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창간호/신작특선/정남석/구석은 순진하지 않다 외 8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730회 작성일 14-03-05 16:10

본문

jns.jpg

신작특선/정남석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 외 8편

 

 

구석을 응시하자 구석은 슬며시 문을 닫는다.

문을 열고 닫는 일

경계를 알아가는 일조차 구석은 흥미로운 면이 없다.

 

막무가내로 열어야 할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할지

수백 개의 얼굴로 문밖에서 안달했을 때

구석은 뒷소문을 일러주지 않았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 갈피에서

손때 묻은 고민을 하다가 하얀 백지를 내밀었을 때

구석은 뚜렷한 경계를 짚어주지 않았다.

 

비밀의 행간도 거기서 거기라고

빛의 방향이 좌우로 살짝 어긋날 때

구석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구석은 은밀함을 부둥켜안는다.

 

구석은 순진하지 않다.

 

 

 

 

그녀가 그리운 날에 혓바늘이 돋는다

 

 

저 어떠세요.

저 정말 예쁘죠.

철제 의자를 흔들며 그녀는 아이처럼 보챘다. 하필이면 혓바늘이 돋은 날, 질긴 쫄면은 끊어지지가 않아 그냥 예쁘다고 헛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주 예쁘지 않은 건 아닌데,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닌데,

 

제가 맘에 안 드시나 봐요.

그녀는 잘라 말했다.

아, 아, 그, 그게 아니라,

노란 단무지를 집으려는 순간 황색 신호는 지나가 버렸다.

축, 발전.

하얀색 글씨가 선명한 거울에 제 얼굴을 슬쩍 비추고는 사라졌다.

 

입안의 사막으로 난 그녀의 발자국,

바람은 방향을 바꾸며 발자국을 지우고 또 지우고.

 

 

 

 

두꺼비집

 

 

아이는 두꺼비집을 자꾸 허문다.

노을이 서쪽으로 얼굴을 붉힌다.

허물어지는 모래에는 물기가 없다.

아이는 파도를 한 움큼 끌어다 다시 성을 쌓는다.

파도는 평생 부수는 연습을 해왔다.

제발 일 그만두라고 아버지는 윽박질렀다.

달이 뜨면 쿵쿵 발자국 소리가 두려웠지만

아이는 모래기둥이 조금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허물어질수록 아이의 성은 두툼해졌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등을 토닥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도 평생 말뿐이었던

마당 없는 집에서 아이의 문은 꽁꽁 닫혀있었다.

어머니가 돌아올 때에는 별도 달도 잠들어

단 한 번의 파도에 성은 쉽게 무너졌다.

아이의 성은 꿈에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길은 꽃밭으로 연결된다

 

 

1.

누구나 기다리는 건 파란불인데 계속해서 빨간불을 보고 있다.

이정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다음 신호를 기다리지 않는다.

파란불은 그냥 스쳐지나간다.

스치는 파마머리 여자 향수 샤넬 5호를 떠올리는 사이

파란불의 점멸은 아쉽다.

 

2.

극심한 정체 구간에서 꽃들이 끼어든다.

경로를 이탈할 수 없는 차들은 시간의 페달을 밟아댄다.

페달을 밟을수록 꽃들이 반발한다.

신작로 양옆으로 반기는 코스모스 날개를 꺾었을 때

지엠시트럭 한 대가 흙먼지를 뒤집어씌우고 지나갔다.

 

3.

회전구간의 꽃들도 관절이 아파오는지 느릿느릿 핀다.

익숙한 안부에는 향기가 없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책을 펴들었을 때

늙은 남자는 구석구석 꽃을 검색하고 있다.

나방은 한 철 여기저기 서성이다 가지만

내 또래 친구들은 익숙한 꽃을 좋아한다.

 

*지엠시트럭: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C)에서 만든 트럭으로 6.25 전쟁 당시에 미군이 군용으로 사용하다가 두고 간 트럭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했다.

 

 

 

 

톨스토이 증후군

 

 

아실지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바람둥이로 이미 사생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아내의 손을 거쳐 태어났습니다.

출산, 육아, 교정, 정서, 아내는 하루에 다섯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나와 집안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이 말을 남기고 집을 뛰쳐나간 건 잘못입니다.

 

톨스토이는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농민계몽에 힘쓰는 금욕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소설도 그만 쓰고 농부가 되어 직접 밭을 갈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재산을 모두 버리려는 데에는 불만을 나타냈지만 남편이 추구하는 이상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란 남자를 유혹하는 존재, 성적 사랑밖에 모르는 속물이라며 소피아에게 형제처럼 살 것을 강요해놓고 스스로 약속을 깨뜨리곤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내기를 거듭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극비리에 유언장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작품의 저작권을 모두 막내딸에게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기차역에서 세상을 떠난 후 소피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처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지만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소피아의 손을 거쳐 태어났습니다.

 

사실 나의 아내도 악처는 아닙니다.

 

 

 

 

낙화는 아프지 않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을 접으면 번지르르 쏟아지는 꽃잎들

꽃잎은 접히면서 짙은 색을 띠었다.

물기의 가장자리는 아프지 않아

꽃잎은 짙은 울음을 참았다.

서른 살 적의 빗줄기가 약속을 잡고

공원 놀이터에 30분 늦게 도착한 금요일

입술을 훔치고 빠른 속도로 달아났을 때

머리핀이 젖은 꽃잎은 발바닥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십 년 후에야 꽃잎의 젖은 발바닥을 만졌다.

가물가물 눈가를 적시는 자음과 모음

마지막 행의 설움 같은 바닥이 흥건해질 무렵

한 연 두 연 이랑을 만들 기세의 빗줄기

꽃잎이 출렁 떠내려가지 않을까 간질간질 움츠러들었다.

 

 

 

 

바퀴는 아프다

 

 

가로세로 묶음이 느슨해지면서

앞뒤 구별도 못한단 소릴 듣는다.

그녀의 눈치를 스캔하고

그녀의 잔소리를 다운받는

복사기에 나를 밀어 넣으면서

새벽 종소리보다 가냘프게 떨었다.

프린터 설정은 항상 그녀의 몫이다.

전송이 완료되었을 때를 기다려

가지런히 클립이 채워지는 경우

포도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다.

기밀 서류 갈피와 갈피에서

불법 싸인 자국이 발각되고

단서를 지울 엄두가 나지 않아

일부 수정을 하는 순간

이면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재생이거나 소멸조차도 내 몫이 아니다.

 

 

 

 

끝이 훤히 보이는 것은 골목이 아니다

 

 

술래인 나는 골목의 끝을 잘라내고 싶었다.

골목은 더디게 사라지는 것을 도왔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한 발 한 발 점자를 짚어가듯 모퉁이를 돌아설 때

누군가 반대편에서 경계가 느슨할 때를 노렸다.

 

이쪽이야 이쪽.

 

고장 난 냉장고의 문을 닫고 씩씩한 속도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서로 비슷비슷하게 기웃거리는 골목

가깝지만 아득히 먼 틈이 벌어진다.

 

끊어진 고무줄을 잇듯 골목은

차가운 연탄재를 굴려 술래를 달랬다.

 

술래를 달래느라 밤잠을 설쳤으므로

누가 술래였는지 기억 못할 것이 뻔하다.

 

낯익은 발소리를 들었을 때

이런 날에는 내가 아닌 척을 한다.

 

 

 

 

비문증飛蚊症*

 

 

모두 헛손질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치료는 안 되고, 평생 데리고 사셔야 합니다.

 

처음 의사가 비문증이라고 했을 때

어미 한 마리 새끼 두 마리

내 눈에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벌레들이다.

어미는 몸집이 작지만 새끼를 낳은 후로 소리가 크다.

큰아이 학력고사 성적이 형편없었다.

집에서 아이교육을 그 따위로 시켰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 따위 소리 하려거든 저리 꺼지라고 한다.

어미와 새끼 그들은 환상環狀 형태로 움직인다.

위를 보면 위에 있고, 아래를 보면 아래에서

내 시선의 방향을 먼저 감지한다.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모시는 게 아니라 데리고 살라 하니 그것만도 다행이다.

 

날아다니는 수가 지금 보다 몇 배 늘어나면

그 때는 반드시 병원에 오셔야 합니다.

 

*비문증:하늘이나 흰 면, 밝은 면을 볼 때, 시야에 작은 점 같은 것이 보여 마치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

 

 

 

 

시작메모

언어로부터의 자유

 

 

언어의 틀에 갇혀서 나는 꼼짝할 수 없다.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나의 詩作이다. 언어의 깊이와 효과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詩作의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시는 우주의 요소들, 형태들, 그리고 사물들의 형제애-끌어당김과 밀어냄-에 기반을 둔 생존 모델이다. 또한 ‘시를 쓴다는 것은 孤獨과 交感에 대한 사색이었다.’ 라고 옥타비오 파스는 밝힌 바 있다. 빅토르 위고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표현했다. ‘삼라만상이 쉴 새 없이 서로 서로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나로서, 또한 그이며 타자로서, 언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내 시의 관건이다.

 

정남석∙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검정고무신. 막비시동인.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