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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랑승만/시론 詩는 내 생명 창조의 승화, 정신생명 부활의 영원한 話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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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論/浪丞萬
詩는 내 생명 창조의 승화, 정신생명 부활의 영원한 話頭
詩의 생명력을 마시며 詩를 씁니다. 나는 나의 詩에서 맑고 강인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아니 詩의 생명력을 마시며 거듭납니다. 그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문학적 신조가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198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장장 35년 동안 반신불구의 반쪼가리 육신으로 살아오면서 그 동반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터득한 문학적인 삶의 의지며 정신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시 한 편 쓰면 10년은 더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며, 시집 한 권을 내놓으면 30년은 더 산다.”는 나의 정신생명 부활의지의 문학정신적 신조라 하겠습니다. 아니 의지이고 집념입니다. 사뭇 황당무계한 미신 같은 소리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詩의 생명력을 마시며 時를 쓰고 언제나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나의 詩는 불교정신을 바탕한 衆生愛的인, 더불어 사는 인연의 아픔과 사랑을 나누는 철학을 터득합니다. 또한 詩는 영혼과 생명의 소리여야 한다고 至論합니다. 그래서 우리 詩의 독자는 詩를 통한 시인의 영혼과의 만남으로 우주적인 사랑을 교감하고 신선한 생명력을 나눈다고 봅니다.
장장 35년 동안 반신불구의 몸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보니,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살아가기 힘드시죠?”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그 반대입니다. “살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죽기가 힘들다”고.
죽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누구는 또 나보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도 합니다. 사실 열심히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몸부림치듯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35년의 세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는 세 가지 끔찍한 재산이 있습니다. 내 인생적 ‘삶의 무게’로써……. ‘외로움, 가난, 병고’ 이 세 가지가 내게는 대단한 재산입니다. 이 세 가지 재산이 있음으로써 내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오히려 힘이 되어 의지와 집념으로써 내 아픔과 한을 이겨오며 시로써 거듭납니다. 이 세 가지 재산은 내게 있어 ‘절대적 스승’이 됩니다.
佛家의 말씀에 ‘번뇌, 즉 菩提’란 진리가 있습니다. 즉, 번뇌 그 자체가 곧 보리(큰 깨달음, 지혜, 행복)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번뇌가 최고의 지혜를 얻어 행복을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生死 즉, 열반’과 함께 쓰는 말로써 중생의 迷見으로 보면 미망의 주체인 번뇌와 覺悟의 주체인 보리가 전혀 딴판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세속의 말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變毒爲藥’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독을 바꾸어 약으로 만든다는 뜻이니, “비상도 잘못 먹으면 극약이 되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버리지만 잘 먹으면 약이 된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독을 약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가 그것입니다. 화엄경의 법계연기론에 의하면 미망의 현실 밖에 따로 각오의 실재를 인정치 아니하므로 번뇌의 당체가 그대로 ‘보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번뇌가 실상이며 법계의 실덕이어서, 그대로 ‘보리’라고 하는 것인 즉, 번뇌를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보리’로 요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여기 영구임대주공아파트 내 방에는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예부터 ‘여천암’이라 해왔고요.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사설 암자인 ‘여천암’의 자칭 ‘암주’인 셈입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 憎俗이 따로 둘이 아니다”라고 감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18년전 5월 어떤 인연으로 강원도 화천의 아주 깊은 산골에 가서 10여일 묵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유촌리란 깊은 산마을에서 용화산이란 아름다운 영산을 만났습니다. 그 용화산 산자락에 ‘지장암’이란 암자를 세우고 있는 지평스님이란 젊은 선사도 만났었습니다. 56억 7천만년 까마득한 훗날에 미륵부처님이 여신다는 용화세계와 같은, 아름답고 수승한 산세와 영기에 그저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지평선사와 한 방에서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용화산이 꼭 56억 7천만년 그 까마득한 훗날의 죽음도 삶도 뛰어 넘는, 미륵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이상의 세계, 그 미륵보살이 여시는 세계가 오면, 온갖 욕락에 사로잡힌 중생들, 하잘 것 없는 서푼어치 권력과 명예와 단돈 몇 푼에 피투성이가 되어 목숨을 거는, 서로 짓밟고 헐뜯고 죽이고 죽음을 당하는 이 중생계의 짓거리들, 단 일백 년도 못 사는 아니, 소나무 한 그루 자라는 나이테만도 못한 목숨들을 이어가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는 중생들을 보면, 56억 7천만년이란 아득한 나이테에 비유하면 참으로 가소롭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56억 7천만년 그 까마득한 훗날 우리 본래 면목으로 다시 만나자’는 연작 장시를 쓸 언어를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부터 내 가슴엔 장엄하고 울창한 山이 하나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적할 때면 내 안의 山속으로 들어가 山비를 가끔 맞습니다. 맑고 시원한 산비, 가슴에 촉촉이 적셔드는 산비. 그 산비를, 산비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있으면 온몸이 청정해집니다. 일체 욕락慾樂을 멀리한 경계 속에 파묻힙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도 듣습니다. 꽃망울 벙그는 소리, 골짜기의 맑고 맑은 샘물 흐르는 소리도 듣습니다.
때묻은 더러운 발자국소리는 내 안의 山속엔 들려오지 않습니다. 아니 이 산 속에는 그런 오염된 발자국소리는 틈입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만이 이 산속에서 유유자적합니다. 맑은 바람과 물소리, 새소리, 꽃피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영혼의 言語話頭를 가다듬습니다. 이 아름다운 山은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 안에 자리했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시는 나에게 있어 예술적 언어작업이기 이전에 생명창조, 정신생명부활로서의 화두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山은 내 영혼을 살찌우고 맑게 하는 우주법계의 텃밭입니다. 나는 내 안의 山속에서 法을 구하고, 스승을 찾고, 나의 목소리(詩一言語)를 찾기 위해, 이 산 속에서 8만4천 마리의 소(소는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佛經이 8만 4천경이어서 팔만대장경이라 하니 그 부처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함이니 팔만 사천 마리의 소를 키운다 했습니다)를 키우고 있는 중입니다.
살아가기가 어려운 俗氣를 멀리한 죽기가 어려운 삶과 죽음, 외로움과 가난의 갈림길에서 터득한 내 문학과 영혼의 숲길입니다. 이곳은 나만의 극락이요, 淨土입니다. 시를 쓴다는 일은 행복한 영혼의 언어를 천착한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시는 내게 있어 영원한 화두입니다. “살기보다 참으로 죽기가 힘들구나” 이 또한 나의 화두가 아니겠습니까.
1956년, 내 나이 24세때 ≪문학예술≫誌에 이한직 선생으로부터 시 「숲」이 추천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40여 년, 이미 세상을 떠난 김관식, 천상병, 박봉우, 윤삼하, 박재삼, 권일송, 조운제. 박성룡 등 詩友들과 명동 바닥의 백작들이 되어 詩와 술과 사랑과 낭만으로 정열의 불꽃을 태우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내 나이 벌써 82세에 들어섰으니 참으로 세월의 흐름이 물보다도 빠릅니다.
내 淸淨한 영혼의 목소리에 묻어나올 生命의 汁이 얼마나 實답게 抽出되어 나와서 나의 진솔한 言語들에게 맑은 이슬처럼 영롱하게 맺혀지는지가 내 詩의 영원한 話頭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生命의 汁이 내 영혼의 진정한 苦惱의 結實일 때 더욱 값집니다. 또한 더더욱 그 빛나는 언어의 이슬방울들이 우리들 歷史의 江물 속으로 함께 뛰어들어 흘러간다면 이야말로 기똥차게 끝내주는 일이 아닙니까.
진정한 苦惱로 천착해낸 言語에는 처절한 빛깔의 ‘눈’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즉, 歷史를 바라보는 색깔 있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언어들……. 그 언어들이 역사를 무관심하게 비켜가거나, 아니 그보다 이 땅의 우리들의 歷史로부터 오히려 그 언어들이 무관심당하고 외면당한다면 그 詩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詩人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미 그는 시인이 아닙니다. 여과되지 않은 관념적인 말 몇 마디 늘어놓고 짜깁기를 하여 문장을 만든다고 늘어놓아도 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詩歷 58年으로 터득한 문학적 덕목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값진 生命의 汁이 서린 言語들을 천착해 낼 수 있을지 내 가엾은 영혼에 거듭거듭 言語의 불꽃을 사르고 사루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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