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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강인봉/문학 정신, 글 쓰는 행위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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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874회 작성일 14-03-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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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정신, 글 쓰는 행위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

강인봉(시인․소설가)

 

 

사실 현대문학이란 그 형식의 현대성보다는 바로 ‘진리에의 새로운 발견’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사물은 제각기 다 자기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심지어는 저 허공虛空까지도 말이다. 바로 그 소리가 자기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꽃이 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소리를 찾기 위해 문학을 한다. 그 사물의 끝없이 먼 항구를 찾아 강에 가고, 산에 간다. 그러나 시인들이 절망하는 것은 곧 그 삶에서 시를 찾기 때문이다. 진정 아름다운 예술은 바로 죽음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문학수업文學修業은 곧 인간수업人間修業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수양의 한 방법인 것이다. 육체를 초월한 정신의 어느 한 지점에서 그 무엇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행위.

실은 삼라만상의 운행 이 자체가 바로 시요, 우리는 다만 제각기 다른 그 자기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느낄 따름이다. 한 송이의 꽃, 강물, 구름, 바람 등등을 통해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행위. 그러므로 사물을 가장 정확히 보는 자가 시인이요…… 수양을 함으로써 참사람이 되고, 시는 거기서 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시인이 백지 위에 무심히 글을 한 줄 썼을 때, 그것은 이미 무심한 행동이 아니다. 그 사람의 내부에 이미 담겨져 있는 그 한 편의 시(느낌)가 다시 백지 위에 조용히 옮겨졌을 뿐이다.

이것은 오랜 자연에의 관찰 다음의 일이요, 인생에의 뜨거운 아픔 다음의 일일 것이다. 시인은 시인 이전에 성스러운 방랑자가 되어야만 하니까. 모든 예술 작품은 그 방랑의 소산물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살아 있는 시의 행위는 이미 끝난 뒤의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서 그 많은 형식을 이야기한다. 기교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 자연에 무슨 형식이 있겠는가?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시는 자연에서 자신을 발견한 만큼의 기록이요, 그 인생의 한 표정일 따름이다. 그것이 결코 자연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은 시. 여기에 무슨 기교가 따르겠는가. 오히려 그 기교를 버릴 때 그 시는 다시 살아나는 법이다.

나무도 그렇다. 산림[自然] 속에 있을 때가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지, 내 집에 옮겨다 심어놓으면 그 나무의 빛은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의 모든 형식을 이야기한다. 그 산림 속에 있는 나무를 옮겨 심는 과정에 있어서의.

이것은 단지 언어를 빌려서 쓰는 작업만이 그 행위의 전부는 아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구제하는 일도 곧 그 한 행위요, 사랑의 빛깔이 곧 시이다. 이것을 얼마나 체득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비의 문이 열린다.

그래서 시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몇 줄 끼적인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시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시인이 될 리가 없다. 그 행위는 도리어 자연의 빛만 죽이는 결과이다. 그 자연을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발견할 때, 시는 거기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의 마음은 육안으로 직접 들여다볼 수가 없을지라도 그 몸가짐이나 행동을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는 것이다. 그 모든 행위 자체가 바로 그 사람 마음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은 곧 그 마음이고, 글 또한 그 인간이며, 형식이 곧 내용이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는 시[自然]이며, 이 시를 아는 자만이 참으로 시를 쓴다.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시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문학의 향기이며, 목적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한 알의 사과를 먹을 때 우선은 맛(재미)을 찾는다. 그러나 그 맛[感動] 속에는 이미 자양분[敎訓]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어 우리들 인생을 살찌게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사명은 그 절망의 늪 속에 빠져 있는 시대를 구출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소리가 다 바로 그 찾고자 하는 자의 내면에서 들리는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 그 내면의 귀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그 내면을 비우는 일이다. 선문禪門에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고[水不離波],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한다는[波不離水] 말이 있다. 그 내면을 비울 때 비로소 거기서 모든 만남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심히 꽃 한 송이를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무심한 행위가 아니다. 어떤 의미로든, 자기가 그 꽃을 보는 순간 그 꽃과 일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나와 그 꽃은 동시에 어떤 의미의 생명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남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되고, 남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행위는 언제나 새로운 그 인생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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