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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뭍에 내린 닻, 바다로 열린 창-≪아라문학≫의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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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뭍에 내린 닻, 바다로 열린 창-≪아라문학≫의 첫 인상
1.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많은 문예지들, 특히 계간지 형식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예외 없이 ‘지난 계절 작품 다시보기’와 같은 꼭지를 책의 후반부에 운영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선 우선 두 가지 정도의 시사점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이런 형식의 글이 필요하다는 데 대부분의 계간문예지 발행인과 편집인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편집후기’의 앞에 배치됨으로써, 다시 말해 특집과 앞뒤로 짝을 이뤄 그 호의 특색을 드러내는 기능을 맡아달라는 내심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순기능에만 주목하자면 이 꼭지는 우리 시의 생생한 현장을 재점검하고, 빠르게 변화는 문화적 제 현상을 진단,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편집도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른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시의 저변이 문화적 현상이나 어젠다에 민감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현상에 종속되는 경향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꼭지가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는지는 깊이 고민해 볼 문제로 남는다.
지난가을 창간호를 낸 ≪아라문학≫은 편집후기에서 “지역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인천문학의 지역적 특성을 찾아내어 풀 것은 풀고 살릴 것은 살려내자는 것이 창간의 기본 취지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즉, 인천에 튼튼한 지역적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지역문학의 태생적 한계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를 리 있겠는가? 창간호는 앞의 다짐에 대한 방법적 노력, 즉 구성과 배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이미 만족할 만하다 할 것이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처음 선 보이는 이 꼭지, ‘지난 계절 작품 다시보기’의 문학계 전반에 대한 소회를 사족처럼 길게 붙이게 되었다. 이번 호만 관련하여 다시 한 번 꼬리를 길게 늘여보자면, 이 글은 ≪아라문학≫ 수록작품들과 자매지라 할 수 있는 ≪리토피아≫를 대상으로 할 것이다. 두 계간지의 가을호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지만, 앞으로 본 지를 위해 수고하고, 또 본 지를 통해 성장해나갈 맹아萌芽들을 가벼운 터치로 재소개하는 것으로 소박하게 꾸며보고자 한다.
2.
지난 계절, 나아가 올 한해 쏟아져 나온 각종 문예지를 세심하게 주의 깊게 살펴 본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접근 가능한 계간지 위주로 되돌아보았을 때, 시작 태도에 있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엿보인다. 하나는 출판계를 포함한 문자 매체 전반의 위축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문화 현상 전반을 선도해나간다는 자부심 내지는 자긍심의 위축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따지고 들면 시대상황에 대한 언급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따라서 생략하기로 한다. 다른 하나는 시인들의 작품이 비교적 고른 시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시인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에 걸맞게 자신의 시작을 논의할 장이 다양하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고립은둔형 천재보다는 함께 소통하면서 과감하게 자신의 작품을 개선해가는 방향으로 시작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상이나 조류를 시에 덧씌우려는 경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었다. 즉, 시인 각자가 좀 더 자기경험에 충실하려는 새로운 자각에서 비롯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비록 창간호지만 ≪아라문학≫의 여러 구성원들의 작품에서도 앞서 지적한 면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 몇 분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
아직도 독이 오르는가
날카로운 가시를 두르고 고양이 각도를 세우면서
비로소 길게 누운 몸뚱아리
켜켜이 펴지질 않는 너를 안고
숨을 한 번 삼킨다
이쪽저쪽을 꾹꾹 눌러대며
캄캄한 통점에 대하여
우린 논쟁하지 못한다.
그냥 수행자처럼 엎드려
온몸 바닥에 귀를 대고 눈을 감지
급격히 떨어진 체온을 통째로 삼키며
희뿌연 마음밭이 조금씩
땡볕에 데워지는 사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돌아서는 너,
허튼 소리에 하얗게 삭아 내리는 너를
슬픔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아이는 어른이 되고 거짓은 진실이 되는 방식 그대로
―하두자, 「증발의 방식」 전문
하두자 시인은 두 개의 가을호를 통해 총 7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또한 필자와의 인연으로 몇 년 전의 시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나-너’의 관계가 ‘자아-자기’의 층위를 포함하여 ‘주체-대상’의 층위, 나아가 관계의 틈, 사이까지 파고드는 발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시인은 “이쪽저쪽을 꾹꾹 눌러대며/캄캄한 통점에 대하여/우린 논쟁하지 못한다”고 진단하고 있지만, 어쨌든 ‘캄캄한 통점’을 ‘꾹꾹 눌러대’는 것 자체가 존재자가 존재로 현현하려는 모든 시도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된다.
모두 헛손질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치료는 안 되고, 평생 데리고 사셔야 합니다.
처음 의사가 비문증이라고 했을 때
어미 한 마리 새끼 두 마리
내 눈에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벌레들이다.
어미는 몸집이 작지만 새끼를 낳은 후로 소리가 크다.
큰 아이 학력고사 성적이 형편없었다.
집에서 아이교육을 그 따위로 시켰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 따위 소리 하려거든 저리 꺼지라고 한다.
어미와 새끼 그들은 환상(環狀) 형태로 움직인다.
위를 보면 위에 있고, 아래를 보면 아래에서
내 시선의 방향을 먼저 감지한다.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모시는 게 아니라 데리고 살라하니 그것만도 다행이다.
날아다니는 수가 지금 보다 몇 배 늘어나면
그 때는 반드시 병원에 오셔야 합니다.
―정남석, 「비문증飛蚊症」 전문
정남석 편집위원은 한 편의 알레고리로 시인의 자기역량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모시는 게 아니라 데리고 살라하니 그것만도 다행이라”라는 시적 언술은 그것이 증상이 아니고 가족일 때는 일견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병이나 증상에 대한 언급이라면 과한 것이 되고 만다. 옛말에 병은 모시고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즉 이처럼 모순이 아닌 듯한 내용으로 모순적 상황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염려까지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제목의 신선감 만큼이나 귀중한 시적 자질이라 해야 할 것이다.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명자가 숨죽이고 서있네.
개불알풀 고개 들어 노을빛 명자와 눈을 맞추네.
더부살이 골방처녀 늘어진 어깨가 속울음 우네.
명자 눈물방울이 개불알풀 초록심장을 뒤흔드네.
개불알불 괴발개발 쓴 연서, 명자 붉게 꽃물 드네.
―이외현, 「명자, 명자꽃」 전문
끝으로 읽게 되는 이외현 시인의 작품은 짧은 시행을 통해 한 장의 사진(이미지)이 아니라 동영상(서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끝으로 ≪리토피아≫와 ≪아라문학≫의 미덕 하나를 더 언급해야겠다. 이런저런 시 강의에 들어가 보면, 많은 수강생들이 내용에만 집착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장부호’ 사용에 대해 인식이 아예 없거나 등한시 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어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시인의 특별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면, 문장부호 특히 마침표는 반드시 표기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두 계간지는 보이지 않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3.
어쩔 수 없이 강조하게 되는 것이지만, 시력詩歷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지난 계절에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굳이 선정한 우대식의 신작은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떤 아나키한 개의 기억-후지와라 신야”라는 다소 엉뚱한 부제를 갖고 있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지만 “모든 생명 안에는 야차가 있다”는 비판적 인식을 명료화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아나키’의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다.
세상에 믿을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조금씩 무언가에 위안을 주며
더러 위안을 받으며 살아갈 뿐,
그러므로 어떤 교훈도 그리 유용치 못하다
가장 똑똑하게 목도하는 진실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
모든 생명 안에는 야차가 있다
‘나’라는 곳으로 지독하게 ‘나’를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지상에 뚝 내팽겨친다
‘아나키’란 묻혀간다는 점에서
죽음에 가깝다
뚝 떨어져 묻혀가는
하나의 슬로우 모션
끝까지 슬로우 모션
종점을 향해
―우대식, 「아나키스트의 고백」 전문
시인이 보여주는 ‘생명의 야차성’은 여러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제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믿었던 시절의 경험, 이런 것이다. 어느 평범한 주중 저녁, 뼈다귀 감자탕에 소주를 기울일 때, 커다란 뼈를 움켜쥐고는 텔레비전 화면 속, 동물의 왕국쯤 되는 프로그램에서 하이에나 떼가 채 숨도 끊어지지 않은 얼룩말의 내장을 파는 장면에 계속 비명을 질러대는 옆자리 손님들을 볼 때, 아 극적 아이러니를 느낀 경험과 같은 것이 떠오른다. 물론 우대식 시인의 본말은 “‘나’라는 곳으로 지독하게 ‘나’를 몰고 가다가/어느 순간 지상에 뚝 내팽겨”졌을 때의 비극성에 있을 것이다. 이때 자기비하는 자기보존의 역설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중에 천만 관객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호평을 받았던 한국영화로 ‘관상觀相’을 보았다. 원래 긴 서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성품 탓에 몇 번 졸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김내경 역으로 분한 배우 송강호의 대사는 귀에 쏙 들어왔다. “밀려오는 파도는 보았으나,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해석도 층위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릴 수 있을 것이다. 현상에 함몰되면 원인을 진단할 수 없다는 식으로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를 이 글의 앞머리에서 밝힌 ‘지난 계절의 작품 다시보기’의 소회와 연결해보면, 무엇이든 너무 거시적으로 또는 추상적 가치에 기대 풀어내려는 현학취미가 독자들의 눈길을 돌리게 하는 데, 분명히 한 몫 거들었음을 인식하고 반성하게 된다.
말 그대로 편안하고, 아름답고, 고운 작품들도 한국시단의 풍요를 더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박제천의 작품은 시인의 시력과 시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든 역작이며 수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관상책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다 생긴 대로 살다 죽는다 사람만이 아니라 집도 절도 상相이 있고, 마음도 상이 있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낙산 사무실은 스무 살 처녀가 꽃단장을 하고 님을 기다리는 상이다 내가 사는 집은 요술램프 속 지니,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렁각시 상, 조강지처도 있고, 애인도 있으니 버킷리스트조차 필요 없는 인생, 오고가는 길에 서 있는 나무마다 인생들이 들어차 있다 오늘 아침엔 대학로 실개천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올챙이가 말을 거들었다 5천 년 전에 내가 상사병을 앓던 아가씨란다 그래서 내가 이 길로만 다녔구나 시절인연이 무섭구나 돌멩이 하나 걷어찼다가 5천 년 만에 돌멩이가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차돌 하나, 손수건으로 잘 닦아서 실개천에 넣어주었다 물빛이 친구 구해줘서 고맙다고 반짝반짝 빛난다 얘는 또 어떤 인생인가 다음날 물어보기로 했다.
―박제천, 「시절인연」 전문
만물이 다 상相이 있고, 그 상대로 ‘살다 죽는다’는 작품 전반부의 명제는 곧바로 시인이 만나게 되는 올챙이, 차돌 하나, 반짝이는 물빛을 통해 완벽한 시적 의장을 갖추게 된다. ‘버킷리스트조차 필요 없는’ 시인의 인생이 우리 일상의 소소한 만남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엄한 톤과 포즈로 인생의 가치를 훈계하는 그 어떤 작품들보다 더 빨리 깊게 와 닿는다. ≪리토피아≫의 또 하나의 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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