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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강외숙/헬싱키 호텔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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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강외숙/헬싱키 호텔 외 1편
강외숙
헬싱키 호텔
한 잎의 적막이 먼저 누워버린
망명지의 호텔에서 편지를 쓰네
이방의 카페에서 한 잔의 고독을 마시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시한 시를 낳은 밤
집시의 피를 지닌 작가의 이야기를 쓰네
영원하지 않아서 사랑이겠지 라고 쓰네
영원한 사랑은 사라진 사랑이라고 쓰네
그대 눈동자 속에서 출렁거리던 비애와
폭풍이 지나간 황량한 언덕의 비명을 쓰네
지상의 어디에나 숙제 같은 삶이 있을 뿐
영혼의 보헤미안이 꿈꾸던 길 위의 날들은
결말이 명료한 숙명으로의 귀환이었을 뿐
센티맨탈로 각인된 기억의 문양을 적시며
고독의 원형질을 안고 잠든다고 쓰네
같이 울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도 쓰네
머나먼 망명지 헬싱키 호텔에서
누가 적요를 드리우나
누가 드리운 적요인지 모른 채
꽃숨을 쉬고 꽃밥을 먹었다
누가 견뎌낸 우뢰인지 모른 채
시라무런 유채꽃 지평선에 들었다
가도 가도 쓸쓸한 인생의 저녁을 지나
하얀 게르 위로 비수 같은 달이 뜨면
초원에 묶인 어린 말 같이 기억에 묶인 채
까닭 없이 서러워 울던 밤이 있었다
누가 드리운 적요인지 모른 채
거친 사내가 끄는 마차에 쭈그려 앉아
사랑 없는 세상에 태어나자던 약속을
뿌연 모래먼지 속으로 던져 버렸다
가도 가도 쓸쓸한 인생의 샛강을 건너며
*강외숙 2009년 <시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시울림오중주』 외. 이은상문학상, 상상탐구작가상, 미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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