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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아라소설/강인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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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590회 작성일 14-03-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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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새하고 무슨 원수라도 졌어요?”

베란다 창문을 열다 말고 거기 걸려 있는 새장 속의 십자매를 보며 낯살을 잔뜩 찌푸리는 나를 아내가 핥듯이 흘겨보며 혀를 찼다. 이것은 요즘 들어 거의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새는 아무 눈치도 모르고 그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짧게 짧게 새장 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반쯤 비틀며 혼잣말로 나직이 이죽거렸다.

“그럼, 원수를 지다마다.”

“그래도 어쩌겠수. 우리 인정이가 지네 선생님한테 선물을 받아 가지고 와서 그리 애지중지하고 있으니 말이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말았는지 아내가 가만히 목소리에 힘을 빼며 뇌까렸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언뜻 아내의 얼굴에 그 적적한 세월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고단했지만 사실 아내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착한 여자였다. 나는 늘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올해 중3에 올라간 딸 인정이 나이쯤 되었을 때 우리는 충청남도 장항의 어느 보육원에서 함께 서글프게 자랐던 것이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고아원도 사실은 새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혀 햇빛이 들지 않는 창문들. 그래서 우리는 남 몰래 별을 키우고 있었다.

“저 별은 내 별.”

하고 내가 밤하늘의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을 찾아 가리키면, 그녀는 으레 그보다 더 큰 별을 찾아 밤하늘을 날며,

“그럼, 저 별은 내 별.”

하고 받았다. 사실 우리는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뜰 앞에 나란히 앉아 남몰래 별을 키웠고, 그 별빛으로나마 조금씩 가슴의 창문 열었다. 그 별의 먼 고도孤島. 우리는 그렇게 정이 그리운 것이었다. 우리도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받고만 싶은 것이 아니라, 주고도 싶은 것이었다. 차라리 엄마라도 있으면 때로는 밤새껏 엄마한테 맞아도 보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새장 안에서 짧게 짧게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고 열여덟 살이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자기의 보금자리를 치기 위해 낯선 산이나 강기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다행히 고아원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또 그 뒤 은인을 만나 그리 어렵잖게 대학까지 나왔지만, 그때 아내는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녀는 그 대신 그대로 보육원에 남아서 나이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보육원에서 나와 무슨 공장엔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다시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그 장항제련소에 취직해 다닐 때였다. 그때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으므로 손수 장보기를 해야 했는데, 바로 그 시장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 무렵은 그녀도 이미 숙녀가 다 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결혼이라도 한 줄 알고 몇 번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다방에 데리고 갔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부끄럽게 웃으며 고작 남의 집 가정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 오빠가 대학까지 나왔다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때까지도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운이 좋았던 거지 뭐.”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오빤 그때 어느 부잣집에 양아들로 들어갔지?”

부러운 눈으로 나를 짠하게 바라보며 그녀가 싱긋이 웃었다. 어딘가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끝없이 이 말이 씌어 있었다.

“……오빤 참 좋겠다. ……오빤 참 좋겠다.”

하지만 그 집에 아들이 많아서 양아들은 못 들고 그냥 일방적으로 은혜만을 입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또 하나 세상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얻었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옛날 고아원에서 지낼 때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어 갔다. 그녀는 어느 때든 틈나는 대로 내 자취방에 장보기를 해 와서 맛있게 반찬도 만들어주고, 청소, 빨래도 해주었다. 그러고는 으레 한숨처럼 허전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까지는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나를 늘 오빠라고 불렀으므로 나도 자연 그녀를 측은한 여동생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더구나 두고 보니 그녀는 아직도 그 새장 안에 갇혀 숨죽이고 ‘저 별은 내 별’만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말했다.

“거기서 그리 힘들게 일하고 살기가 어려우면 그냥 여기 와서 나하고 같이 지내지. 옛날처럼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지 뭐.”

“정말? 정말 그래도 돼?”

다짐을 받듯 그녀가 속삭였다.

“정말이지 않구.”

나는 재차 이렇게 못을 박았다.

“그럼 내가 먹을 것은 내가 벌게.”

그렇게 시작되어 어언 10여 년이 넘게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마치 한 쌍의 새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억울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정말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베란다에 걸려 있는 저 새장 속의 십자매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자꾸 어린 날이 끈적끈적 생각나고, 가슴이 탁탁 막혀서 답답해 견딜 수가 없을 뿐이지.

그때 마침 딸아이 인정이가 칫솔을 물고 베란다에 나왔다. 방학이라 이제야 늦잠에서 일어난 모양이다. 그래도 녀석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덕분에 나는 때때로 인생을 두 번씩이나 사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더욱이 아내의 말을 듣자니, 학교에서는 제법 바지런하여 반장 일까지 맡고 있어서 담임선생님의 귀염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 십자매까지 선물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말썽이다.

나는 얼굴 가득 인정이에게 아첨하는 웃음을 지어 보냈다.

“인정아, 우리 이 새 멀리 날려 보내주면 어떨까? 자유가 있는 아주 먼 곳으로! 하루 종일 조롱 속에서 갑갑하지 않겠니?”

그러자 인정이가 똥그랗게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빠도 참, 이 새는 사람의 보호를 받고 살도록 되어 있어요. 집에서나 기르는 십자매를 저 험한 세상에 날려 보내면 어디서 무엇을 먹고 살겠어요. 참새라면 몰라도. 아빠, 지금 전 사실 너무너무 고맙고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아빠가 저를 자상하게 보살피며 키우듯이 말예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넌, 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때 뒤에 서 있던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냉큼 끼어들었다.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임금님의 딸을 만났으면 이런 집이 아닌 어디 하늘나라에라도 가서 살 줄 알았어요?”

그 또한 내게는 침처럼 아픈 말이다.

사실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실은 여태 아내가 바로 그 새였는지도 모른다. 밤마다 편안하게 이부자리 펴주고, 예쁘게 새끼도 낳아주고,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 노래 잘 불러주는 애완조愛玩鳥였는지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때 나는 오직 그녀를 좀더 먼 하늘로 날려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그 방생의 의미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살다 보니 그 반대로 되어 갔다. 본의 아니게 나는 오히려 더 완고한 새장 안에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가끔씩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점도 없진 않았다. 나는 어쩌다 은인을 만나 대학까지 나왔지만 그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것이 하등 흉이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남 몰래 내게 딴 야심이 있었으면 그것은 오로지 내 몫의 죄일 테니까. 또, 그러라고 그 은인이 나를 대학까지 보내준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왠지 사람이 슬슬 치사하게 변해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괜히 어깨도 좀 펴고 싶고, 어디에든 꼭꼭 한 마디씩 끼고 싶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옛날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내가 마치 자기들의 무슨 대변인인 양 걸핏하면 패거리로 몰려와서 ‘대학생, 대학생’ 하면서 나를 잔뜩 우쭐거리도록 꼬드기는 것이었다.

바로 이 무렵 내 마음이 그렇게 방종해질 때 아내에게 지은 죄가 작지 않다.

“당신 그때 일 생각 안 나?”

나는 싱크대 앞에서 쌀을 씻고 있는 아내를 흘끗 쳐다보았다.

“뭘 말이우?”

하지만 아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사람, 당신은 벌써 다 잊었어? 우리가 그 장항에서 새를 기르던 거 말야.”

오히려 내 목소리에 다소 신경질이 묻어 나왔다.

“아, 그 얘기. 그게 무슨 자랑이라구.”

그제야 아내가 쌀을 씻다 말고 나를 홱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그 새는 처음 아내가 사온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가 따분하다며 소일거리를 구하러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다니던 그녀가 어느 날 난데없이 잉꼬 한 쌍을 들고 와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도 잘 알 거예요. 저, 거시기 보육원에 있을 때 영순이 언니라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언니가 군산에서 새 장사를 하고 있지 뭐예요.”

그때도 아내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걸 사온 거야?”

나는 끌끌 혀를 찼다. 지금 우리 처지에 새는 무슨 얼어 죽을 새인가.

“사오긴요. 그냥 얻어왔죠. 부업을 해도 괜찮대요. 수입이 짭짤하대요.”

사실 잘못을 말한다면 벌써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아무튼 그 잉꼬는 몸의 생김새며 털의 빛깔이 화려했다. 하긴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가 아닌가. 암수가 서로 그 잔뜩 꼬부라진 주둥이를 비벼가며 밥그릇에 담긴 좁쌀을 사이좋게 잘도 쪼아 먹었다. 서로 번갈아 횃대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새장 안에서 짧게 짧게 날아다니며 온갖 재롱을 다 떨었다.

어느 날 아침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이 새 부업을 해도 괜찮다고 그랬지?”

그러자 아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건 왜요?”

“왜긴.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지 뭐.”

“그럼 제가 한 번 부업을 해볼까요?”

그제야 나는 빙긋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것도 좋지.”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우리는 당장 그 새를 사기 위해 배를 타고 군산으로 건너갔다. 사실 여기까지도 좋았다. 그날 우리는 잉꼬 두 쌍과 십자매 세 쌍, 그리고 문조도 한 쌍 더 사왔다. 십자매는 번식성이 강한 새라고 그쪽에서 권해서 샀고, 문조는 좀 비싼 새이지만 흰 털에 부리가 빨간 게 아주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 보여서 내가 따로 고집하여 산 것이다.

그러잖아도 좁은 방안이 이제 그 새장들로 가득 찼다. 한참 새들이 푸덕거릴 때는 방안이 시끄럽고 먼지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세 쌍의 잉꼬가 알을 낳으면 십자매가 대신 번갈아가며 열심히 품어주었다. 십자매는 원래 다른 새의 알을 품어 까주도록 하기 위해 키우는 새라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그렇게 새들을 여러 쌍 기르다 보니 엉뚱하게도 부스럼 같은 돈 욕심이 생기더란 얘기다. 하지만 새들은 특히 감기에 약했다. 또 시들시들 감기에만 한 번 걸렸다 하면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그 부스럼 같은 돈독에 오른 나는 새가 죽을 때마다 두 눈을 까뒤집었다.

“이 사람아, 그러게 말로만 부업을 하지 말고, 한 번 전문적으로 ‘새 기르기’에 관해서 공부를 해보란 말야.”

그러고는 이렇게 아내를 그 새 대신 새장 속에 집어넣었다. 하기는 오죽하면 갈매기까지도 탐내어 부업을 삼으려 했을까. 그 정도면 말 다한 것 아닌가.

“저것도 한 번 길러 봤으면…….”

기른 새를 다시 새 가게에 팔기 위해 군산으로 갈 때는 으레 여객선을 타야 했다. 지금이야 장항과 군산 사이에 대교가 가로놓여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 긴 해협을 군산호와 서천호 두 여객선이 왕래하며 연결해 주었는데, 파닥파닥 깃을 털며 괭이갈매기가 지천으로 날고 있었다. 괭이갈매기는 어부들의 좋은 친구요, 우리나라 바다새의 대표적인 텃새이다. 그런데 그런 새를 새장에 잡아넣어 기르려고 했으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겠는가.

보다 못해 아내가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알고 보면 당신이야말로 진짜 지독한 새장에 갇힌 새예요. 어찌 배운 사람이 그래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게들의 작은 발목들이 수없이 빠져 있는 그 한 도시와 한 도시의 사이에서, 그 한 가슴과 한 가슴의 사이에서. 사실은 이것이 여태 내가 한 일 가운데 두고두고 기억되는 내 인생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다.

나는 그 뒤 깨끗이 마음을 고쳐먹고 새를 모두 다 도로 팔아버렸다. 그리고 인정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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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빨리 밥 주세요. 밥 먹고 오늘은 학교에 가야 한단 말예요. 오늘은 8, 15 광복절이잖아요. 반장이라 행사에 꼭 참석해야 돼요.”

그때 딸아이 인정이가 안방에서 밥 달라고 새 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강인봉∙1949년 전북 김제 출생. 1970년 원광대 국문과 재학시절 불교에 입문, 그해 첫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를 발간하였고, 견성見性을 하였으며, 1984년에는 경허․만공․혜암 선사로 전해 온 불조佛祖의 전법게傳法偈를 이어받았음. 1979년 ≪한국문학≫ 1백만원 고료 신인상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1천만원 고료 소설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전3권), 다시 에덴에서, 불의 침묵. 시집 첫사랑, 간월도. 산문집 풀,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덕숭산 방장德崇山方丈 혜암의 법어를 편역한 법어집法語集 늙은 원숭이 등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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