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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근작조명 해설/백인덕|시적 길 찾기-‘긴장’과 ‘영향’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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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시적 길 찾기-‘긴장’과 ‘영향’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
-김보숙 시 읽기
죄의식의 모든 개념에는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모든 삶이란 필연적으로 부당하고 비논리적이다-F. 니체
1. 이정표 하나-시인의 꿈
애초에 시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꿈’을 머리에, 가슴에 아니 온몸에 새겨 넣어야 하는가? “세계의 규모와 차원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꿈을 정말로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를 확대시키지 못하는 꿈을 시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바슐라르의 물음은 ‘시인의 꿈’의 본질적인 한 축을 드러낸다. 그것은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인생이 아니라 인류의 꿈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넓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향도 있다. O. 파스는 “시와 사랑과 혁명은 세 개의 불타는 돌이다”라고 선언했다. ‘불타는 돌’은 그의 문화(중남미 고대문화)를 기입해야만 원만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시와 사랑과 혁명’은 현실적 문맥으로 충분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시는 끝없이 자신을 불태워야만 지속될 수 있는 ‘사랑과 혁명’ 같은 것이라는 의미며, 결국 시인의 꿈은 ‘실천적 자기 변혁’에 달렸다고 본다. 끝으로 이 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리로부터 발원한 ‘불안’의 개념과 관련된다. S. 지젝은 “불안은 욕망의 대상/원인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다”라고 재해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꿈’을 불안의 부침浮沈이 그려내는 존재의 한 ‘바이탈 싸인vital sign’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지속성’ 여부일 뿐이다.
김보숙 시인은 ‘시적 길 찾기’의 입구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미궁迷宮의 입구에 내던져졌다고 보면, 시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 행위는 간 길을 그대로 따라 되돌아오는 ‘퇴행退行의 여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궁에 던져진 모든 시인은 자신의 ‘루트(개성)’를 개척해야만 한다.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조차 제 ‘운명’으로 즐길 수 있는 ‘미련함’도 그의 미덕이 될 것이다. 이번에 접하게 된 김보숙 시인의 10여 편의 작품은 어둠 근처와 어둠 속에서, 즉 시인의 입점에 따라 약간의 편차를 드러낸다. 이 글에서는 신인상 수상작들을 ‘시적 긴장에 대한 불안’으로, 그 이후의 발표작들을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으로 나눠보았다. 이 분류의 목적은 시인의 그릇의 크기를 재는데 있지 않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 목적은 블룸식의 약한 시인의 ‘길 찾기’의 방향성, 혹은 ‘시인의 꿈’의 단초를 엿보고자 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이정표-‘시적 긴장’에 대한 불안
일반적으로 ‘긴장緊張, tension’은 ‘어떤 정황이나 상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양’을 의미하지만 ‘시적 긴장’은 함축적으로 하나의 작품(세계)에서 ‘시적 화자(주체)’가 ‘시적 대상(객체)’과 맺게 되는 관계의 강렬도를 의미한다. 시적 긴장이 높아진다는 것은 ‘거리’가 소멸된
다는 것이며, ‘시적 긴장’의 상승은 ‘사물(사건과 물질)’들의 폭력적(일상적 어법에서 볼 때) 결합을 허용한다. 하지만 때로 이런 시작법 상의 정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심리적인 층위에서 ‘긴장’을 생각해 보는 것인데, 드러난 양태樣態보다는 ‘자극과 반응’의 방향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중층적이어서 쉼 없는 피드백을 통해 강도를 높이거나 줄인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번에 접하게 된 김보숙 시인의 작품 중 전반부, 신인상 수상작들은 ‘시적 긴장’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내부→외부’의 축을 드러내는데, 물론 이때 내부의 작인 중에는 ‘내부의 외재성’이라 부를 수 있는 요인들도 있다. 어쨌든 이 방향은 모든 존재가 ‘자아, 또는 나’로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요구하는 출발점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1)
소년 앨리스가 소녀 앨리스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소년 앨리스의 보조개는 그대로였지만 눈썹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눈동자 색을 따라서 눈썹이 물들었고, 눈썹 색을 따라서 혀가 물들었습니다.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던 남동생은 소년소녀 앨리스의 브래지어끈을 자르고 티팬 끈을 자르고 긴 머리칼을 잘랐습니다. 슬퍼하지 마, 네가 아침에 먹은 굴은 주기적으로 성이 변해, 네가 아침에 먹은 송사리도 나이에 따라 성이 변한단다. 소녀 앨리스는 공기의 요정 실프의 몸짓으로 고통에 관한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소녀 앨리스는 팔굽혀 펴기를 자랑하는 동급생들의 등짝을 발로 차고 2호선 초록색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 지하상가에 내려 초록색 하이힐을 고르고 장님들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가볍게 탭댄스를 추었습니다. 앞에 떨어진 동전 몇 개를 주워 소녀 앨리스는 우표를 샀습니다. 내일까지 도착할 수 있나요. 소녀 앨리스는 미국에 사는 소녀 앨리스에게 편지를 씁니다. dambae han gae piman billyeo jullae?
―「변신byeosin」 전문
2)
할머니는 빨간 병을 조심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빨간 병에 걸리면 모시나비가 목구멍에 걸려 한동안 아플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명한 날개는 속에 찬 아픔을 다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칫솔을 못처럼 갈은 삼촌은 조국이라는 말을 쓰고 입 속에 거품을 물고 대중이라는 말을 쓰고 애자 언니를 데리고 왔습니다. 빨간 병에 걸린 애자언니의 얼굴에는 올긋볼긋 석류씨가 박혀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모시나비를 삼킨 탓이라며 쇠붙이 같은 긴 손가락으로 모시나비를 찾아 뱃속을 휘저었습니다. 킁킁 자고 있는 자궁이 딸꾹딸꾹 흔들렸습니다. 슬로건을 찾기 전에 우리는 동굴 같은 방에 동거하며 칫솔을 못처럼 갈았습니다. 빨간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온 그가 떠나고, 낙타를 타고 온 그가 떠나고, 썰매를 타고 온 그가 떠나고, 당나귀를 타고 온 그가 떠나는 동안 애자 언니의 배는 부르고 불러 뜨뜻한 모시나비를 토해 냈습니다.
―「마차, 낙타, 썰매, 당나귀 그리고 자동차―빨간 병 속의 모시나비」 전문
3)
천장에 그려진 계단을 밟고 돌돌 말린 아들의 팬티를 찾으러 다락방으로 들어간 베트남 엄마는 최초의 밀실을 발견하고 최초의 기도를 올린다. 베트남 엄마는 베트남 엄마가 되지 못하고 베트남 엄마는 베트남 엄마가 되었다. 다리를 조금만 오므리면 다락방에 버려 놓은 소파와 쌀통 사이에 몸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멀리 있고, 가까운 곳에는 마리아상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신은 바쁘십니다. 고해는 짧게 해주십시오. 마리아상에 붙은 바삭바삭한 모기를 마리아상 손 위에 올려놓고, 죽음이여. 주금이여. jug-eumijyeo. 망고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던 마더가 가르쳐준 다중언어는 다중에게 외면당하고, 다중은 모국어를 가져오라 하고, 모국어는 마더muder뿐.
―「마리아상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다락방」 전문
인용한(사족이지만, 앞의 작품들은 부분 인용이 불가능하다. 어디선가 찢으면 그 찢긴 데서 새롭게 의미가 자라날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세 편의 작품은 김보숙 시인의 ‘긴장’의 강도와 파급 범위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시인이 지향하는 해결 방식의 단초도 함축하고 있다.
1)의 경우는 「변신」이란 제목이 웅변적으로 토로하듯이, ‘자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 확대 해석하면 ‘주체 확립’이라는 문제로 연결되는데, “슬퍼하지 마, 네가 아침에 먹은 굴은 주기적으로 성이 변해, 네가 아침에 먹은 송사리도 나이에 따라 성이 변한단다” 라는 남동생의 말처럼 ‘성性’적 정체성의 문제를 근본에 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상징적으로 시인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적으로 드러낸다. 한계란 시인은 비록 ‘소년엘리스가 소녀엘리스가 되는 날’이라고 그 방향을 비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여성’이라는 손쉬운 이분법에 기댈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가능성이란 시인의 글쓰기가 앞에서 재인용한 것처럼, ‘성적 구분’에 기대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을 뚜렷하게 각인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후광효과’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시인의 긴장이 ‘나’라는 범위에서 ‘주체 확립’이라는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높은 강도를 보인다.
2)의 경우는 제목이 드러내는 개인적 상징, 혹은 이중의 함축성이 ‘긴장’의 범위와 강도가 절정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 “칫솔을 못처럼 갈은 삼촌은 조국이라는 말을 쓰고 입 속에 거품을 물고 대중이라는 말을 쓰고 애자 언니를 데리고 왔습니다.” 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아’는 곧 ‘타자’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범위의 확장은 강도를 약하게 하지만 그로 인해 제 3의 언어들의 개입을 허용하게 된다. ‘조국’, ‘대중’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어휘들의 틈입을 시인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구조적 분석은 때로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만, 작품 하나에 온 힘을 다 쏟아 붓는 ‘정서적 접근’과는 다른 효과가 있다. 작품 2)의 경우는 긴장의 요인이 비록 확장되기는 했지만, ‘할머니’, ‘삼촌’과 같은 친족범위 내에 머물고 있다. 이는 ‘마차, 낙타, 썰매, 당나귀, 자동차’처럼 이동의 계열체, 즉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즉 ‘다른 나’가 되고 싶은 기원祈願의 강렬함보다 시인을 가두는 불안의 기분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3)의 경우는 김보숙 시인의 시인상 수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적 긴장’의 적절한 범위와 강도를 뛰어난 조형적 감각으로 보여준다. 가령, “베트남 엄마는 베트남 엄마가 되지 못하고 베트남 엄마는 베트남 엄마가 되었다.”는 부분은 단순한 동어반복이나, 말장난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다중 언어’가 대다수가 사용하는 언어와 여러 체계를 가진 언어라는 중의적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서 앞의 명제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주체’의 ‘언어’에 의한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염려되는 것은 그 어휘가 하필 ‘성모 마리아-마더-muder’라는 것이다. 선배 시인으로서 그 소리가 ‘murder’에 가닿지 않기를, ‘mother’에서 창조적으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 본 김보숙 시인의 ‘시적 긴장’의 전개 양상은 역으로 말하면, 습작기 시인의 분투의 기록이 된다. 이를 종합하면 목표는 ‘(시인으로서) 주체 확립’이고, 원인은 ‘충동(내면, 내재화된 외면성)’이고, 방향은 ‘체계(언어로 표상되는)’에 대한 투쟁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정리가 가능하다면, 당연히 등단 이후의 시적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3. 세 번째 이정표-‘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
대부분의 오해는 일반적인 이해에서 비롯한다. 편하거나, 이해를 위해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가 투여되어야 한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오해의 ‘첩경捷徑’으로 들어서 버린다. ‘영향’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영향을 주고받다 ’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최소한 ‘시’에는 더욱 불가능하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시적 영향’이란 일의적으로 후배 시인의 시적 규모와 차원을 제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확장하고 넘어서는 ‘창조(그러므로 재-창조)’의 길을 가느냐, 못 가느냐는 온전히 시인의 역량과 치열성 정도에 달려 있다. 좀 낡고, 지나치게 가지가 많은 비유지만, “우리는 각자의 하늘을 이고 산다.” 그 하늘은 자연 그대로일지도, 신인질도, 조국일지도, 진리일지도, 가족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인들에게 그 하늘의 대부분은 선배 시인들일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천재가 무시되는 상황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시적 영향’이란 직접적인 접촉 여부를 떠나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게 되는 압력과 한 시인의 반응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의미할 수 없다.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김보숙 시인의 작품들, 즉 이 글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시편들은 ‘시적 영향’을 벗어나고자 하는, 다시 말해 시인이 개성적이고자 하는 여러 전략을 보여준다.
1)
나는 그 해 구토하는 법을 배웠네. 아버지의 잦은 해소기침은 구토였네. 기침에 내장이 묻어나왔네. 기침이 바닥에 쏟아질 때 나는 눈을 감았네. 아버지의 귀바퀴가 흔들렸네. 쏟아진 기침을 쓰레기통에 담고 아버지의 굽은 등을 탁탁 두드리면 녹슨 철근이 만져졌네. 나는 귀를 막았네. 어머니가 사온 쪼그라든 돼지허파를 씹어 먹다가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었네. 그것은 숨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숨이 아니었네. 손에 든 허파가 흔들리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네. 허파를 씹어 먹다가 혀를 깨무네. 톡, 건강한 피가 흐르네.
―「허파를 씹다가」 전문
2)
연주를 끝내고 이빨로 기타줄을 물어뜯는 너의 습관은 땅콩 몇 알에도 체하기를 반복하는 내 아버지와 그럼에도 간장 종지에 땅콩을 수북하게 쌓아 놓기를 반복하는 내 어머니의 습관을 닮았는데. 이빨 사이에 낀 기타줄을 뺄 때면 들리던 삐그덕 소리가 부스스 땅콩을 까던 소리처럼 들려와 아 버 지 제 발 땅 콩 좀 그 만 까 드 세 요 제 발. 유독 간지럼에 약한 아버지를 간질일 때면 얘 야 나 좀 따 다 오. 내 아버지를 따고 나온 검붉은 피 한 방울은 내력을 숨기지 못하곤 했었는데, 연주를 끝내고 이빨로 기타줄을 물어뜯는 너의 습관은 바늘을 쥐고 땅콩을 까먹는 내 아버지의 습관과 검붉은 내력을 지우려는 내 어머니의 습관과 닮았는데.
―「낭만적 엔딩에 관하여」 전문
어설픈 이해지만, 해롤드 블룸이 정리한 ‘수정비율’을 이번 글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6단계는 다음과 같다. ‘궤도이탈’, ‘깨진 조각’, ‘자기 비하’, ‘악마화’, ‘금욕적 고행’, ‘환생’의 단계가 있다. 가설이므로 축약하면, ‘시인 아닌 시인(체계 밖에 있을 때)’의 단계, ‘시인이고자 하는 시인(체계 내에서 투쟁할 때)’의 단계, ‘시인인 시인(체계를 바꾸거나 재-창조할 때)’으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영향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단계에서 ‘시작’의 강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김보숙 시인의 후반 작품의 한 양상을 드러내는 1)의 경우 ‘관계의 망’이 작동하면서 ‘언어’가 수단으로 위상이 격하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의미’가, 특히 ‘시적 의미’가 강조됨으로써 시어와 주체를 연결했던 탄력이 느슨해지면서, 이른바 사회적 언어, 즉 ‘랑그’의 세계가 ‘의미 생성’을 위해 작품 전면에 드러난다. 가령, ‘구토→(기침) 내장→귀바퀴→돼지 허파’와 같은 전개가 시인의 명제적 전언, “흔들리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에 얼마나 적절한, 아니 강력한 표현이 될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작품 2)의 경우 소리의 연상이 행위의 연상을 불러오고, 그 역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습관’, 곧 ‘관례’에 이끌리는 ‘화자(나, 자아, 주체)’가 잘 형상화 되고 있다. 반면에 신인상 작품에서 보였던 긴장의 강도와 절실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필자의 눈이 어두운 탓이리라. 하지만 시인 스스로 선택한 ‘낭만적 엔딩’은 어떤 형상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시를 보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건 죄악이라 배웠지만, 자기를 ‘악마화’할 때까지, 김보숙 시인의 길은 더 멀리 뻗어 있을 것이다. ‘기타 줄과 땅콩’이 아니라 ‘습관’으로 두 행위를 결합시킨 한 사례로 시인의 초석은 널리 알려지고 있을 것이다.
아, 사라지지 않는 의문들(나 자신을 포함하여), 사건이 먼저, 의미가, 언어가, 해석이, 아니면 시가 먼저, 평론이, 시 이론이, 시사가,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시란, 정확하게 말해서 창작하는 자에게 시란, 천 번의 실패 뒤에 딱 한 번 성공한 ‘생명 진화’와 같은 것.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김보숙 시인에게도 ‘시적 긴장’과 ‘영향에 대한 불안’은 그가 ‘시인’으로 스스로를 정위했을 때, 불가피한 ‘불치병’, 병색이 완연해질 때까지, 시와 더불어, 모든 생명과 더불어, 강한 시인이 되리라 믿으며…….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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