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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계간평/선주원/선주원|환상으로 존재의 심연 연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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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523회 작성일 14-03-1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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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원|환상으로 존재의 심연 연결하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연이 존재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잉여자가 아닌 상관자로 우리 삶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인식을 통해 세계를 보다 넓게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는 항상 심연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건너고자 하지만, 그 심연을 쉽게 건널 수는 없다.

우리는 타자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으로 인해 삶의 고독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의 고독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여길 필요가 있다.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여겨, 타자와의 상관성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설정하여 삶의 길을 개시開示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나아가야 할 이러한 방향에 대해 마틴 부버나 엠마누엘 레비나스, 미하일 바흐친 등은 타자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인간 삶의 지향이 되어야 함을 언급했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헌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새로운 성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내’ 안에 귀속시키는 태도가 아닌, 타자에게로 ‘향하는 나’를 지향해야 한다. 타자에 대한 지향을 통해 우리는 상호간의 심연을 연결할 수 있는 날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소수자로서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미셀 푸코의 언급처럼, 보이지 않는 미시권력에 의해 차별과 억압을 당하고, 일상에서 돈에 종속되어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돈에 종속되어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타자의 위치에 놓으며, 조르조 아감벤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 되게 한다.

‘벌거벗은 생명’과 같은 존재로서 우리가 정체성을 지키고, 현실에서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타자의 시선과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타자의 시선과 존재를 인정하는 가운데 타자를 ‘보는 자’가 아닌 타자와 ‘함께 보는 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타자를 ‘보는 자’이거나 타자에게 ‘보여지는 자’이다. 특히 ‘보여지는 자’가 될 때 우리는 ‘보는 자’들의 시선에 예속되어, 끊임없는 혼돈과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우리는 좌절 가운데 삶의 희망을 버리며, 타자와의 심연에 다리 놓기를 포기한다.

우리의 삶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정체성을 지키고 타자와의 심연에 다리를 놓기 위해 희망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정체성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타자와의 심연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개를 가질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환상을 통해 심연에 다리 놓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환상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의 심연을 건너고, 현실 너머에 있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꿈꾸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많은 소설들은 환상의 서사를 통해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다리를 놓거나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삶에 희망을 주거나, 부정당한 삶의 뿌리를 찾고 받아들이는 삶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일상에 압도되어 실존을 상실한 삶의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하고, 부박한 존재들의 삶에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고자 한다.

환상의 서사는 현실의 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토대를 제시하면서도, 무질서, 불법적인 것, 법과 지배적 가치체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을 짧은 순간 열어 보인다. 또한 현실의 말해지지 않은 부분, 보이지 않는 것, 즉 지금까지 침묵을 강요당하고 가려져 왔으며 은폐되고 부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온 것들을 추적한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거나 실제로 보일 수 있도록 허용된 적이 없는 것, 들어보지 못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상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환상의 서사는 일상과 이상理想 사이의 구멍을 메우려는 일종의 전략으로서, 현실을 견디기 위한 또 다른 소통 방식이 된다. 아울러 소외된 자들에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구멍을 메우려는 타자 지향성을 드러낸다.

환상의 서사를 통해 소외된 작중인물들이 아직 찾지 못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구멍, 즉 정체성을 메우려는 타자 지향성은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과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창비)에서도 읽을 수 있다.

 

 

환상에 의한 뿌리 찾기로 외로움 견디기:<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는 2012년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정희재 이야기와 1988년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진남에 살았던 정지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바람의 말(풍문)’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소설에서 많은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이야기 박물관인 ‘바람의 아카이브’를 통해 점들에서 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운동화 갑피를 만드는 부산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며 미국 유학을 간 아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업체의 부당해고에 투쟁하다 병들어 죽은 서 교수의 늙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관련된 서 교수의 기억, 진남공업조선소의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타워크레인에 올랐다가 끝내 투신자살한 정지은의 아버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타워크레인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HOPE’ 모스 부호를 보냈던 정지은의 기억, 죽은 양모 앤을 기억하는 카밀라 포트만, 진남여고 교정의 동백꽃 아래에서 자신을 안고 찍은 엄마가 있는 사진 한 장에 얽힌 기억의 흔적을 찾아 진남으로 온 카밀라 포트만, 열일곱 나이에 자신을 낳은 뒤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 정지은의 외로움을 찾아 받아들이는 정희재(카밀라 포트만), 어머니의 삶을 파멸로 몰고 간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이희재의 기억, 정지은을 임신시키고 가버린 최성식, 정희재를 미국으로 강제 입양시킨 최성식의 아내 신혜숙, 열일곱의 정지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김미옥 등의 이야기들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전개되고 있다.

‘바람의 말’이 전하는 수많은 불협화음의 이야기들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편지와 사진, 라디오 사진, 다큐멘터리 영상화면 등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점이 아닌 선으로 연결하여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죽은 정지은이 자신의 딸 희재를 ‘너’라고 칭하면서,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서술방식에 의해 환상의 서사를 구현한다. 이러한 환상의 서사를 통해 정지은은 당시로서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날개가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는 그 날개가 희재임을 말한다.

 

 

그랬는데, 지은이가 그때 제게 말했어요,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그렇게요. 저는 말문이 턱 막혔어요. 그런 제게 지은이가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라고 말하며 자기 배를 만졌어요.(278쪽)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건너 타인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관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밀라 포트만이 정희재가 되어 가는 과정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답을 찾고,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건너 타인에게 가 닿는 과정이다. 아울러 자신의 엄마가 겪었던 외로움을 받아들이며, 점들의 이야기를 선들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카밀라 포트만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하는, 즉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는 ‘벌거벗은 상태’에 처해 있다.

 

 

“카밀라는 카밀라이니까 카밀라인거지.”(17쪽)

 

 

카밀라는 자신의 정체성, 즉 뿌리를 스스로 찾기 위해 생모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뿌리를 찾는 과정은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점들을 스스로 발견해내고, 그 과정에서 그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전에 보이지 않던 점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 점들을 잇는 새로운 선들이 그어졌고, 네 인생은 그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이 달라질 때마다 너라는 존재도 바뀌었다.(203쪽)

 

 

카밀라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그 이전까지 몰랐던 수많은 바람의 말들을 접하면서 점차 정희재로 바뀌어간다. 카밀라가 정희재가 되어 가는 과정은 과거의 점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었다. 카밀라가 생모를 찾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는 진남여고 교정 동백꽃 앞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생모가 있는 사진 한 장이다. 이 사진은 숨어 있는 점들의 이야기를 카밀라에게 말한다. 그러기에 카밀라는 사진이라는 구체적인 사물과 기억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야기에는 흔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카밀라는 입양아로서 구성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서, 정희재가 되어 구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카밀라가 정희재로서 구성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엄마 사이에 놓여 있던 심연, 최성식, 신혜숙 등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건너야 한다. 이를 통해 정희재는 바람의 말(풍문)들, 즉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정지은의 삶의 진실을 이해하고 엄마와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 선의 이야기를 만들고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이 소설에서 신혜숙이나 최성식은 정지은을 타자로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정지은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25년 전의 끔찍한 일 이후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정지은이나 정희재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건너기보다는, 정지은이나 정희재를 불편한 존재로만 여긴다. 이런 감정 때문에 신혜숙이나 최성식은 정희재와 소통하지 못하고, 그들 사이의 심연을 건너지 못한다.

 

 

“우리와 그 아이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286쪽)

 

 

이 과정에서 정희재는 진남의 이야기 박물관인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엄마 정지은의 진실을 접하게 된다. 이를 통해 카밀라는 진정하게 정희재가 되며,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고독했던 엄마 정지은에게 맞닿는다. 물론 그것은 존재의 심연을 건널 수 있는 날개 달린 ‘희망’을 통해서이다.

 

 

열아홉 살 그 모습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어요.(중략) 그렇게 오래도록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늘 왜 나는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했을까 궁금했는데, 그 뒤로는 그녀가 더 궁금해졌어요. 왜 그녀는 외롭게 죽어야만 했을까.(228쪽)

 

 

정희재는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던 그 나이 그대로의 엄마를 환상을 통해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정희재는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며, 그 과정에서 희망의 날개를 발견하여 그들 사이의 심연을 건넌대. 물론 엄마 정지은도 언젠가는 딸이 날개가 되어 그들 사이의 심연을 건너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엄마 정지은은 이렇게 말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228쪽)

 

 

딸을 하루도 잊은 적 없이 언젠가는 딸이 날개가 되어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날을 기다렸던 엄마 정지은의 소망은 이루어진다. 카밀라가 정희재가 되어 엄마와의 심연을 희망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희망과 사랑을 가져야 하며, 타인을 타자로 인정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카밀라는 정희재가 됨으로써 엄마 정지은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뿌리를 찾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희망과 사랑을 통해 엄마 정지은과의 심연을 건넌다. 이를 통해 고통을 감내하고 바람의 말이 전하는 점들의 이야기를 선의 이야기로 만들어 ‘진실’과 만나게 되고, 삶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사건 속에 외면당한 엄마 정지은의 과거에 담긴 파편을 주워 담아 바람의 말(풍문)이 전하는 점들의 이야기를 선들의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카밀라가 정희재가 되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진 엄마의 비밀스러운 사랑에서 비롯되다. 그러기에 엄마와 딸의 심연은 그 사랑에 의해 좁혀지고 서로 맞닿는다.

 

 

환상으로 아버지 찾기와 유대감 형성하기:<달려라 아비>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에는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유대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환상적으로 제시된 아버지의 ‘달리기’이다. 달리고 있는 아버지는 복잡한 삶의 현실 저편에 있으며, 달리고 있는 순간 아버지는 청년으로서 현실 외부의 환상의 공간에 위치한다.

‘나’가 환상 속에서 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것은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우리를 버리고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원망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성장소설들은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속에, 위악적인 현실에 편입하기까지 주인공이 겪었던 성장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고아의식을 갖고서 아버지의 삶과 세계에서 독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이러한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대신에 환상의 공간에서 달리고 있는 아버지를 형상화하여, 환상의 공간에서 아버지와의 유대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부재하는 아버지를 수용하여 가족 서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항상 달리기를 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가 창조한 환상의 공간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낯선 것이지만, 친근하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로 인한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를 보여준다. 아버지를 환상의 공간에서 달리게 만들지 않고 원망을 한다면, 그 원망은 곧 ‘나’에게 이어져 ‘나’의 상처를 들추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가 창조한 환상의 공간에서 계속 달리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는 ‘나’가 우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힘을 준다.

‘나’가 창조한 환상의 공간에서 아버지를 계속 달리게 함으로써 ‘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간접적으로 푼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증오는 결국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힘든 세월을 살아왔던 ‘나’ 자신에 대한 상처이자 서러움일 뿐이다. 이는 일종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드러낸다. ‘나’를 버리고 간 나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결국 상처받은 ‘나’의 지난 세월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아버지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 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28~29쪽)

 

 

기대감에 부풀아 ‘작게’ 웃으면서 눈을 감는 ‘소년’ 같은 아버지는 ‘나’가 성장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유대감을 형성한 모습이다. ‘나’가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는 것은 부재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아버지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나’가 부재하는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긍정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글라스를 끼고 끊임없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는 우울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소망과의 유대를 통해 환상적인 존재가 된다. 이러한 환상적 유대를 통해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부드러운 현존으로 전환시켜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나’와 아버지의 이러한 유대감 형성은 그 이전의 성장소설들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고아의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환상적인 공간에 위치시켜 끊임없이 달리게 함으로써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위악적인 현실에서 편입하지 않고,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환상을 통해 가상의 아버지를 만들고, 부재하는 아버지와의 환상적 유대를 통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상화하여 정체성을 찾는다. 이는 부재하는 아버지로 인해 ‘나’가 받았던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버지를 ‘작은 웃음의 소년’으로 포용하여 환상적 공간에서 가족의 재구성과 정체성 형성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고독을 견디는 힘으로서의 환상

 

우리는 늘 일상의 힘에 압도당한 ‘벌거벗은 존재’로서 현실에 구속당한 채,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막상 현실 너머의 세계를 접할 때 우리는 망설이면서 현실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고독과 외로움에 젖는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힘을 주는 것은 현실 너머의 비가시적 세계를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고, 경이로움 속에 현실 너머의 세계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내디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환상이며, 환상의 서사는 우리가 희망의 날개를 달고 보이지 않았던 점들을 연결하여 선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열아홉 살 나이에 미혼모로 살다가 자살한 정지은의 희망, 즉 정희재의 뿌리 찾기를 환상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정희재는 타인들과의 심연 가운데, 자신의 지독한 고통과 슬픔 속에 먼 후일의 사랑을 꿈꾸었던 엄마 정지은의 삶의 흔적들을 선들의 이야기로 만든다. 이를 통해 정희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심연을 건널 수 있는 날개이며, 그 날개는 희망과 사랑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는 엄마의 말을 이해한다. 또한 그 사랑에 의해 엄마 정지은이 열아홉 살에는 보이지 않았던, 말할 수 없었던 희망의 날개 때문에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환상적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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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환상의 공간에서 계속 달리게 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랑을, 그리고 아버지와의 유대를 통한 정체성 확인을 하는 딸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나’는 아버지를 증오의 대상이 아닌 유대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역동적인 행위 즉, 달리기를 환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를 위해 ‘나’는 아버지가 편히 달릴 수 있도록 아버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워주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아비 없는 자식이 아님을 확인한다. 이러한 ‘나’의 확인은 환상의 서사를 통한 외로움 달래기와 정체성의 형성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주원∙문학평론가. 저서 <소설교육의 원리와 방법>, <청소년 문학교육론> 등. 광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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