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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아라소설/장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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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에서 깬 건 옆방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또 그 짓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밤새 그 짓을 하고도 모자라 대낮에도 그 짓을 하는 것을 보면 김씨는 오늘도 인력시장에서 허탕을 치고 들어온 모양이다.
김씨가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공칠 때면 김씨의 방에서는 늘 그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변함없이 벽을 타고 넘어와 내 귀에 대고 음탕하게 속삭인다.
신음소리는 내 허기짐을 난도질 한다. 신음은 마치 배고픔을 경멸하는 것 같다. 꼬르륵 꼬르륵, 신음이 계속되면 내 위장은 주체하지 못한 채 위산을 쥐어짠다.
나는 의미 없이 눈을 두어 번 끔뻑인다. 기지개를 펴자 기다렸다는 듯 한숨이 새어나온다.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검게 피어오른 곰팡이가 0.7평의 어두컴컴한 쪽방에 가득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상실과 마주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달 전, 나는 쪽방촌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것이 내 기억의 시작이며 전부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아니면 땅에서 솟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한순간 엄습해오던 불안과 공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잔인하게 위장을 뒤틀던 그 배고픔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쪽방촌 골목에서 길을 잃고 해매고 있을 때 김씨가 나타났다.
“이봐 이씨!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씨? 나는 쪽방촌에서 이씨로 통한다. 그것이 나에 대해 알게 된 전부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단지 쪽방촌의 이씨다.
하루의 시작은 곤혹스럽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무뎌진지 오래다. 나는 쪽방의 어둠에 익숙하다. 온통 백지뿐인 과거와 현실들이 입을 다문 채 쪽방의 작은 공간을 유영하고 다닌다. 그 공간에서 덩달아 허우적거리는 것이 나의 몫이다.
편두통이 밀려온다. 시작이 편두통이라면 그 끝은 늘 체념이다. 나는 오늘 역시 체념을 끝으로 이불 속에서 게으른 하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씨 부부의 질퍽한 몸부림의 흔적은 내 청각과 후각을 정신없이 후벼내고도 모자란 모양이다. 도대체 뭘 그리 게워 내려고 저리도 안간힘을 쓰고 바동거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 아랫도리는 묵직해지지 않는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의욕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누운 채 신음소리를 듣는다. 어쩔 때는 선 채로 멍하니 그 소리를 듣기도 한다.
신음소리가 사그라질 즈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그 누군가가 삶의 의욕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나는 애써 저버리고 만다. 게으름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불을 밀어내려는 순간 현기증이 밀려온다.
쪽방 주인아줌마가 앞에 서 있다. 며칠째 내지 못하는 방세 때문에 아줌마의 안색이 달갑지 않다. 그만큼 나는 쥐구멍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만다.
“밥은 먹은 거야? 쯧쯧. 젊은 사람이 일을 해야지.”
아줌마는 밀린 방세를 탓하지 않는다. 젊음을 탓한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아줌마를 외면해야 한다. 주인아줌마가 돌아가고 난 후에 나는 다시 게으른 하품을 쏟아낸다. 하품의 언저리에 배고픔이 허하게 달려 있다. 언제나 맞이하는 배고픔의 그늘이다.
내 쪽방엔 살림살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시커멓게 그을린 냄비와 가까스로 불이 붙는 고물 가스버너, 그리고 낡은 담요가 내가 소유한 전부다.
벽에는 잠시 머물다 갔을 누군가의 흔적들로 넘쳐 난다. 그 흔적들을 나는 조심스럽게 거슬러 올라간다.
‘나 여기에 있었다.’
누구일까? 나는 다시 벽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도 여기에 있었다.’
각기 다른 글씨체들이다. 한 사람이 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유심히 그 글귀들을 살핀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내가 쓴다. 나는 스스로 ‘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나는 정작 알지 못한다. 한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쪽방의 ‘나’가 되어버린 나는 다시 막막해진다. 원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단지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나에 대해 무뎌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생소한 ‘나’가 되어 쪽방에 있는 거라고 나는 나를 추정해 본다.
이곳 쪽방촌은 분주하지 않다. 하루는 느릿느릿 슬로모션으로 흐른다. 하루 종일 안개가 깔린 희미한 형국의 분위기가 쪽방을 짓누른다. 그 짓누름이 소리를 만들면 나는 그 소리를 즐긴다. 김씨를 따라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허리를 다쳐 들어온 날부터 나는 쪽방에서 만들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귀를 막았고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쪽방의 소리에 동화되었다. 쪽방촌의 ‘나’로 익숙해진 것이다.
쪽방에 있는 동안은 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옹색한 쪽방의 곳곳을 방문하다 보면 소리의 매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제는 잠시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쪽방의 미로 찾기를 소리로 즐긴다.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아도 쪽방의 소리는 제 색깔을 내며 벽을 넘어 들락거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볼썽사납게 슬리퍼가 껌을 씹는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로도 슬리퍼 주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슬리퍼의 주인은 가출한 만삭의 임산부 여학생이다.
그녀의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그렇다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녀의 슬리퍼 끄는 소리는 경쾌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매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요사이 그녀의 쪽방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동거남의 부재 때문이다. 며칠째 동거남은 쪽방을 찾지 않는다. 여학생의 동거남 역시 가출 청소년이다. 밤마다 우는 탓에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기 일쑤다. 나는 그녀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동정을 보일 만큼 나에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쪽방에서의 동정은 배부른 참견일 뿐이다.
배꼽시계가 울린다. 줄을 서야 할 시간이다. 한 끼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줄은 곧 서열이다. 하지만 이미 서열을 가리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이제 한 끼에 연연할 자격은 없다. 역전 무료급식차량 앞에는 사람들이 굶주린 독수리 떼처럼 새까맣게 모여 있을 것이다.
문득 건너편 쪽방의 비렁뱅이가 부러워진다. 비렁뱅이는 역전 옆 굴다리 위에서 구걸을 한다. 지금쯤 비렁뱅이는 역전 무료급식차량 앞에 있을 것이다. 쪽방에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한 반쯤 정신 나간 여자와 갓난아기도 함께 있을 것이다.
갓난아기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비렁뱅이의 쪽방에서 들린다. 비렁뱅이의 쪽방은 부재중일 텐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벌써 들어왔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역전의 무료급식 차량에서 식사를 마친 후에 비렁뱅이 식구들은 굴다리에서 구걸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역전에서 한 끼를 해결하는 터이기에 그들과 자주 마주치곤 한다. 하지만 그들과 말을 섞지는 않는다. 비렁뱅이의 식구들과 다를 것이 없는 처지임에도 그 잘난 자존심이 말 섞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렁뱅이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비렁뱅이의 여자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고개를 들면 구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쪽방을 출입할 때도 그들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비렁뱅이 식구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비렁뱅이는 늘 서열의 앞에 있다. 여자와 갓난아기 역시 그 앞에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들의 뒤에 있다. 어쩔 때는 서열에 밀려 굶을 때도 있다. 꼭 그것만을 따지지 않더라도 나는 늘 비렁뱅이가 먹고 남은 밥을 먹는 서열상 하위다. 나는 배부름에 만족한다. 하지만 비렁뱅이 식구는 배부름의 미학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비렁뱅이를 경멸할 수가 없다. 난 그 누구도 경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내 자신을 경멸한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공간을 뒤흔든다.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덩달아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모성은 슬프다. 그러나 나는 잔인하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비렁뱅이의 쪽방 문을 나는 열 수가 없다. 쪽방 문을 여는 순간 비렁뱅이의 행복이 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비렁뱅이의 행복을 침해하고 싶지 않다. 얼마 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쪽방의 소리들은 한순간 생겨났다가 한순간 사라지고 만다. 무뎌진 일상의 단조로움 때문이다. 소리의 근원이 어떠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소리의 끝과 시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소리를 무의식중에 즐길 뿐이다.
검게 그을린 냄비에 수돗물을 가득 채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라면스프와 교회에서 노숙자들에게 나눠준 건빵이 전부다. 건빵은 온전하지 않은 형태의 부스러기들 뿐이다. 가까스로 불이 오른 가스버너에 냄비를 올리고 불을 켜면 라면스프가 파르르 끓어오른다. 뒤이어 건빵부스러기가 자지러들며 입수한다. 그러면 한참을 파들파들 떨다가 건빵부스러기가 임산부 여학생의 얼굴처럼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입맛을 다신다. 건빵이 부풀어 오르다가 죽처럼 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래야 걸쭉한 기운을 느끼며 텅 빈 위장을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트림 한 번이면 끝이다. 트림을 하고 나면 불룩했던 배는 일순간 푹, 꺼지고 만다. 배부름의 미학도 느끼지 못한 채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오늘의 식사는 그것이 마지막이자 끝이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인력시장에 나가 볼 생각이다. 입에 풀칠을 하고 밀린 방세라도 내려면 내일은 꼭 일거리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일거리를 얻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기술자인 김씨도 일거리가 없어서 공치는 날이 많은 터에 허리까지 부실한 나를 고용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쪽방에서 언제까지 게으른 체념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역전 무료급식 차량 앞에서 한 끼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딱히 할 일이 없음이다. 허리가 욱신거린다. 날씨가 궂은 모양이다. 김씨의 쪽방 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시작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귀를 쫑긋 세운다.
“뭐야, 이 ××년아.”
김씨가 술을 마신 모양이다. 김씨는 일거리가 없을 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로 소일 삼는다. 김씨의 욕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거칠어지고 쌍스러워진다. 술만 마시면 김씨의 푸념은 게걸스럽다. 그러나 쪽방 식구 그 누구도 김씨의 주정에 대꾸하지 않는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김씨의 주정은 손뼉이다. 그 손뼉에 마주치고 싶어 하는 쪽방 식구는 없다. 쪽방 식구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는다. 그럴 때면 또 다른 손뼉은 영락없이 아주머니가 되고 만다. 김씨의 화풀이의 대상은 늘 아주머니다.
우당탕탕. 깨부술 만한 것도 없는 쪽방 살림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산산조각 난다. 김씨의 욕지기가 더욱 사나워진다. 쪽방 문이 열리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아주머니가 황급히 도망쳐 나온다. 아주머니가 도망쳐 나간 후에도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김씨의 욕지기는 대상을 찾아 곰팡이가 핀 쪽방 구석구석을 호령한다.
비렁뱅이의 쪽방에서 갓난아기가 운다. 겨우 달래서 재웠던 갓난아기가 자지러진다. 쪽방의 난장판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세세한 것들을 묵인한다. 그것은 쪽방의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쪽방을 더 처량하게 만든다. 정신이 반쯤 나간 비렁뱅이의 여자도 운다. 아기가 울어서 그녀도 운다. 울음소리는 이중주다. 나는 갓난아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하모니카가 노래를 한다. 하모니카의 노래가 비렁뱅이의 쪽방에서 날개를 단다. 춤을 춘다. 역전 굴다리 위에서 노래하던 비렁뱅이의 하모니카 음색이 아니다. 아비의 노래고 부모의 노래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비렁뱅이 여자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갓난아기가 잔기침을 해댄다. 비렁뱅이의 노래는 갓난아기를 따듯하게 감싼다.
나도 비렁뱅이를 따라 흥얼거린다. 그 사이 김씨의 쪽방에서도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김씨 아주머니는 어디로 도망친 것일까? 문득 나는 김씨 아주머니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지금쯤이면 쪽방의 눈치를 살피고 있어야 할 아주머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인기척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아주머니의 부재는 김씨의 코고는 소리로 무색해져만 간다. 무색함을 뒤로하고 아주머니의 맨발은 도심의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내 쪽방은 언제나 무료하다. 쪽방에는 나이면서 내가 아닌 내가 나를 가장한 채 누워 있다. 나는 다시 백지 상태인 나로 되돌아온다.
비렁뱅이의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비렁뱅이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렁뱅이는 쪽방 식구들 중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렁뱅이가 부럽다. 김씨가 부럽고, 김씨 아주머니가 부럽고, 임산부 여학생이 부럽다. 그들에게는 소리가 있어서 그것이 부럽다.
나는 누구일까? 내게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나는 쪽방의 나 아닌 나를 되 삼켜 본다. 나는 상실의 아찔함에 늘 혼란스럽다.
다시금 게으른 하품으로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그러나 막상 잠을 이룰 수는 없다. 다시 시작될 내일의 불안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얼마간을 뒤척인 후에야 나는 잠이 든다. 나는 공간을 유영하고 다닌다. 엄밀히 말하면 공간 속이다. 그 공간에서 나는 나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숨이 막혀 온다. 무엇인가 나의 몸을 옥죄어 오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익숙한 소리다. 신음은 벽을 넘어 나에게로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손길이다. 여자의 신음과 손길은 질퍽하다 못해 감미롭고 부드럽다. 의식 없는 의식 중에 나는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낀다. 신음과 함께 김씨 아주머니의 얼굴이 다가온다. 김씨 아주머니의 신음은 더욱 질퍽해 진다. 나는 결국 아주머니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만다. 알몸이 된 그녀가 나의 가슴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이 느껴져 온다.
나는 또 다른 꿈속의 꿈을 꾼다. 밥상이 보인다. 진수성찬의 상다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먹는 다는 말보다 입으로 쓸어 담는 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얼굴과 마주친다. 내 얼굴은 김씨의 얼굴로 변해 버린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동시에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 낸다. 나의 의식은 점점 혼미해져 간다.
꿈일 게다. 분명 꿈일 게다. 나는 발버둥 친다. 경멸하듯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본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점점 김씨의 얼굴로 변하여 나의 목을 움켜잡는다. 한참 뒤에야 나는 발버둥 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못된 상상의 반격일 테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싸한 한기가 느껴진다.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진땀을 닦으며 도리질 친다. 그러나 여자의 신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자세히 들으니 김씨 아주머니의 신음소리가 아니다. 신음소리는 심상치가 않다.
신음소리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름끼치는 신음에 나는 귀를 막는다. 그래도 들린다. 나는 할 수 없이 신음소리를 추정해 본다. 소리는 벽을 넘어 들어와 내 청각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신음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임산부 여학생의 방이다. 그러나 평상시 여학생의 방에서 들려오던 흐느낌의 흔적이 아니다. 뭔가가 다르다.
진통인가? 애를 낳으려는 거야? 그럴 리가. 나는 다시 담요를 덥고 눕는다. 하지만 소리의 출처를 확인한 이상 내 청각은 무뎌지지 않는다. 끙끙 앓고 있다. 간격을 두고 신음소리의 고조도 차이를 보인다. 신음은 사그라졌다가 다시금 피어나기를 반복한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가위에 눌린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아, 아줌마. 누, 누구……. 없어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쪽방촌의 누군가 그 소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누군가가 그 소리를 듣고 나오기를 기다린다. 더 이상 아무런 기척도 신음도 들리지 않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할 수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리곤 임산부 여학생의 쪽방 앞에서 귀 기울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망설인다. 단 한 번도 쪽방 식구들의 방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들의 삶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어떻게든 그 심상치 않은 신음을 확인해야 한다. 혹시라도 산통이 시작된 거라면 서둘러야 한다. 나는 다급하게 주인아줌마를 불렀다.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주인아줌마가 방문을 열자 역한 피 냄새가 쪽방 안에서 진동한다. 임산부 여학생은 이미 실신한 상태였다. 놀란 아줌마가 여학생을 흔들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임산부 여학생을 들쳐 업고 좁은 쪽방촌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여학생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하혈은 계속되고 나는 계속 달린다. 태아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다. 쪽방 동네를 향해 119구급차가 달려온다. 임산부 여학생을 태운 구급차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쪽방촌을 빠져나간다.
쪽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제야 손과 옷에 묻은 여학생의 하혈을 발견한다. 마치 살인자가 된 기분이다. 마치 쪽방의 익숙함을 도륙 당한 기분이다. 역한 피 냄새 때문에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몇 번의 헛구역질로 콧등에 땀이 맺힌다.
비렁뱅이의 방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좀 전의 소란에 아기가 깬 모양이다. 쪽방 동네에는 다시금 비렁뱅이의 하모니카가 노래를 한다. 노래는 쪽방을 지나, 굴다리를 지나 역전 무료급식 차량 앞에서 따끈한 국밥을 기다린다.
새벽 인력시장으로 향한다. 하루 일당거리라도 잡으면 다행일 터이지만 재수가 좋으면 며칠 일거리라도 얻을지 모른다. 나는 김씨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어슬렁거려 보지만 김씨를 찾을 수가 없다. 김씨가 있었다면 잡부로라도 따라붙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은 배고픈 허기로 변하고 만다. 마땅한 기술이 없는 나로서는 인력시장의 서열 중에서도 말단일 뿐이다.
날이 서서히 밝으면서 사람들은 인력시장을 하나 둘 떠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지만 부질없는 미련일 뿐이다. 이제 갈 곳은 한 곳 뿐이다. 나는 새벽녘에 듣던 비렁뱅이의 하모니카 노래를 따라 역전으로 향한다.
역전의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음을 삼킨다. 그리고 배식시간에 맞춰 줄을 서야 한다. 그곳에서 서열을 다투어야 한 끼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나는 적당한 자리에 몸을 숨긴다.
비렁뱅이는 언제나 서열 1순위를 고수한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비렁뱅이가 보이지 않는다. 눈 씻고 비렁뱅이를 찾아봐도 비렁뱅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비렁뱅이의 여자도, 갓난아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모니카의 노래도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비렁뱅이가 없기 때문일까? 왠지 그 자리가 익숙하지 않다. 나는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경찰관이 지나간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만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경찰관을 보면 죄 지은 사람 마냥 제발이 절인다. 아마도 나는 범죄자였을 것이다. 살인강도, 그 보다 더한, 이를 테면 유괴범이나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 추정하며 나는 절망한다. 나에 대한 상실을 그 무엇으로 되찾을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식판을 받아 길가 아무 곳에나 쪼그리고 앉아 입을 벌린다. 어찌 그 상태로 배부름의 미학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미학을 확인한다. 자신을 상실한 나로서는 그 이상을 바랄 수가 없다. 배부름의 미학은 어쩌면 배고픔일 것이다.
굴다리를 걷는다. 비렁뱅이가 보이지 않는다. 여자도 갓난아기도 보이지 않는다. 비렁뱅이가 앉아 있던 굴다리 위를 배회하다가 굴다리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어디에선가 동전이 데구루루 굴러온다. 손을 뻗으면 닿는다.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손을 뻗는다. 동전이 라면으로 변하며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는 동전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흔들리는 자존심을 나는 채근한다. 알량한 자존심은 이제 동전이다.
쪽방으로 향한다. 그러나 쪽방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 어디에서도 인기척을 찾을 길이 없다. 주인아줌마가 임산부 여학생의 방을 청소하고 있다. 나는 여학생에 대해 묻는다.
“쯧쯧.”
비렁뱅이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주인아줌마는 혀만 걷어찬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밤이 되어도 쪽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김씨 부부의 신음소리도, 여학생 임산부의 슬리퍼 소리도, 비렁뱅이의 하모니카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나는 귀를 바짝 곧추세운다. 하지만 역시나 쪽방의 그 어디에서도 소리를 찾아 낼 수는 없다.
쪽방은 부재중이다. 내 지난 과거가 부재중인 것처럼 모두가 부재중이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잘 수 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여학생과 비렁뱅이 그리고 그의 여자와 갓난아기, 김씨 부부를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쪽방의 소리에서 소외되었다.
쪽방에는 다른 식구들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쪽방 식구들에게서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쪽방의 소리는 너무도 단조로운 반복과 반복의 연속이었다. 어찌 보면 그 반복의 연속 때문에 나는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함을 찾아 나는 안간힘을 쓰며 일방통행을 시작한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온통 숨 막히는 정적뿐이다.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쪽방의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내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소리를 나는 정작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상실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지녔을 과거에의 소리들을 나는 찾을 수 있을까? 그 소리들이 너무도 그립다. 하지만 소리를 되찾기에는 그 기억들이 너무나도 모호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상실의 나날을 보낼 수는 없다. 뒷짐 진 채 내 자신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나는 눈을 뜬다. 나는 벽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나 아닌 내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여기에 있었다. 비렁뱅이 식구도, 여학생 임산부도, 김씨 부부도…….’
나는 자살을 꿈꾼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나를 스스로 죽인다는 건 나의 숙제이기도 했다. 그동안 숙제를 풀기 위해 예습 복습을 밥 먹듯이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소스를 찾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다. 소스에 버무릴 내 몸뚱이는 아직도 준비가 된 것 같지 않다. 내 삶은 반복의 일상이었다. 그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새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마른 오징어에 간장과 마요네즈가 들어간 소스를 찍어먹는 방식으로 삶에 미련을 품고 있다.
장순∙1970년생.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바쁘면 환절기에 만나자 외. 에세이집 내 머릿속의 또 다른 나 외. 장편소설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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