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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허순행/애총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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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허순행/애총 외 1편
허순행
애총
엄마가 새엄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동생도 팥쥐가 되었다
그 애 대신, 사납고 심술궂어야 할 팥쥐 대신 그 애를 할퀴고 꼬집고 머리채를 휘어잡은 건 나였다 휘어잡고 나면 울음이 산을 넘어 왔다 아이고 이 웬수야 할머니는 태생에 든 화가 많아 그렇다고 역성을 드셨다 넌 불을 안고 태어난 아이야 동생을 예뻐하면 네 몸에 든 불도 사그라든단다 내가 태어나던 날, 산을 태우고 마을을 태우고 집까지 태웠다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는 질투가 마음을 흔들었다 뒤따라 온 울음이 또 나를 흔들었다 엄마가 굵은 회초리를 가져왔고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흔들리며 소리를 질렀다 왜 저 애만 예뻐해
홍역을 앓다가 그 애가 죽었을 때
정말로 그 애가 죽었을 때
나도 죽어서 산으로 간 듯 싶었다
3월이었고
진달래가 붉은 꽃무덤 위에서
하루 종일 울다 갔다는데
울음소리가 내 기억을 닮았다고 했다
곶감
동생의 죽음 이후로
울음이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가두었어
아침에 시작한 울음은 해가 넘어가도 그칠 줄 몰랐으니까 밤마다 검은 짐승이 대문 안을 엿보는 듯했어
어느날 밤 징징대는 나를 불러 앉히고 곶감 하나 줄까 할머니가 달랬어 배고픈 호랑이가 어흥 하고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밤중에는 울음 잡는 귀신도 돌아다닌다는데 우리 손녀 곶감 하나 줄까 정말 울타리 밖으로 둥글고 붉은 눈알들이 지나간 것도 같았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호랑이도 잡아가지 않을 걸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밤이 창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듯도 했어 울지 말고 말로 하렴 말은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고 네 속에 든 울음도 웃음으로 바꿀 수 있단다 속에다 천 길 탑을 세웠어도 말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아홉 살이 되던 이른 봄, 할머니는 겨울 내내 들려주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셨는데, 눈이 내려서 산으로 가는 길은 꿈속처럼 깊고 아득했는데, 곶감 하나 줄까 잠이 들면 지금도 말랑말랑한 곶감을 손에 쥐어 주신다
*허순행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낙관주의자의 빈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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