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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김남권/나비 날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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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시/김남권/나비 날다 외 1편
김남권
나비 날다
평창우체국 앞 사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할머니,
유모차에 끌려 직진 중이다
옆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루목 고개를 달려 내려온 승용차가 급부레이크를 밟았다
할머니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유모자를 밀고 간다
칠십 년 동안 옆을 볼 새 없이 앞만 바라보고
살아온 세월을 과시하듯 꼿꼿하고
단호하게 직진 중이다
그니도 아이를 낳기 전,
어느 집의 귀한 딸이었을 것이다 미처 꽃을 피워
볼 새도 없이 누군가의 엄마였다가 유모였다가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발걸음 디딘 곳마다 꽃은 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겨울이 된 묵은 시간은 낡은
유모차에 실려 끌려가고 있다
수척한 나비의 발걸음이 무겁다
어느덧 날개마저 퇴화 되어 더 이상 날아갈
기력조차 없는 나비 한 마리가
지상의 문을 닫는 순간,
드디어 열일곱 처녀의 몸에서 빠져 나온
붉은 나비 수 만 마리가 일제히 밤하늘을
꽃 피우며 날아 올랐다
냄비받침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한 번도
뜨거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열정만 팔팔하던 이십대 무렵에도
머리가 좀 굵었다고 기고만장하던
삼십대 무렵에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고만장하던 사십대 무렵에도
누군가를 진짜 생각한 적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십대에 이르렀지만
나는 여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었다
그냥 흘러가는 늙은 구름이었다
시간을 바람에 비벼먹느라
혼을 빼앗기고
노여움은 물길에 띄워 보내느라
주름을 가불하기 바빴다
시집을 일곱 번이나 냈지만 누가 유심히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매일 피를 토하며 약을 팔았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머리맡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저 우둔한
나무 등걸을 무엇에 쓸까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불쏘시개를 하고 목침을 하고
뜨거운 라면을 끓이고 나서 냄비 째 올려놓고
먹을 때 더 이상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바로 그것의
대단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김남권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외. 동시집 『짜장면이 열리는 나무』 외. 저서 『시낭송 이론서-내 삶의 쉼표 시낭송』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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