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창간호/산문/김영식|윤갑중 일본 원정기
페이지 정보

본문
김영식|윤갑중 일본 원정기
‘아, 역시!…….’
윤갑중 과장은 야스코安子를 앞에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일본 출장에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이건 역시 성적으로 개방된 선진국 일본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199X년 5월 모일의 도쿄행 비행기에 윤 과장은 몸을 실었다. 올해 1월부로 영업부 대리에서 구매부 과장으로 승진한 후 처음으로 떠나는 일본 출장길. 그동안 관행적으로 구매하던 부품의 구매처를 다양화하여 원가절감을 꾀하겠다는 윤 과장의 의욕적인 첫 번째 프로젝트도 착착 진행되어, X 부품의 경우 새롭게 후보로 선택된 일본 사가라相良사와 최종 가격 협상을 위해 도쿄로 가는 길이었다.
사가라사의 샘플 테스트 결과는 합격. 문제는 가격인데, 구매부장에게 아직 보고하지 않았지만 윤 과장은 한 달 전 회사를 찾아온 사가라의 영업부장 야스이安井와는 가격에 관한 사전 조율을 이미 마친 상태였다. 야스이는, 지금 당장은 이 가격이지만 윤 과장이 직접 가격 협상차 일본에 오면 추가로 2∼3%를 할인해 윤의 공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은밀한 약속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출장은 그야말로 ‘떼 놓은 당상’이고 ‘식은 죽 먹기’였다. 미팅 후에 야스이가 어떤 접대로 자신을 기쁘게 해 줄 것인지 오로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윤 과장은 맥주 한 캔을 마신 후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과거 영업부에서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카투사에서 본토 영어까지 익힌 자신이 왜 영업부로 발령 났는지 불만스러웠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기회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구매부에는 결원이 없었거나 아무런 백그라운드가 없는 그가 회사 오너의 비자금줄인 구매부로 들어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평일에는 국내 거래처 접대로 주말에는 그들의 경조사에 쫓아다녔다. 어느 불량한 ‘갑’을 접할 때는 자신이 마치 꼬리를 흔들고 굽실대는 개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리고 거래처와의 약속이 없는 날에는 사내 회식이 생겼다. 개인적인 약속을 핑계로 회식에 빠진다는 것은 장래의 출세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접대를 핑계로 술집 아가씨와 노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그것도 1년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회사에 익숙해질 무렵 윤갑중에게는 회사 내의 실세 혹은 권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강한 라인 중의 하나는 사장의 사촌 동생인 구매부장 최강권인데 윤갑중은 그가 대학 선배라는 인연을 붙잡고 그 라인에 서기로 작정했다. 윤갑중은 공사를 가리지 않고 최강권에게 충성을 다했다. 골프광인 최강권과 어울리기 위해 골프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보험도 필요하니 사장의 후배로 또 하나의 막강 실세인 관리이사 부전승에게도 한동안 다리를 걸쳐 두었다. 그렇게 사내외로 분발하며 견뎌온 윤갑중은 줄도 잘 선 행운도 있어 어느새 관리 및 구매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한 최강권의 휘하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영업부에서의 힘든 ‘을’의 역할을 벗어나 이제는 ‘슈퍼 갑’ 구매부 과장으로서의 화려하고 풍족한 삶이 시작될 터였다. 눈을 뜨고 비행기 차창 밖을 바라본 하늘은 마치 그의 새로운 인생처럼 흰 구름 위로 창창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절차와 세관 검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니 야스이 부장이 저쪽에서 손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야스이에게 다가간 윤 부장은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는데 야스이 옆에 웬 미모의 여성이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야스이는 동아시아 담당자 미스 야스코라고 소개해 주었다.
한 시간 거리의 회사에 도착하여 윤 과장이 누구와 인사를 나누고 회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여기에 적을 필요도 없이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끝났다. 단 하나 적어 둘 것은, 윤 과장은 야스이 옆에 앉은 야스코를 의식하여 더욱 혀를 굴려대며 그의 유창한 카투사 영어를 십분 발휘하였는데 야스이 부장과는 달리 영어를 좀 더듬거리는 야스코가 “유아 잉글리시 이즈 베리 베리 굳도!”라고 칭찬하며 경탄의 눈빛을 보내는 걸 윤 과장은 짜릿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저녁 식사는 일본식 코스 요리 ‘가이세키’였다. 아기자기한 요리가 조그만 접시에 담겨 나왔다. 어느 접시에는 매화가 곁들여 있는 등 일본 음식은 마치 앞자리의 야스코처럼 앙증맞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생맥주로 시작되어 일본 소주, 그리고 사케로 이어졌다. 주로 야스이 부장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윤 과장의 시선은 자꾸만 야스코로 향했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가 술로 발갛게 물들어 야스코의 얼굴은 마치 붉은색 섞인 흰 복숭아 같았다. 또 윤 과장의 시선은 간간이 그리고 은밀하게 야스코의 불룩한 가슴께로 닿았다.
윤 과장에게 눈을 떼지 않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야스코를 바라보며 일본 여자의 순종적 매력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야스코의 립서비스는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우 극진했다. 특히 윤 과장이 아마 야스코의 미모를 칭찬해 주었던 것 같은데 그때 야스코가 얼굴을 붉히며 “아이 씽쿠 코리안 만 이즈 모아 한삼 댄 자파니스 만. 이스페샬리 유아 베리 한삼”이라고 답례의 말을 주었을 때, 윤갑중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불끈거릴 정도로 흥분했다.
2차는 윤 과장이 투숙하는 호텔 바에서 이어졌다. 그런데 30여 분 후에 야스이 부장은 집이 매우 멀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야스코와 단둘! 일본 아저씨 야스이는 얼마나 센스가 좋은가. 별로 웃기지도 않는 윤갑중의 말에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어주는 야스코를 보며 윤갑중은 자신감이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위스키 몇 잔을 마신 후 윤갑중이 과감히 호텔 방의 미니바에서 한 잔 더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자, 야스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딱 한 잔만 하고 가겠단다.
‘아, 역시!…….’
윤 과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일본 출장에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이건 역시 성적으로 개방된 선진국 일본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고교 졸업 때까지 처녀로 남아 있다는 걸 오히려 창피하게 생각할 정도로 일본 여자는 가볍다고 하지 않는가. 그동안 숱하게 보았던 일본 성인 비디오 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과 거의 같은 스토리로 남녀가 침대까지 가는데 비디오에서는 불과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가서는 비디오 장면처럼 하면 될 것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윤갑중은 느닷없이-그의 생각으로는 ‘남자답게!’-야스코를 껴안았다. “아라? 윤 상! 다메요” 야스코가 놀라 외쳤다. 윤은 일본 비디오를 많이 봐서 그 정도 일본어는 안다. 비디오의 여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건 으레 나오는 여자의 본능적 앙탈이었다. 여자의 이성은 그런 말을 하지만 본능은 남자를 받아들이기 마련이잖은가. 조금만 더 나가면 된다. 윤갑중은 막무가내로 입술을 갖다 대려고 했다. “야메떼!(그만 해)” 야스코는 힘껏 윤갑중을 밀어 제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윤갑중의 뺨을 짝! 세게 갈겼다.
순간 술이 확 깬 윤갑중. 볼이 얼얼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스토리가 다르지 않은가. 호텔 방 안까지 들어온다는 건 허락의 의미가 아니었나. 한국에서 어떤 여자는 그랬다. 그런 생각에 잠시 다음 행동을 머뭇거릴 때, 야스코는 방문을 휙 열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날 오전 야스이가 호텔 로비로 찾아왔다. 출근하자마자 야스코로부터 어젯밤 일에 관해 보고를 받았다. 윤 상에게 크게 실망했다. 야스코가 그런 심한 - 야스이는 ‘치쿠쇼(畜生, X새끼)’라는 말은 차마 윤에게 전하지 못했다 - 남자는 처음 봤다고 하며 상사인 자기에게 엄청 화를 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것도 겨우 만류했다고 한다.
윤갑중이 여자가 호텔 방 안에 들어온 것을 허락으로 오해했다고 하자, 한국에서는 그러냐. 윤 상은 아직 일본 여자를 모른다. 일본 여자는 상냥하지만 그것이 당신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어릴 때부터 그런 예절 교육을 받고 자라나 상냥하고 친절하다. 일본 여자는 평생 남편에게 순종하는 듯하지만 남편이 퇴직하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이혼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게 일본 여자라고…….
요즘과 달리 1990년대 초반의 일이라 시대를 잘 태어난 윤갑중은 무사히 귀국했다. 음란물이 거리에 범람하는 나라는 보통 여자도 그러하리라는 착각에 빠진, 음란물이 금지된 성후진국 한국 남자가 겪을 법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아니 프랑스인 칸 IMF 총재도 작년인가 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면 이건 어떤 ‘나쁜남자’ 부류의 일반적인 행태인가.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그 이후로 윤갑중이 비디오 흉내 내기를 그만두었는지 일본에서는 그만두고 국내에서만 하고 있는지 오래전에 회사를 떠난 필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놀랍게도 회사 오너의 인척도 아닌 그는 그 후로도 출세 가도를 달려 지금은 번듯한 계열회사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김영식∙2002년 리토피아 신인상 수상. 2003년 홈페이지 ‘일본문학취미’ 국고보조우수인터넷문학사이트 선정(문예진흥원). 2006년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 번역 출간. 2008년 라쇼몽(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문예세계문학선 61) 번역 출간. 2009년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골든에이지) 지음. (2008.01~09. 「망우리별곡-한국의 비명문학」으로 '신동아' 연재, 2009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2013년 ‘내셔널 트러스트’ 주관 ‘지키고 싶은 우리 문화유산’ 부문 수상). 2011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문예세계문학선 92) 번역 출간. 201년 무사시노 외(구니키다 돗포,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46) 번역 출간. 2012년 기러기(모리 오가이, 문예세계문학선 98) 번역 출간. 2013년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산림청장상 수상.
- 이전글창간호/한국을 이끄는 예술인/강인봉/형산을 보며-청람 전도진의 예술혼 14.03.11
- 다음글창간호/산문/장경기/장경기|아버지 노을길 14.03.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