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계간평/선주원|소멸하는 시간, 죽음 그리고 내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389회 작성일 14-08-08 18:35

본문

계간평

선주원|소멸하는 시간, 죽음 그리고 내일

 

 

근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대인에 대한 우월적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근대인들은 고대인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이 이룩한 것 위에 서서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더 많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던, 고대인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장이었다. 근대인들이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의 퇴적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근대적 관점에서처럼 시간은 역사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적 상징의 무수한 변조와 반복을 통해 재생된다. 원형적 상징의 무수한 변조와 반복을 통해 재생됨으로써 시간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면서 개별 존재들의 삶을 대체해 간다. 마치 고대인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장이였던 근대인들이 고대인들의 삶을 대체했듯이.

마찬가지로 현대인들도 고대인과 근대인들의 삶을 가로지르면서 그들의 삶이 축적해 놓은 퇴적층 위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바라보고 있다기보다는 사물들에 의해 그 자신이 바라보여지고 있기도 한다. 사물들에 의해 가치평가되고 대체됨으로써 생멸의 흔적만을 남긴 채 고대인처럼 거대한 대서사를 만들 수 없는 시대에 놓여있기 때문에. 대서사를 만들 수 없는 시대에 현대인들은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초조해 하고,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그 미래는 늘 우리를 배반하면서 우리가 삭아내리는 매듭처럼 풀려 서 있던 자리를 잃게 한다. 그것은 소멸을 향해 번지점프하는 근대적 시간에 종속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인이었던 고대인처럼 앞으로 전진하는 시간이 아닌 회귀하는 시간, 우주로 모아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소멸이 아닌 창조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소멸의 시간과 탐미적인 죽음

현대인의 시간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기에 개별 존재는 소멸하는 존재로서 시간성에 구속당한다. 그리고 소멸하는 존재로서 생의 여러 순간들에 그에게 주어진 매듭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매듭들을 풀어가면서 개별 존재는 소멸의 시간을 늦추고, 특별한 존재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을 견디어간다. 마치 에로스적 행위를 지연키고자 하듯이 말이다.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특별한 존재들과 만남을 통해 삶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강석경의 「발 없는 새」(현대문학 2013년 10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석경의 「발 없는 새」은 15년 넘게 도서관 사서로 근무한 영서가 분관의 김 계장과 함께 조경학과 명예 교수로 20년 전 퇴임한 신재호 박사의 소장 전공도서를 기증받기로 한 데서 시작한다. 신재호 박사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인 관계로 지방대학 생명과학과 교수인 사위가 도서를 기증한다. 사위는 건질 만한 600여 권을 공식적으로 기증하고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처리해주기를 당부했다.

신재호 박사의 책들은 컨테이너에서 먼지에 쌓인 채 애물단지나 되듯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책들이 시간 속에서 먼지에 쌓였던 것처럼 신재호 박사도 시간의 변방에서 달려가는 시침처럼 순간순간을 살고자 했지만 그의 영원한 은신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소멸을 향해 번지점프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는 현대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대비되어 조경학자였던 신재호 박사가 뜰 앞에 심어놓은 여러 나무들은 우연한 4월의 하늘에 환영처럼 꽃을 쏘며 적요를 가른다. 인간의 소멸과 대비되는 자연 혹은 나무들의 폭발과 생성.

인간의 소멸과 대비되는 나무들의 폭발과 생성은 그러나 인간의 소멸을 증폭시키는 역할만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조경학자가 꿈꾸었던 ‘정원에 목숨을 바치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고대의 귀족들은 정원을 바라보며 내세를 상상하였다. 사막 지역에 조성된 이슬람의 물의 정원도 그러한데 감미로운 쾌락과 같은 조용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알람브라궁전의 아름다움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듯한 전율을 준다.”

 

죽음을 앞둔 조경학자가 꿈꾸었던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재단하여 문명을 만들고 그 속에서 탐미적인 죽음까지 교감하려 했던 고대인들의 시간의식을 갖고자 했기에. 그는 목련나무 뿌리를 베개 삼아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꽃을 맞을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기에. 조경학자가 꿈꾸었던 이러한 죽음에의 의식은 영서와 함께 책을 기증받으러 갔던 김 계장의 시를 통해 구체화된다.

 

을 조경造景하는 저 울음 속

책 하나 애비 잃은 듯 철퍽,

삭은 먼지 토하네

살림방 앞 때죽나무 삼형제는 우두커니

누군가를 기다리며 귀만 열어놓고,

주인은 칠불암 갔는지, 용장사 갔는지

 

서가에 허물처럼 남아 있는 책들

이제, 하산下山의 바라춤으로 적멸을 꿈꾸어야 할 때

구십 생애 노학자 설계도가 바로 너희들이었을 터

어느 나무, 풀 한 포긴들 영원할까 만은

젊어도 오래되면 버려지는 세상에

신장神將일랑 바라지는 말게나

 

땅거미는 점점 옥죄어 오는데

서치書癡가 마지막 보듬어보는 것은

차마 날아가지 못한 묵은 책 향기

 

김 계장은 구십 생애 동안 조경학자로 살아온 신재호 박사가 살아온 삶을 “공을 조경造景하는 저 울음”이라 불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가 죽음을 기다리는 현재의 상황을 “하산下山의 바라춤으로 적멸을 꿈꾸어야 할 때”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책을 사랑하는 서치書癡에게는 묵은 책 향기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어쩌면 소멸을 향해 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발 없는 새’인지도 모른다. 고대인처럼 수많은 상징을 통해 ‘위대했던 과거’를 꿈꿀 수 없는 운명의 인간은. 인간으로서 신재호 박사는 공을 조경하는 조경학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정원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공허와 절망, 그 밑에 깔린 두께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 속에서 끝없이 생존의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그러한 몸부림 가운데 자기해체의 절망감을 이겨내고자 했다. 마치 영화 패왕별희에 나왔던 여장남자 데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신재호 박사는 가기해체의 절망감을 이겨내고 나르시시즘의 세계에 빠져 더 이상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절해고도의 자아를 견디다가 소멸을 향해 번지점프하는 시간에 지쳐버린 얼굴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에 신재호 박사는 발 없는 새처럼 삶을 살다가 이제 지쳐 탐미적인 죽음을 기다리며 또 다른 미래인 내세를 꿈꾼다.

 

내일을 도모하는 방식 찾기

우리가 소멸을 향해 나가는 시간 속에서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은 내세를 꿈꾸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와 무목적의 생활 가운데서 새로운 계기를 찾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도 있다. 그것도 황당한 계기와 목적 때문에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황당한 목적을 위해 무작정 깊은 계곡을 찾아 떠나면서, 죽음과 삶의 문지방 사이에서 망설이는 여행. 이러한 여행을 그린 소설로 김엄지의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를 들 수 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서 그는 다이빙을 하고 싶어 네 시간 이상 고속버스를 타고 산으로 간다. 그가 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장마가 끝이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가 내린다. 산으로 가면서 그는 며칠 동안만 산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아주 오래 머무를 것인지, 다이빙을 단 한차례만 한 뒤에 곧바로 돌아올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가 겨우 산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허름한 식당에 가까운 숙소를 잡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주인여자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는다. 라면을 먹은 후 그는 방 한 구석에 놓인 눅눅한 요와 이불을 보면서 편안함과 친근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이불을 2년 7개월 동안 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그는 계곡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주인 여자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 계곡을 찾아가지만 조급함과 안달 때문에 계곡을 찾지 못한다. 계곡을 찾지 못한 가운데 그는 반복적으로 ‘목마르다’는 생각을 한다. 목마름 때문에 멀미 증상을 느끼면서 그는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그가 목말라 하는 것은 위악적인 현실에서 숨 막히고 허기와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산불이 났다는 주인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 동안 산속에 머무를 것인지를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는 초조함 때문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휴대폰의 배터리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도 충전기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휴대폰의 배터리가 남아 있을 때 연락처 목록에서 마지막으로 연락을 할 사람을 생각한다. 딱 한 통만 걸어야 한다면 누구한테 걸지를 생각하다가 꿈을 꾼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고 싶은 딱 한 사람은 우리 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그 사람은 나의 존재성이 사라지는 마지막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은 그러한 사람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적멸하는 생에서 내일을 도모하지 못한 가운데 벌거벗은 존재처럼 살아왔기에.

꿈에 그는 전쟁 탓에 하늘이 붉은 곳에서 질척한 뻘을 달린다. 그의 꿈은 그의 삶이 질정없이 쫓기듯 흘러왔음을 말한다. 질정없이 쫓기듯 흘러온 삶의 시간 속에서 그는 소멸되어 가고, 그가 행했던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그를 혼돈에 빠뜨린다. 그러기에 그는 혼돈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산속에 얼마나 더 있을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 다음날 그는 계곡을 찾아 나섰지만 여전히 계곡을 찾지 못한 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서 있는지조차 모른 채 휴대폰의 연락처 목록을 뒤져 헤어진 여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다. 그러나 헤어진 여자는 다이빙을 할 생각이라는 그의 계획이 멋지다고 하면서도 길을 잃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119를 부르라고 한다. 또한 서로가 왜 헤어졌느냐는 물음에 ‘미래를 위해서’라고 답한다.

‘미래를 위해서’라는 헤어진 여자의 답을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그의 미래에는 거창한 시간이나 꿈이 없다. 그 대신 눅눅한 이불과 밀린 세금이 있을 뿐이다. 눅눅한 이불과 밀린 세금은 그의 삶이 환멸적인 것이며, 전진하는 역사의 시간에서 소외되고 원형적인 삶의 방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소외되고 원형적인 삶의 방향을 상실한 그.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근본악’에 처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계 인구의 급속한 팽창, 과학과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 그리고 수많은 신유목민들의 출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글로벌 시대에 인간 주체들은 ‘남아돌아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어 가고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시대에는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체계를 통해 우리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근본악이 상존하고 있다. 상존하는 근본악 속에서 우리들 각자의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수단이 됨으로써 인간다움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일상을 창조하지 못한다. 이러한 삶에 필요한 것은 유한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서 그는 내일을 생각할 수 없기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쉽사리 마련하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내일을 살아야 하면서도 내일을 쉽게 꿈꾸지 못하는 우리이기도 하다. 또한 허망하게 새로운 삶이 개시(開示)되기를 바라는 우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을 꿈꿀 수 없음에도 언제나 모순되게 내일을 꿈꾸지 않는가?

 

백발의 늙은 주인여자는 69세였으며, 내일을 위해 닭을 삶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별개로 그는 다이빙을 할 것이었다. 그의 휴대폰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물 묻은 이끼들은 짙게 번쩍였다. 그는 바위의 가장 높고 가파른 곳에 올라서서 어깨를 돌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숨을 멈췄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내일에 눅눅한 이불과 밀린 세금만이 있다 할지라도, 라면만을 먹은 일상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 모든 것과 별개로” 다이빙을 하고자 한다. 다이빙은 그가 지난 시간을 잊고 어찌될지 모르는 내일을 질끈 눈을 감고 뛰어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산속에서 문득 계곡을 찾을 수 있었고, 그 계곡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지만 어쨌든 다이빙을 한다. 다이빙은 그가 유일하게 당장 하고 싶은 것이기에.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써 그는 집에 돌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내일을 도모할 수 있기에.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는 눅눅한 이불과 밀린 세금만이 기다리고 있는 그가 그 내일을 회피하고, 계곡을 찾아 막연히 다이빙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이 욕망은 그에게 유일하게 내일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맞닥뜨릴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그런데 이 힘을 찾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이다. 우리 모두는 고달프고 내일이 없는 삶 가운데 막연한 환상을 꿈꾸고, 그 환상을 통해 현실을 겅중겅중 건널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의 욕망 가운데 미래 보기

고달프고 내일이 없는 삶 가운에 많은 사람들은 자살에의 충동을 느낀다. 자살을 통해 지금의 여기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회피의 대가는 너무 슬프다.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 우리 자신을 너무나 무책임하게 내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소멸을 향해 나가는 대신, 우리는 뭔가 자신을 지키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허황한 환상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장순의 「벽」(아라문학, 2013가을 창간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순의 「벽」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도록 파탄난 ‘나’가 쪽방촌에서 살면서 이웃 방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소리를 들음으로써만 교감하는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달 전, 나는 쪽방촌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것이 내 기억의 시작이며 전부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아니면 땅에서 솟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한순간 엄습해오던 불안과 공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나. 쪽방촌 골목을 걷고 있는 나. 이런 나의 모습은 자본의 위력이 뼛속까지 침투한 환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환멸의 시대에서 위악적인 현실에 고통 받는 우리의 모습.

 

하루의 시작은 곤혹스럽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무뎌진지 오래다. 나는 쪽방의 어둠에 익숙하다. 온통 백지뿐인 과거와 현실들이 입을 다문 채 쪽방의 작은 공간을 유영하고 다닌다. 그 공간에서 덩달아 허우적거리는 것이 나의 몫이다.

 

곤혹스럽게 시작하는 하루에서 내일을 기약하고 예리하게 하루하루를 벼를 수 인간은 드물 다. 그러기에 ‘나’의 하루는 편두통, 배고픔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존재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 쪽방촌에서 살았던 예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을 통해 원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과거의 삶을 떠올리고, 단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생을 생각하지만 도무지 힘을 얻을 수 없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생을 지탱할 힘이 없기에 쪽방촌의 사람들은 아무도 분주하지 않다. 역전에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생에서 어떤 힘을 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삶에서는 상실감과 소멸의식만이 존재한다.

 

나는 누구일까? 내게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나는 쪽방의 나 아닌 나를 되 삼켜 본다. 나는 상실의 아찔함에 늘 혼란스럽다.(중략)

숨이 막혀 온다. 무엇인가 나의 몸을 옥죄어 오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익숙한 소리다. 신음은 벽을 넘어 나에게로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상실감과 소멸의식만이 존재하는 일상에서 삶은 숨 막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숨 막힘은 나 혼자만이 겪는 것은 아니다. 쪽방촌에 사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다른 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한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부재했을 때 불안의식을 느끼며, 그 부재의 대상이 자신이 될 것이라는 긴장감을 느낀다. 부재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온통 숨 막히는 정적뿐이다.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쪽방의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내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소리를 나는 정작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상실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실감은 그 존재에게 위악적인 것이다. 위악적인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견지하지 못하는 것은 곧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자신의 주체성을 세우는 호명(呼名)으로서의 삶을 꿈꾸기에는 ‘좋았던 시절’에의 기억이 너무나도 아스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다움을 견지하지 못하고 자살에의 충동을 느꼈던 것이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살에의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그 관계맺음이 직접적인 것이 아닌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눈을 뜬다. 나는 벽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나 아닌 내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들도 여기에 있었다. 비렁뱅이 식구도, 여학생 임산부도, 김씨 부부도…….’

나는 자살을 꿈꾼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위악적인 삶의 현실에서 ‘나’는 스스로를 죽이지 못한다. “마른 오징어에 간장과 마요네즈가 들어간 소스를 찍어먹는 방식으로 삶에 미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미련은 우리가 생을 극단적으로 끊어버리려는 순간에 더욱 강렬해진다. 한번쯤은 생과 당당히 겨뤄보고 싶기에. 이건 우리 모두의 소망이리라.

 

우리 모두는 거인이었던 고대인처럼 척박한 삶에 당당히 맞서는 꿈을 꾼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앞으로만 전진하는 시간 속에 치열한 경쟁 앞에 ‘벌거벗은 존재’로 내던져지는 생이 아닌, 우주로 모아지는 시간 속에 창조를 꿈꾸는 생이 이루어지기를. 허나 우리가 고대인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낭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기에.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행복한 시대”에서 너무나 떠나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삶에 미련을 갖는다. 아주 조금 남겨진 삶에서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햇살에 미련을 갖는다.

 

선주원∙문학평론가. 저서 소설교육의 원리와 방법, 청소년 문학교육론 등. 광주교대 교수.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