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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이명/고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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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이명
고욤
달이
지구 주위를 돌다
돌다가 허물어져 반쪽이 되고
끝내는 푹 삭아
삭아서 캄캄한 하늘이 되고 마는
네 주위를 맴돌다
시커멓게 타 버린 날이 내게도 있었다
과메기
구룡포 해변
청어들이 줄에 매달려 혹한의 바람을 맞고 있다
온몸에서 빛이 흐른다
질서정연한 빛의 대오
하늘은, 깊고 깊은 유년의 하늘
바람 씽씽 부는 교정, 아이들 틈새에 나는 서 있었다
멀건 김칫국에 허기를 달래가며 내 몸에서도 수분이 말라가던 시절
눈빛 하나로 견디어 내던 겨울이었다
그 눈빛, 오늘 저 몸에서 살아 빛난다
금환일식
눈부신 오월에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캄캄 하늘 떠돌이별이었던 낯선 우리가
해가 달을 온전히 품어 하나 되듯이
황금빛 반지를 만들어내듯이
나는 너의 후광이고 싶다
그 황금빛 반지 네 손가락에서 빛나는 오늘
이제부터 우리는 붙박이별이다
붙박이별의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황금마차를 타고
저 넓은 우주로 떠나가는 것이다
난꽃
귀도 먹고 눈도 멀고 허리는 꼿꼿하다
꼬장꼬장하던 날들은 가고 그림자도 휘늘어졌다
여러 날 동안 물을 주지도 않고 추운 베란다에 내놓으니 고요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방안으로 스며드는 암향暗香,
그러나 대책도 없이
혓바닥을 내민 얼굴은 환하다
너도바람꽃
바람이
빨래의 물기를 말끔히 거두어 가면
빨래는 가벼워진다
네 속에 든 바람이
내 안의 물기를 거두어 갈 때
나도 가벼워진다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진다
산이라도
바다라도
사막이라도
비록 그곳이 미명일지라도
내가 날아가는 그곳에서
너는 더없이 가벼워질 것이지만
찾고 또 찾아봐도 냉랭함과 스산함뿐
훠이, 훠이
네 하얀 솜털에 묻혀 훅 불면 날아가는
차라리 나도 바람꽃이면 어떻겠니
누렁 달팽이
서울의 야심한 도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누렁 달팽이다
거대한 도시의 시퍼런 눈빛 몇 개가
밤마다 으스스 내려다보는 서울역 광장에 서면
심장 박동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임진년과 병자년이 살아 돌아오고 지하가 숨을 쉬는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뻥 뚫린 지하 통로에서
빈털터리 역사 같은
누런 상자 속을 스멀스멀 기어 나와
소리 없이 미끄러지다 어슬렁어슬렁 되돌아오는
달팽이의 순라
달이나 별이나
가로등 희미한 뒷골목이나
내가 한 때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외로움이라거나 슬픔이라거나 절망이라거나
이제 그 어느 것으로도 무장이 해제된 조선의 병사들
오늘도 잠 못 이루는 풀들이 길을 비추고
나는 밤새 그들의 묵시록을 읽는다
코드를 꼽다
목로술집, 그곳은 바다였다
애초부터 바다는 방전되어 있었음으로 어둠이었다
한 번 출항한 배는 적막함을 가득 싣고 돌아오고
경매인이 없는 부두는 슬픔이었다
여름은 다 늙어 가고 유녀의 깊은 눈빛 속을
고기들이 온몸을 흔들며 다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었다
문득 당신이 떠올랐다
그 바다에서 나는 사랑도 색깔이 있고 향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온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목이 말랐다
충전이 필요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벽 하나를 건져 올려 코드를 꼽는다
당신을 만난다
하늘 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까만 점 하나 흘러갔다
하얀 줄을 그으며 갔다
선명한 줄은 부풀어 점점 퍼져나갔다
비행기도 하늘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는구나
하늘도 깊어지면 바다가 되는구나
와!
저기에도 섬이 있겠다
아이들도 새카맣겠다
유년의 바다가 저기에 있었구나
하늘 죽비
오늘 새벽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어둠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폭설이 내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뒤덮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나의 잘못을 헤아렸다
호야나무 아래서
해미읍성, 300년 넘은 호야나무 아래서
동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가지 하나 보았죠
흐릿하게 남아 있는 철사 자국
밤을 새운 별들이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가듯이
사랑은 헤어짐에 있고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에 있음을
별빛을 보고서야 알았죠
신앙이 철사 줄에 묶여 가지에 오르고
신앙이 낙엽이 되고
신앙이 별이 되어 하늘에서 빛나는
그 날이 오늘인지는
눈물을 흘리며 떨어지는
별 하나를 보고서야 알았죠
우리가 서로 바라보며
너와 나의 별이라 불렀던 그 별과도
작별이겠죠
내일 밤이면
저 하늘 한 개 별이 되어 떠오르겠죠
더 큰 사랑이겠죠
후투티에게
볼 때마다
아프리카풍 정장 차림에다
밤낮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깃털모자
언제 벗을래
오늘따라
세워 올린 모자가 더욱 뚜렷하구나
너는 사생활도 없니?
이명∙2011년 <불교신문>으로 등단.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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