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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한국을 이끄는 예술인/강인봉/형산을 보며-청람 전도진의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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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이끄는 예술인/강인봉/형산을 보며-청람 전도진의 예술혼
초저녁 한 장 선지를 앞에 놓고
한 점 붓을 드느니
그 겨울 남은 눈이 내린다
일찍이 형산에서 나와 형산으로
돌아가는 형산을 본다
아직도 소년은 그 강을 건너지 못했는가
물새 떼 자욱이 강에 깔리고
어느덧 하촌 새벽닭은 우는데
이순의 붓끝에 백발만 성성하구나
청람 전도진靑藍 田道鎭의 자작시 「형산衡山」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이곳이 아닌 저 먼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언뜻 그의 눈은 가을 먼 강물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 그에게서 글씨보다 먼저 그 얼굴에 마음이 끌렸다. 여운이 긴 조용한 음성과 그 고아한 인품. 그의 얼굴에선 언제나 새벽 시린 안개 냄새가 난다. 그처럼 청람은 천성이 맑고 올곧으며 격이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가 ‘21세기 대한민국 중진 서예가 10인’ 속에 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월간서예≫는 통권 240호(2001년 8월) 발행을 기념하여 서예평론가 정충락, 손병철 두 선생에게 의뢰, 20세기 대한민국 10대 서예가(안중근, 김구, 오세창, 김규진, 서병오, 손재형, 김충현, 유희강, 이철경, 이기우)와 21세기 대한민국 중진 서예가 10인(권창륜, 김구해, 김양동, 변요인, 신두영, 이돈흥, 인영선, 전도진, 전종주, 정도준)을 선정한 것이다.
청람은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를 퇴임한 후에는 인천 남동구 문화서로 4번길에 위치한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의 은은한 묵향 속에서 조용히 후학들만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심혈을 기울여 이남아, 박래창을 위시해서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10여 명과 시전 초대작가 20여 명을 배출해 냈다. 그는 좋은 자질을 갖춘 재목감을 만나면 무조건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한다.
청람은 ‘청출어람靑出於藍’에서 딴 아호雅號이다. 청출어람은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이르는 말이다. 중견 작가이자 전각의 명인인 그는 일찍이 고교시절에 이 엄청난 의미의 아호를 스승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1925~1975)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청람의 서예와 전각 역사는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피난시절 인천으로 내려온 그는 중고등학교와 인하대 교육대학원에서 한문교육학과를 마쳤다. 서예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66년 동정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시작했고, 전각은 68년 동정 선생의 소개로 전각가 석봉 고봉주石峰 高鳳柱(1906~1993) 선생을 만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인장印章에 대한 관심은 도구도 없이 감나무 도장을 열심히 새겨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초등학교 시절부터였다. 그는 인천의 선린동 화교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얇은 법첩法帖과 인보印譜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필법이나 각법刻法에 관계없이 그저 몽당붓으로 쓰고 문방구용 칼로 새겼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하면서 그림에 재주를 보이자 그의 글씨와 미술적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선생님이 동정 선생을 소개한다. 그런 연유로 당시 내동 창제한의원 2층에 자리한 인천 최초의 서실인 동정서숙에서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한 것이었다.
한국서단을 대표하는 인천 굴지의 대가 동정 선생은 전통에 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자기 필법을 세운 다음 현대적 조형어법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을 시도한 예파藝派 계통의 서예가로 그 명망을 한 몸에 받았던 분이다.
학교가 파하면 한눈팔지 않고 달려와 글씨 공부에 매진하는 청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이 그를 친히 당신의 자택으로 불러들여 같이 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입실제자이자 수제자가 된 셈이다. 물론 동정 문하에 그보다 앞선 선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처럼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그 역시 스승을 섬김에 있어 신중하기가 범인을 능가했다. 제자라기보다는 효성스런 아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스승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하긴 그에게 청람이란 아호를 준 것 하나만 봐도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는 스승의 부재시 서실의 고참 수강생들에게 체본을 대신 써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교육대학교와 인하대학교 등 스승을 대신해 서예실기 강사를 맡아야 하는 때도 있었다.
68년 처녀 출품에 당당히 ‘전국신인예술상’에 장려상을 차지한 청람은 69년 국전 18회부터 마지막 국전인 81년까지 특선 3회와 입선 7회라는 괄목할 성적을 거두었지만 연령제한 규정에 묶여 초대작가로 등단하지 못하고 84년에야 초대되어 최연소 초대작가의 기록을 남겼다.
그 시절 그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을 종교의 교리처럼 생각했다. 글씨를 쓰는 것은 바로 자신을 쓰는 것이며, 작품을 외부에 내보이는 행위는 곧 자신을 내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함부로 쓸 수도 없으려니와 함부로 내보여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수분守分’이던 그의 좌우명이 ‘지성통신至誠通神’으로 바뀐 것도 그때였다.
그래서 그는 결코 다작을 하지 않았다. 1년에 다섯 점 안팎을 쓰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전시회에 스무 점이 걸렸다면 그중에 자신의 분신처럼 애착이 가는 작품 또한 다섯 점을 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심사위원․운영위원, 세계서예 전북․서울․부산 비엔날레, 88서울국제현대서예전(예술의 전당), 대한민국국새제작자문위원, 한국국제서법연맹공동대표, 서울․인천․하와이 3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강인봉:청람 선생님은 현대 사회에서 서예의 새로운 가치 창출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전도진:대중들과의 거리감을 없애야지요. 그래서 먼 여행을 하거나, 재래시장을 찾아 삶의 밑바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본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혼자 하는 정적인 자기 수련도 중요합니다. 나는 한 작품을 깊이 구상하다가 새벽 한 시나 두 시가 되어서야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들 입만 열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요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그러나 옛 것은 옛 것이요 새 것은 새 것입니다. 옛 것이 새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옛 것을 무조건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옛 것을 마치 절대법인 양 강요하거나 고집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강인봉:그럼 선생님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도진: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이지만, 고전을 바탕으로 많이 익히고 다시 이를 빨리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전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저앉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옛 것을 멀리하고 성급하게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병입니다. 옛 것은 새 것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고, 이 초석과 뿌리가 없으면 일찍 고사枯死합니다. 이를 적절하게 융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인봉:선생님은 그렇게 서와 각에서 자신만의 특징적인 형상성을 갖추어 나갔습니다. 각에서 터득한 장법章法과 공간개념을 서예작품으로 환치시켜 여백을 극대화하거나 회화성을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예와 전각 중에서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맞습니까?
전도진:서예가 우선이지요.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전각을 하는 것입니다. 전각을 하면 글씨가 분명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글씨를 하면 전각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서예와 전각은 서로 떠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강인봉:선생님의 작품은 우선 친근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하며, 재미있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친근감이 있고 생각하게 하며 또한 재미있게 전개한다’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전통을 존중하고 있으며, 미적인 서사書寫가 나름대로 완성되어 있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까?
전도진:내가 수득修得한 전통의 서예는 거의 자연스럽게 현대적인 조형으로 그 형태를 바꾸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서 어느 것이 전통이고, 어느 것이 현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은 것이 아닙니다. 작품 가운데에는 전통 속에서도 현대가 분명하고, 현대 속에서도 전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두고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현실적인 실체라 할 것입니다. 전통의 위대함과 현대의 맛깔스러운 이미지 전달의 예술적인 분위기를 살려야 합니다.
강인봉:전 오래 전부터 청람 선생님은 예술품을 생각하고 제작하는 자세가 남다르다는 것을 읽어왔지만, 선생님의 어떤 작품은 작은 것에서 보다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사고의 전이요청轉移要請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정감이 우러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참 맛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진실로 감동적입니다. 그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필치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청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생각됩니다만 그 조형 철학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지요.
전도진:서예술을 표방하는 모든 글씨는 누가 쓴다 하더라도 전달하는 메시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결코 막연하게 베끼는 필경사식筆耕士式의 것이어서는 예술품으로서의 높은 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은 일반적으로 많이 행해지는 작업보다는 한지라든지 자연재료, 돌, 나무, 흙 등을 전각기법이나 부조기법 등으로 응용해서 이를 새겨 찍어내거나, 혹은 두드려서 효과를 나타내는 작업을 주로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부조미술일 수도 있지요. 작가가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작품의 소재는 무한하다는 생각입니다. 고대 암각화의 이미지나 심지어 토담집에 발라진 한지에 조상들의 찢겨진 흔적이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껌 종이나 신문지에라도 제 나름대로의 창작을 시도해 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존의 관행들이 이런 실험적 자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무언가 다양한 실험적 태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발표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합니다.
강인봉:그래서 99년에 제작한 작품 「화광동진和光同塵」은 서체와 농담 및 굵기를 달리하여 풍자적인 내용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광’자 대신 화투의 똥광을 그려 넣고 “똥입니다”라는 낙관글씨를 써넣고 있군요. 고상한 아악 대신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민요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감상하는 대중을 향해 서예는 더 이상 특정계층의 향수물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전도진:그래요?
그는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서예평론가는 그 「화광동진和光同塵」에 대해서, ‘작가의 속 깊은 뜻을 우회해서 나타내고 있는 사회상의 현실고발에 대한 풍자요령諷刺要領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온통 똥으로 덮여 있는 것과 같이 보이니 말이다.’라고 ≪월간서예≫에 품평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람의 전통 서예에서도 변화는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불교사상에서 뜨겁게 강조하고 있는 ‘空’의 미술적인 문자해석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空’자는 사람의 웃는 모습을 연상하도록 휘호되었고, 배경은 하늘의 이미지를 살리는 청색의 색깔로 나타냈다. 그리고는 반야심경의 짧은 한 대목을 목간서체木簡書體로 서사했는데, 보면 볼수록 절로 새로운 맛이 난다.
이것이 바로 청람의 예술혼이다. 비록 흔한 대중가요 가사도 그가 쓰면 아름다운 예술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의 연구실에 나와 공부하는 어느 할머니 서예 지망생의 넋두리조차 그에게는 고귀한 언어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렇다면 그는 과연 그 죽음의 빛깔을 알고 있을까?
그는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시멘트, 스티로폼, 대나무, 석고, 기와, 돌, 점토, 도자陶瓷 등과 채색 역시 먹, 안료, 황토 등의 자연 염료를 다채롭게 수용하는데, 아무리 힘이 들어도 명산지의 것을 구입한다. 대나무가 필요할 때는 그냥 대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대나무의 대표적인 산지인 담양에 직접 내려가는 것이다.
강인봉: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서예나 전각을 할 때 ‘오른쪽에서 왼쪽左行’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右行’으로 쓰거나 새기는데,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도진:교과서부터 일간신문까지 모두 가로쓰기로 바뀐 지금의 한글세대는 어쩔 수 없이 좌행보다는 우행을 편하게 느끼므로, 시각언어인 서예나 전각 또한 그 방향으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우리 세대가 좌행에서 우행으로 이행하는 것은 역리학적으로 적중될 뿐 아니라 문자학적으로도 증명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금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서예와 전각은 물론 책의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까지 우행으로 바뀔 것이라는 확신은 나를 무척 고무시킵니다. 나는 하루 속히 그러한 이론들이 정립되기를 바랍니다. 이따금 전시장에서 ‘체제의 역행’이니, ‘전통 서법에의 도전’이니, 하는 말로 내몰리기도 하지만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강인봉:그럼 이제부터는 석봉 고봉주 선생에 대해서 몇 말씀 묻겠습니다. 석봉 선생한테는 어떻게 공부를 하셨습니까?
나는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언뜻 그의 맑은 눈에는 다시 가을 먼 들 물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어 보였다. 그에게 있어 그리움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이다. 그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도진:석봉 선생님을 만난 68년부터 충남 온양까지 오가며 공부를 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온양에 거주하고 계셨으니까요.
이윽고 청람이 예의 그 여운 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청람은 한국과 일본 전각계의 거봉 고석봉의 수제자이다. 석봉 도인은 한국 현대전각의 초석을 놓은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는 한국 전각계보다는 일본 전각계에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이며, 일본에서는 ‘인성印聖’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그는 중국 오창석吳昌碩(1844~1927)의 제자인 일본 전각계의 명인 카와이센로河井筌盧(1871~1945)의 수제자로, 오창석으로부터 받은 칼을 다시 석봉에게 물려줄 만큼 신뢰를 받았다. 한 세기에 걸쳐 예술로 맺어진 동양 3국의 아름다운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석봉은 카와이센로로부터 받은 그 오창석의 전각도篆刻刀를 그대로 청람에게 전하여 오늘날 청람이 가보家寶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창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먼저 전각의 역사를 따져본다면 그림과 문자가 있기 전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이 그 근원을 만들고 창힐倉頡이 이를 본떴으니 서화書畵보다 앞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골각, 각획, 상형 주자를 지나 새 인장의 역사를 대집성한 것은 청대인淸代人들이었으며, 그 중심은 서령인사西泠印社이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창석이다.
청대인사는 절파를 중심으로 하여 1904년 정인丁仁․왕제王禔․섭명葉銘 ․오은吳隱 등이 인사를 창립하였고, 창립 10주년이 되는 1913년에는 인사의 전반적인 규모가 완성되어 ‘서령인사’라고 이름을 짓고 오창석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1913년, 처음으로 사장社長을 맡은 오창석은 이미 그 명성이 중국은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미쳐 뛰어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서령인사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국제적인 금석서화 중진들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오창석 등의 ‘오파吳派’들과 함께 교류를 시작하면서 한국과 일본에 전각이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인들 중에 일찍부터 오창석과 전각으로 교유한 사람은 한국의 민영익과 일본의 카이로센로였다. 민영익은 오창석과 예인으로서 두터운 교유를 하고 있으면서도 작품을 소장하고,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는 데 그쳤다. 반면에 카이로센로는 오창석에게 그 기법을 전수 받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석봉 고봉주이다.
전도진:이것이 바로 오창석의 그 인도印刀입니다. 나도 그때 석봉 선생님으로부터 이 칼을 받아 참 무수히 많은 돌에 새김질刻을 했지요.
그러면서 청람은 깊이 소장해 둔 그 보도寶刀를 꺼내 보여주었다. 나는 신기하게 그 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역시 오래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낡은 칼이었다.
전도진:‘오창석도 이 칼로 공부한 기여.」 하면서 주시더군요. 석봉 선생님은 1924년 19세 되던 해 봄에 일본으로 건너가 히다이텐라이比田井天來(1875~1945)의 문하에 들어가서 서예를 먼저 공부했지요. 히다이텐라이는 일본 근대서도近代書道의 개척자이며, 일인자격이지요. 히다이텐라이는 한국의 선전에서도 심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936년 31세 때 히다이텐라이의 소개로 일본 전각의 최고봉인 카이로센로를 만나 전각을 공부하고 작품 활동을 하시다가 1944년 귀국하여 1993년 별세하시기 전까지 한국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풍도風度의 대가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청람은 여간 복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물론 동정 선생의 관대한 배려에 의한 것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으리라. 따라서 청람은 당시로선 얻어 보기 힘든 일본과 중국의 전각 자료들을 남 먼저 얻어 볼 수 있는 안복眼福도 누린 셈이다. 청람은 그처럼 한국 전각계의 기린아麒麟兒였다.
그때부터 그는 한국 전각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74년 우리나라 최초 조직된 전각단체의 첫 전시였던 ‘한국전각협회전’에 27세의 최연소 나이로 노대가老大家들과 함께 참여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일찍부터 전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각계 명가들의 인장을 새겨줄 정도로 전각가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강인봉:청람 선생님은 한국의 주요 인사들의 인장을 많이 새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분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전도진:정계 인사나 경제계, 서예계, 문인 등 아주 많습니다. 각계에 한 사람씩만 거론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경제계는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 서예계는 한문으로 일중 김충현, 한글로는 평보 서희환, 그림은 월전 장우성, 한학자 연민 이가원 박사 등의 인장이 대표적입니다.
강인봉:듣자니, 석봉 선생은 오창석의 전각은 ‘규모가 크며 품격도 높아 천변만화하다’고 평가하고, 제백석은 ‘맛과 혼이 깃들어 있으나 품격은 조지겸이나 오창석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등완백은 오창석에 한참 못 미친다’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공감하십니까?
전도진:작품에는 여러 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람마다 심미관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다만, 격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술에서는 ‘아雅’와 ‘속俗’이 자연스럽게 교체하고 정리되지 않습니까. 창신은 바로 ‘속’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속이 모두 저속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아’의 정수를 찾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워야 하며, 글씨에서 골육혈기를 중시하듯이 전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자꾸 예술에서는 속기를 살피되 멀리하는 것입니다.
강인봉:그럼 석봉 선생께서는 전각을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전도진:석봉 선생님은 늘 충청도 말로 ‘속되면 안 디여’, ‘사람이구 글씨구 말이여’ 이 두 마디 말씀입니다. 많은 자료를 보여주시고 각법을 가르치시면서 과제를 해 가지고 오면 그 두 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아직도 속디여. 안 디여’ 이겁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이 만족하실 만큼 해 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큰 공부였습니다. 글씨나 전각, 그림 모두 스승에게 인정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강인봉:전각예술을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전각은 어떤 예술이라고 하겠습니까?
전도진:인印은 문자의 발생과 더불어 사용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제도적 권력의 신표로 제작되었으나 점차 개인의 재산과 소유의 권리를 보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한편 서예의 발전에 따라 예술 감상의 대상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서화에 있어서 인장은 작품의 격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화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전각의 역사야 별도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동아시아의 오랜 문자 새김으로 수천 년에 이르지 않습니까? 전각은 다양한 자연의 기상을 방촌 공간方寸空間에 새겨 문인묵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스스로 새겨서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문우文友들에게 선물하기도 하면서 낙성관지의 최종 검기鈐記(인장의 기록) 역할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끝없는 심미의 기쁨과 예술의 향수를 느낍니다. 시․서․화를 삼절이라고 해 왔다면 청대 이후에는 시․서․화에 ‘인印’까지 더하여, 시․서․화․인을 서화예술의 사절로 불리고 있습니다.”
강인봉:청람 선생님이 지금까지 새긴 돌로 따진다면 몇 과顆 정도 됩니까?
전도진:대략 13,000여 과 이상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셀 수가 없지만 유인, 수인까지 합친다면 이것만도 6,000여 과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내 자인自印만도 250 벌(500 과) 정도입니다. 그것도 글씨와 어울리는 작품에 사용하려고 하면 부족합니다.
강인봉:작품에 자각인自刻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전도진:무슨 말씀입니까? 낙관을 대신 써주는 것과 같습니다. 용납됩니까? 남이 새겨준 인장을 사용했다면, 원래는 반드시 작품 또는 작품집에는 ‘아무개’ 인이라는 것을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부끄럽다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문장이나 시를 빌려 쓸 때 반드시 ‘아무개’ 시 또는 글이라고 기록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서예인들은 자신이 직접 배워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품과 어울리도록 시․서․인, 또는 시․화․인의 삼절을 갖춘 작품을 만들 때가 됐습니다.
강인봉:한 과를 새기는 데는 얼마 정도 걸립니까?
전도진:그거야 새기기 나름이지만, 10분 20분 정도 걸리는 것도 있고, 1시간 걸리는 것도 있고 그런 것 아닙니까? 돌은 항상 치석治石이 되어 있습니다.
강인봉:청람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치석을 중요시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전도진:돌도 생명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문인들이라면, 사물 하나하나를 모두 생명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치석은 돌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루면 훨씬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돌을 가지고 치석을 내가 한 것과 안한 것 두 가지를 놓고 필방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7천 원짜리를 3, 4만 원에 팔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치석은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줍니다. 나는 치석을 전각인의 기본으로 가르칩니다.
강인봉:전각을 배우려면 언뜻 초보자들의 인식에 ‘돌’과 ‘칼’ 등 차갑고 딱딱한 이미지가 연상되어 선뜻 시작하기를 꺼려할 것 같은데요.
전도진:그렇지 않습니다. 전각을 새기는 인장석印章石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치석을 한 다음에 돌을 만지면 매우 부드럽고 사랑스럽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좁은 공간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전각입니다. 차근차근 하다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 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제는 직접 전각을 배워서 자각自刻으로 작품의 격을 높여야 합니다. 오창석도 자각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많은 서예인들이 전각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강인봉:청람 선생님은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도 경희대․한성대․인천대․예술의 전당․성신여대 등 여러 대학에 오랫동안 출강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창작정신은 무엇을 중요시합니까?
전도진:새로운 것, 공감이 가는 것, 공력이 많은 것. 이 세 가지입니다.
강인봉:그럼 이제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의 모든 수강생들에게 거는 기대랄까, 한 말씀해 주시지요. 서예나 전각은 다른 분야보다 ‘서예대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선생님은 일찍이 심혈을 기울여 이남아, 박래창을 위시해서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10여 명과 시전 초대작가 20여 명을 배출해 냈지 않았습니까?
그는 좋은 자질을 갖춘 재목감을 만나면 무조건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전도진:이십대에는 열심히 임서臨書를 하고, 아무리 늦어도 삼십대부터는 무조건 창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가도 되고 서예도 살아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우리 서단에서는 너무 오랜 세월을 임서에 매달리다 보니 창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십대에 이공계 박사가 나오는데 오십대까지 임서를 하면 짧은 인생에 언제 자신의 작품을 할 것인가?
이것으로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의 은은한 묵향 속에서 긴 대화는 모두 끝났지만, ‘무기교의 기교’를 자신의 작품 속에 정교히 담아 한국적 웅건한 전각상篆刻像을 제시하는 청람의 작가정신과,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에 오른 부인 윤영숙 여사가 오로지 부군을 위해 그동안 새겨서 여러 상자에 넣어둔 인장마다 일일이 인모印帽를 만들어 씌운 내조의 따뜻함을 오래도록 가슴 뭉클 느낄 수 있었다.
청람은 끝으로 오창석의 이 어록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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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배운다고 해도 온전한 나의 상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나를 깨뜨리고자 하는 사람은 진보할 것이며, 나를 닮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평북 철산 출생(1948년 8월 21일).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과 수료.
동정 박세림 선생(1966년), 석봉 고봉주 선생(1968년) 사사.
전국신인예술상 장려상(1968년).
국전 특선 3회, 입선 7회.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심사위원․운영위원.
세계서예 전북․서울․부산 비엔날레.
88서울국제현대서예전(예술의 전당).
대한민국 국새제작자문위원.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 역임.
경희대, 한성대, 인천대, 예술의 전당, 성신여대 강사 역임.
한국국제서법연맹 공동대표.
인천광역시 문화상 수상(2001년).
서울․인천․하와이 3회 개인전.
청람서예전각연구실 주재(인천시 남동구 문화서로 4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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