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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김유석, 설태수, 박병두, 장경기, 박해미, 손현숙, 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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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유석
다낭에서 온 여자 외 1편
그의 아버지는
월남에서 돌아오지 않은 새까만 김상사
그는
베트남 처녀를 아내로 맞은 새까만 농사꾼
말로 주고 되로 받았든, 그 반대이든
어언 십여 년
배 젊은 색시 맞아
자식 셋을 얻었으니
우리 동네 재수는 재수 맞았다.
김치맛도 제법 낼 줄 알고
은근슬쩍 서방님 바가지도 긁을 줄 아니
토종土種 다 된 그녀,
따이한의 삶에
파월용사만큼 씩씩해진 월남댁
벼들이 익고
땡감 눈시울 저리 붉으면
집 나간 강아지처럼 돌아오는 가을
밥 냄새 풍기며 누는 저녁구름 등지고
동구 밖에 멍하니 섰다.
나무꾼에게 옷을 잃은 선녀처럼
세 아이를 안고
강남으로 돌아가는 제비들 품에
바라볼수록 먼
청무우빛 하늘 한 쪽 묻어 보낸다.
탁발托鉢
마당귀 마주 선 은행고목 한 쌍이 일주문인
이 절간에는 승僧이 없다.
오뉴월 보리목에 여문 이슬방울 두드리며
새벽 들판을 법당으로 쓰고 있는 저 땡초는
밤새 들끓던 개구리 축생畜生이다.
동냥 나온 어느 산중山中 바람이
마을 어귀 주막으로 쓰던 빈집에 들어앉아
향초 대신 밥 익는 냄새
무랍 내듯 문간에 흘린 지 수 삼 년
시름시름 놓고 가는 새소리나
피고 지는 풋것들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따금 배시시 웃는 일이 법法이라고
저무는 들길 같은 발씨 마을마다 익히더니
한 됫박 공양미에
동백아가씨 염불을 흥얼거리는
영 민대머리 건달 같은 땡초가
달리는 일손에 맨발로 불려나와
모자 쓴 이들 틈 뙤약볕 새참을 먹고 있다.
김유석∙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설태수
수평선 외 1편
이 아래서 놀아.
칼날보다 더한
수평선.
그 아래서 놀 수밖에.
가도 가도 수평선
머리 위에 있지.
절대 끊어지거나 없앨 수 없는
철저한 울타리.
눈물도 넘어설 수 없는
시퍼런 울타리.
지상에서의 추락을
막아주기도 하는,
태풍도 꼼짝 못하는 수평선.
그 너머가 어떤지는
노을빛이 말해준다.
핑크빛에서 검붉게 변해가는,
구름, 자유보다 더한
나무 검정비닐 목소리는 구름
뭉게구름 먹구름 새털구름이다.
아이는 구름이다.
바위 강철은
불멸에 붙들려있지 않은 구름이다.
일하고 얘기하고 음악 듣고 술 마시는 것은
구름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
시작과 끝에 골몰해 있는 마음은
구름에서 좀 멀다.
그 마음 시들해지거나
초지일관하기 어려운 것은
머리 위에 구름이 있기 때문.
틀에 갇히지 않는 구름을
넋 놓고 보게 된다.
자유에 걸려들지 않는 구름.
찬미도 아랑곳 않는 구름이다.
설태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말씀은 목마르다 외.
박병두
해남연가 외 1편
못 잊을 사람 하나 만나
내 고향 가는 길
계곡면 풀티재 잔등길
백설 눈을 맞으며
엉검엉검 올라가던 때
뜻밖의 이름 모를 사람들
다투어 안부를 묻는다.
별빛이 비치면 옹기종기 만나
대화 나누는 이 많지만
대낮엔 폐허가 된 거리들로 조용하다.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인정들이
그녀와 다시 만날 때
기억 속의 연가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황토흙 묻은 버스타이어 배 불리고 나면
오래 담은 묵은 김칫국물
향수보다 짙은 우리만의 노래
누구의 합창이었던가?
어색한 눈빛을 마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비탈진 길
깊게 파인 발자국들로 가득한
황톳길로 버스타이어 지나가면
우리의 깊은 숙면을 깨우고
넘어질세라 살 부대끼며
애정을 나누던 시간이었다.
축복이라 할 수 없는 일들이
해월리 마을을 멀리 하다가도
밤 별빛을 타고 내 고향집 마당에
흐릿한 촛불들이
고단한 아버지 콧잔등을 검게 태우고
어머니, 반가운 자식 맞으러
깊은 잠을 깨웠다.
지동 사람들
내가 머물렀던 곳들은 하나같이
빗물에 젖은 가옥들 같은 표정이다
여기 머무르던 빛과 뜨거움은
몇 사람의 가슴에 두레박 없는 우물만 남기고
부활을 기다리는 가옥들에게
돌아오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다
폐품수집 두 발 리어카에
지동시장 변두리에서 잔혹한 바람 마시며
콩나물 손님 없는 오늘도
할머님이 우산을 베게 삼아 앉아계신다
저녁이거나 아침이거나 불들이 켜지고
네모난 창들 호박잎 같을 때
방음벽 타고 날아온 가난한 웃음들
눈, 비, 바람, 화성 성곽 햇빛에
흐리게 꽂혀 있는 지동 사람들
손사래로 그들을 배웅하고
불빛 젖은 창들 먼 이별 같을 때
박병두∙전남 해남 출생. 1992년 ≪월간문학≫, ≪문학세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시집 우리 이제 사랑이란 말을,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 해남 가는 길. 장편소설 유리 상자 속의 외출, 그림자밟기. 수원문학상, 경기문학상, 아주문학상, 고산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전태일문학상 등 수상.
장경기
꽃샘다방 장양 외 1편
흔들리는 그림자는
한물 간 몸의 불안인가
젖은 눈발마냥 어디로든 녹아지는
누나의 서러운 몸살
얼마나 많은 선창가 뒷골목 후미진 세월을
몸으로 몸으로 눈발마냥 서성였던가
자고나면 낯선 이 세상
꽃샘다방 유리창에 피칠 하는 노을을 보면
너무 황홀해.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은
이 세상, 너무 낯설어
몸으로 몸으로 더듬어 가면
흙속에 묻고 돌아섰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먼 열여덟 살적 푸른 기억으로 흐느끼듯 적셔 와
빈 가슴에 쓸어 붓는 쓴 소주잔의 불면이여
수면제만 한 움큼씩 털어 넣는 형벌의 긴 밤이여
‘이 약이 영혼까지 잠재워 주나요? 내 영혼을 소독시켜 주나요?
정말 죽으려고 한 움큼씩 더 먹어보지만
이상하죠 다음날이면 거뜬히 깨어나
오히려 내 몸이 정화되었다는 야릇한 생각이 들어요’
모닝커피 움켜쥐고
장미여관으로 모나코모텔로 프로방스로
폴폴 날아다니면
허벅지에, 허리에 끈적이는 친숙한 젖은 불빛들
늙은 어부의 담배연기마냥 자욱이
시들은 가슴에 번지는
아늑한 세상의 독이여
물안개 속 흐르는 누나는 참 많기도 많기도 하네
스트립걸
핏빛 노을 네온사인 흐르고
어스름 달빛, 가로등 그림자를 희롱거리면
누나는 어제처럼 일터로 가네
늘어진 젖가슴 연신 추켜올리며
울지도 웃지도 않는 표정으로
미끄러져도 표정 없이 일어나 흔들리네
사이키 조명 속 헤엄쳐 오는 끈적한 시선의 정충들
연신 누나의 젖꼭지 타고 흘러내리네
엎드려 둔부를 추켜올리면 출렁이는 젖무덤
누나의 검은 숲은 흔들림 없이 흔들리네
두 젖봉오리로 술잔을 받쳐 들면
찰싹― 엉덩이를 때리는 낯선 손에
빙그르 돌아서며 빛나는 누나의 일그러진 미소
유방 끝이 절망 끝에 닿도록 절을 하네
자욱한 안개의 보리숲 흰나비마냥
너울너울 꽃서울 찾아 찾아 떠나갔던
어린 무용수의 꿈
미끄러져도 표정 없이 일어나 흔들리네
검은 숲은 저항 없이 흔들리네
아! 얼마나 많은
몸살이 쓸려갔던가 가늘어진 허벅다리
비츨비츨 고향 찾아 서울역 광장을 헤매고 있네
장경기∙멀티포엠아티스트. 1992년 ≪현대시≫로 등단. 1996. 8. 1일 <멀티포엠아트 제1 선언문>을 발표한 이후로 시인, 멀티포엠아티스트로 활동. 현재 제10 선언문까지 발표해오면서 멀티포엠아트 연작 작품집 아리랑 만생전 시리즈로 몽상의 피, 마고, 눈꽃경전 등 29권 2000여 편을 발표. 시집 몽상의 피, 안개의 집, 화언, 마고, 신의 변론, 신의 사랑, 신용불량자, 휴먼블랙박스, 눈꽃경전, 마음통일장 등 다수.
박해미
호야꽃 외 1편
한영대학 바리스타 실습실 창가에 놓인
덩굴식물 호야가지를 꺾는 그녀에게
작년에 피어 내 스마트폰 안에 넣어 두었던
별꽃 닮은 호야꽃을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호야꽃,
그 호야꽃 처음 본다는 그녀에게
호야꽃이 피면 그 화분 주겠노라
그만 말해 버렸다.
내가 한 말 깃털처럼 바람 타고 날아가
호야가 들었나보다
창가에 놓인 귓볼 닮은 잎사귀 사이에서
씨앗 같은 꽃대궁이 숭얼숭얼 돋아나는 것이었다.
말이 씨가 되었나보다
작년에 한 가지에서만 피었던 꽃봉오리가
내가 한 말 어서 책임지라는 듯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막 솟아나는 것이었다.
말이 씨가 되어 꽃이 된다
네가 들려주는 따뜻한 말들도
날마다 실습 중인 일상에서
야호,야호 세상으로 퍼져 온갖 꽃으로 피어나면 좋겠다.
잠깐 조는 사이
멈추지 않은 폭우가
내 것 아니라는 듯
푸른 신호등도
내 것 아니라는 듯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느긋이 졸음이 올 때
가늘게 코를 골았는지
침을 흘렸는지
너에게 들켰을지라도
그마저 상관없다는 듯
함께 한 여행길
꽃그늘이 부럽지 않다는 듯
박해미∙1993년 ≪예술세계≫로 등단. 시집 꽃등을 밝히다.
손현숙
좀작살은 작살도 아니면서 외 1편
어디서 술 한 잔 걸친다는 그가
자정이 넘어서도 발자국 소리 없다
걸친다는 말, 횡단보도 앞
빨간불과 초록불 사이
엉거주춤 엉덩이 빼고 섰던 것처럼
나비슬립 어깨에 걸치다 말고
이건 입은 걸까, 벗은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내일은 오늘의 바깥
명치끝에 딱, 걸려 불편한 지금
남의 것도 아니지만 내 것도 아닌
어제와 오늘 사이 양 다리 척 걸치고
여기까지 온 길 잘했다 싶다가도
저 바람, 이파리 다 떨구고도
왜 우둠지 방점까지 흔들어서
불안하게 저를 각인시키는 걸까
작살과 작살 아닌 것 사이에서
이름만 슬몃 기대놓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더 헌집 줄래?
좀작살은 작살도 아니면서
하늘은 어둠인 척 깜깜 밤을 깔아놓고
손목 한번 잡혔는데, 뭘?
목 삐끗 했는데 어깨까지 아프다
어깨 아프니 허리 결리고
엉치 다리 발목도 저릿하다
간장이 떨어지고 나니 참기름 달랑거리고
깨소금까지 바닥 치는 건 또 뭘까
핏속에 소금 0,01밀리그램이 부족해
병원에서 팔다리 꽁꽁 묶여도 봤는데
태산에 걸려 넘어진 적 없지만
달빛에는 종종 길 잃어버리기도 하잖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저 너머, 너머 풍경에 발목 붙들렸다
헛발 짚고 엄마야― 넘어지면서
손목 한 번 잡혔는데 뭘?
양손 쿡 찔러 짤랑거리는
속주머니쯤으로 시집가고 싶다
손현숙∙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평사리문학상 수상.
이정
콩알눈 새 외 1편
처음 새장에 갇히던 날
새는 죽을 힘 다해 날아갈 구멍을 찾았다
창살에 부딪고 부리가 멍들도록 이곳저곳 쪼아댔다
새장 속이 평정을 찾을 즈음
변덕스런 주인이 새장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푸르게 퍼덕이며 힘차게 하늘에 꽂히듯
날아오를 새, 그 새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을 날아갈 듯 갸웃거렸는가
때까치 한 마리,
새장 속으로 다시 날아든다
어미품에 안긴 양
콩알 눈이
새장 밖 세상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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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꿀 데이트
뭇꾸울 무꿀~
태어난 지 스무달 된 손주가 건낸 말
응? 무꿀? 무꿀이 뭐지?
으~응 무꾸울 무꿀~
그게 뭔지 몰라 난감한 내게 등을 벽에 문지르며 사정합니다
나중에 보니 수조 속 물고기가 보고 싶다는 말이랍니다
오늘 다시 손주가 왔습니다
뻐쯔 타아 뻐쯔 뻐쯔
아! 버스 타자고?
순간 입고 있는 내 옷차림을 훑어봅니다
짐 가득 실린 화물선 한 척 같은 몸입니다
다음에 가자려는데 아가의 눈빛이 무척이나 간절합니다
언제 이 순진무구의 프로포즈를 다시 받아 볼 수 있을지
누가 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꼭 일이 있어야 버스를 타나요?
―지느러미 흐느적거리는 물고기와 눈맞춤 해 본 적 있나요?
물꿀들이 뽀글뽀글 방울을 띄워 올리며 노닙니다
아가와 눈맞춤한 물꿀이 지느러미를 분주히 놀립니다
노랑물~꿀, 가무스런 물~꿀, 엄마, 아빠 물~꿀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하루가 물꿀처럼 가뿐해졌습니다
이정∙2003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누가 내 식탁들을 흔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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