김씨 할머니에게도 배꽃 가루받이는 제사상 앞에서의 남녀관계 만큼이나 거룩하고 유의미한 행사이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절대자, 신 앞에서는 모두가 동격일 수밖에 없는 서양과 달리 동양의 유교문화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유전자를 이어받은 후손의 존재는 영생을 의미했다. 언젠가 생명을 잃게 되는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온존하는 후손을 통하여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자신을 닮은 후손Identical descendants의 존재의미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불임부부 인공수정시술 시장이 번성하는 우리나라의 의료계 사정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5.

 

아실지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바람둥이로 이미 사생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아내의 손을 거쳐 태어났습니다. 출산, 육아, 교정, 정서, 아내는 하루에 다섯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나와 집안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이 말을 남기고 집을 뛰쳐나간 건 잘못입니다.

 

톨소토이는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농민계몽에 힘쓰는 금욕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소설도 그만 쓰고 농부가 되어 직접 밭을 갈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재산을 모두 버리려는 데에는 불만을 나타냈지만 남편이 추구하는 이상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란 남자를 유혹하는 존재, 성적 사랑밖에 모르는 속물이라며 소피아에게 형제처럼 살 것을 강요해놓고 스스로 약속을 깨뜨리곤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내기를 거듭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극비리에 유언장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작품의 저작권을 모두 막내딸에게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기차역에서 세성을 떠난 후 소피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처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지만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소피아의 손을 거쳐 태어났습니다.

 

사실 나의 아내도 악처는 아닙니다.

―「톨스토이 증후군」 전문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 현실적 문제와 정신적 가치 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존재이다. 정남석은 그의 시 ‘톨스토이 증후군’에서 톨스토이를 먹고사는 문제 같은 악역은 아내에게 모두 맡기고 자신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위선적이고 비겁한 인물로 묘사한다. 사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재산을 모두 버리려는 데에는 불만을 나타냈지만 남편이 추구하는 이상을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미루어 인격적으로 남편인 톨스토이보다 한 수 위인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풍요가 선이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하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시인들도 이 고민에서 비켜나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블랙홀처럼 효율성을 앞세워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자본주의가 문학을, 시를 밀어내고 있는 이 시대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실 시인도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통찰과 직관을 부려 인문학을 추구하는 절실한 마음과 함께 세속적 욕망에도 이끌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정남석은 모든 것을 아내 탓으로 돌리며 악역을 맡겼으면서도 때때로 ‘스스로 약속을 깨뜨리기도 했던’ 톨스토이의 인간적인 약점을 지적하며 사실은 자신의,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6.

 

구석을 응시하자 구석은 슬며시 문을 닫는다.

문을 열고 닫는 일

경계를 알아가는 일조차 구석은 흥미로운 면이 없다.

 

막무가내로 열어야 할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할지

수 백개의 얼굴로 문밖에서 안달했을 때

구석은 뒷소문을 일러주지 않았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갈피에서

손때 묻은 고민을 하다가 하얀 백지를 내밀었을 때

구석은 뚜렷한 경계를 짚어주지 않았다.

 

비밀의 행간도 거기서 거기라고

빛의 방향이 좌우로 살짝 어긋날 때

구석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구석은 은밀함을 부둥켜안는다.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 전문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세상에 빛만 있을 수 없듯이 그림자만 있을 수도 없다. 정남석은 그의 시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를 통하여 빛과 어둠의 문제에 천착한다. 그것은 승자와 패자의 문제일 수 있고, 유라시아대륙 무대를 단숨에 가로지른 세계제국을 세워 화려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징기스칸과 그의 면전에 돌직구를 던졌던 변방 고려의 강화 삼별초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에 약삭빠른 사람들만 있을 수 없듯이 순진한 사람들만 있을 수도 없다. 변방인 구석은 무대 한가운데인 본토에 밀려 은둔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홀대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구석도 가운데보다 중요할 수가 있다. 정남석은 구석이 ‘빛의 방향이 좌우로 살짝 어긋날 때만 본능적으로 반응’한다고 했다. 구석도 궁극적으로 빛이 본질이고 핵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구석은 사실 후미진 곳nook인 동시에 모퉁이corner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면 어둡고 후미진 곳이지만, 그 경계인 담장 밖에서 보면 밝고 이목이 집중되는 모퉁이다. 축구경기에서도 코너킥은 때때로 정면에서 차는 페널티킥 보다 위력적이다. 극적 반전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정남석이 주장하듯,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인 것이다. 구석은 은밀함을 부둥켜안고 있다.

그런데 영화 그래비티Gravity는 중력과 소음에서 비로소 자유로우며,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우주공간에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빛을 압도한다는 불편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우리를 위축시킨다.

 

김영덕∙막비시 동인.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