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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아라시/유정임/사진 한 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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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 외 1편
-나를 지워줘*
기품 있게 자란 몇 그루의 큰 소나무 뒤로
새벽안개가 번져오고 있다
잡목들이 지워지고
볼품없이 자란 작은 소나무들이 희미하다
그것들을 배경으로 큰 소나무들은
진한 먹물을 머금은 듯 더욱 선명하게 우뚝하다
-나를 채워줘*
촘촘히 짠 바구니에 안개를 퍼 담았다
늘 허기가 졌다
안개는 바구니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자꾸 새 나갔다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안으로 굽은 다리를 지우고 볼품없는
몸통을 지우고 얼굴만 남았다
아직도 바구니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착각 속에 살아온 몸 하나가
솔숲을 해맨다
사진 속에는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기다림이 있다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그녀의 우주 속애
얼굴만 남아 솔숲에 든 나를
태양이 떠오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찰나를
그녀의 찰나가 붙잡고 있다
* 나희덕의 시 「심장 속의 두 방」에서 인용.
솔방울
물속에 그들을 띄워 놓으면
훌륭한 가습기 역할을 한다기에
우묵한 접시에 물을 담고
그들을 수북이 쌓아 올렸다
얼마나 깊어지면 이런 모습일 수 있을까
구겨진 주름 한 점 없이
겹겹이 포개진 모든 근육들을 다 펴
하나 같이 꽃처럼 웃던
2년 남짓 바구니에 담겨
죽어서 웃는 법을 내게 이르던
송이 송이가 경經이었던 얼굴들이다
한 나절이 지나자 높이가 반으로 줄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들은 죽었던 게 아니었다
모든 촉각들을 세우고 꿈틀대고 있다
잃어가는 웃음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아프게 움츠러드는 근육들
이를 악물고 저항하고 있다
아, 저 단단한 멍울들
그토록 환하게 웃던 그들이 돌같이 단단한 멍울이 되어
하나 둘 물속에 나뒹굴고 있다
나는 그들을 고해苦海의 강에 띄웠더란 말인가
내 욕심의 강은 그들이 토해낸 혈로 붉어지고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들의 지난 웃음이
아픈 멍울로 알알이 가슴에 와 박힌다.
유정임∙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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