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4호/신작시/김새하/상자 안을 맴돈다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24호/신작시/김새하/상자 안을 맴돈다 외 1편
김새하
상자 안을 맴돈다
죽음에 준하는 이별의 각오가 울지 못할 울음을 뱉는다
모든 것이 엉켜
악으로 피고 균열로 자라나
마침내
저녁마다 낯선 벌이 들어온다
내 남자에게 주려고 피워놓은 꽃게 등딱지를 자기 꽃인 양 꺾고
아이의 눈부신 밥그릇이 비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낯선 벌은 나와 현재 이외의 것이 없는 것으로 규정했지만
베개 옆의 베개에서 익숙한 향을 풍기며 잠들어 있다
저녁마다 신는 양말 속에는
오이마콘*의 눈이 내리고 바람길이 열린다
야생마의 부드러운 육질은 회한의 기억으로 늙은 밤을 살아가고
겹겹이 신은 요일이 지나갈 때마다
갈라진 겨울밤이 누군가가 흘릴 눈물 대신 떨어진다
어두워지면 소문이 걸어온다
감정이 심장을 가리고 실수 한 날부터 생은 증거를 안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몇십 년을 보내고 돌아보면
그 길이는 하루정도, 증거는 아직 벌의 표정에 걸려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면증을 부르자
내일 저녁에도 낯선 벌이 날아오겠지만
벌침으로는 어떤 이야기도 적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 인간이 사는 가장 추운 곳.
청새치 한 마리
밤이 불어나 베란다 창문을 밀어댄다
괜찮냐는 물음에
토해 놓은 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아직 토하지 마라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밤은 창문을 먹고 나의 영역에 발을 디딘다
꼭 쥔 리모컨
놔도 괜찮다는 쉬운 말을 손가락이 결리도록 듣고 있다
두 발을 쿵 굴러 밤 속으로 뛰어들면 나의 집엔
밤이 밀려들어 청새치가 살기 시작하고
나는 뷰가 좋다는 찬사를 듣게 해 준
산을 향해 뛰어가는 소녀처럼 헤엄치기 시작한다
입고 있는 따뜻한 것은 콜록콜록 감기가 되고
통하지 않는 피에게
더 이상 어길 약속을 주지 않고 생리를 그만두겠다
핏줄을 물고 앉아 있는 창은 친구일까 적일까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청새치는
내가 누울 뱃속을 가질 만큼 자라나
일렁거리는 밤을 누비며 은행 이자를 걱정할 것이다
땡… 납기일이 도래하였습니다
불빛으로 별을 대신하는 날에도
청새치는 자라고 있다
*김새하 2017년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시작》). 2017년 《시현실》로 등단.
- 이전글24호/신작시/김수원/연꽃 핀 바람 외 1편 20.01.23
- 다음글24호/신작시/김고니/신호등이 꺼진 네거리에 누웠다 외 1편 20.01.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