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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신작시/이난희/여름 일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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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희/여름 일기 외 1편
칡덩굴이 워석워석 천막을 짓는다. 풀꽃들이 엎드려 속닥거린다. 일렬횡대로 늘어선 고추들은 독기를 품고 파리를 쫓아낸다. 모여 있지만 그 무엇도 물리칠 수 없는 세계에 날아다니는 것들 가뿐히 얹혀 있다.
어떤 의식처럼 노을이 퍼진다. 산속에서 얼핏얼핏 뛰쳐나오는 개의 비명이 장작 패는 소리에 묻힌다. 방향 잃은 벌레의 숨결 가지에 찔려 꿈틀댄다. 쓰르르, 쓰르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쓰리다고 쓰르라미는 어둠을 긁어댄다.
육질이 부드럽다며 고기를 찢던 사람이 묵은 신문을 장작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불꽃이 사진 속 망루를 끌어안고 사라진다. 끓는 가마솥에서 허옇게 드러난 이빨들이 국물이 뜨겁다며 후후 떠 있는 별을 불어대고
그 집의 하루
자정이면 불이 켜지는 뜰
낮에는
바람만 숨죽여 다녀간다
그 집의 하루는 그때 시작된다
너지, 이리 와 봐.
너지, 이리 와 봐.
후렴구 같은 말이
날마다 뛰쳐나와
뒤뜰 울타리를 후려쳤다
움찔 놀란 잎들이 몸을 뒤집는다
꽃들은 지레 향기를 밀어냈다
미쳤구나
집집의 시계들이 그 집을 가리켰다
죄목도 없이 심증만으로 끌려가 들었다는 말
너지, 이리 와 봐
밤새 번들거리는 각목에 들려 공중을 돌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곳으로 퍼져나가고
우두커니 선 꽃들과 나무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리듯
자고나면 몇 개씩 뾰루지 같은 봉오리를 내밀었다
밤과 낮의 표정으로
햇살은 양지와 음지로 스며
뒤뜰의 일을 헤아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밤의 일을
나비가 이리저리 퍼뜨리고 있었다
이난희∙2010년 ≪시사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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