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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윤병주/구름 상자·1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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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윤병주/구름 상자·1 외 1편
윤병주
구름 상자·1
가장 낮은 바닥까지 가서
서로의 몸을 만져주며
가면을 벗은 웃음으로 서로를
보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욕망이 품고 가고 싶은 것이 죄이다
수천 가지 환상과 물거품이 꺼질 때까지
서로 술을 같이 마시고 이율배반 당한 세상에
거짓 사랑을 덮어줄 몸이 서로 필요했는지
바닥에 엎질러진 물처럼 혹은 착한 소녀처럼
무죄를 증명할 숭고한 결말은 없고
불안한 과정만 남은 그런 관계
여전히 거품으로 가득한 욕망과
불행했던 시간을 인연이라고 믿어본다
일그러진 별들이 어둠에 잠기고
수많은 비극이 우리 사이에 놓였는데도
단순한 세상법으로는 인연의 연대기라 한다
불길한 빛을 내며 일어나는 거품 같은 현상을
왜 무조건 그대의 죄로 바라보고 싶은지
허허로운 환영에서 그대의 배후가 되어
욕정의 결박을 풀지 못한 채
우리의 사랑을 비극적으로 끝내야 하는지
이 밤 그대 곁에 가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몇 상자의 슬픈 예감이 필요하다
밤하늘의 구름을 터트릴 슬픈 압정들이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나처럼 일어서는데
부디 꿈이 건너간 거품 같은 낮이 아니기를
그대의 아픈 상처도 더는 덧나질 않기를
구름 상자·2
그대가 떠났던 구름의 옛 집은 이제 허물어졌다
몸속을 파고드는 기억을 퍼올릴 그대와의 추억
가난한 사랑의 기억을 대나무의 푸른 마디에 담기 위해
나는 대나무 숲에 뜬 낯선 별 하나로 살아야 한다
잊혀져가는 밀애의 기억을 되집으며
말라가던 탐욕을 손가락 마디에 얹는다
서로를 연민했던 길목을 돌아보며
다시 지상의 통속적인 슬픔을 허락 받는다
한낮에 절망들로 떨어진 꽃들을 보며
긴 담벼락 기대어 안스러운 기억들을 보듬어 본다
좁은 계단을 한참 내려와
창밖의 나무들의 흔들리는 소리와
녹이 슬어가는 경계를 구별할 바퀴 하나를 세워두고
서로 금기시했던 말들과
부서지며 변해가는 밀실의 어둠을 읽어본다
짐승 같이 서로 욕망의 말이 깊어져
지나간 시간들이 서로에게 병이 되기도 했을까
그대 뒷모습으로 가는 입구는 하나다
다시 고인 구름의 옛집을 허공에 올려두고
나는 거품처럼 꺼진 슬픈 사랑을 후회하며
구름길에서 내려서야 한다
*윤병주 2014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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