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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시집속의 시/박달하/상처없는 맑은 세상―정미소 시집 『벼락의 꼬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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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55회 작성일 20-01-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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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시집속의 시/박달하/상처없는 맑은 세상―정미소 시집 『벼락의 꼬리』 중에서


박달하


상처없는 맑은 세상
―정미소 시집 『벼락의 꼬리』 중에서



근대의 스타요리인 이용기가 1924년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실린 ‘부빔밥(비빔밥)’ 항목의 한 구절이다. ‘역시 충분하다. 음식에 관한 논의는 엄연한 물리적인 실제의 한 그릇에서 출발할 일이다.’ 비빔밥은 밥상에 놓인 밥에다 숟가락 젖가락에 걸리는대로 제철과 취향을 섞어 만들어 먹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쥔 음식이다. 여기에다 간장, 고추장, 참기름 등 별미장으로 한껏 풍미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시인은 비빕밥을 소재로 시 한 상을 차려냈다.
 
담비를 추적한다 허리가 잘록한 담비, 꼬리가 긴 담비,
겁이 많은 담비, 낯가림이 심한 담비다 위 주머니가 작아서 
소식한다 산머루 한 알 입속에 넣고 오물거린다 그런 담비,
 
혼자 있을 적에는 고라니를 사냥한다 살집이 말랑한 고라니의 
등갈비살을 발라먹는다 뒷다리살을 덥석 베어문다 포식한다
 
그가 문득 음식이 맛이 없느냐고 묻는다 위주머니가 작다고한다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베었다고 한다
 
그와 헤어진 후 집에 와서, 양푼에 밥을 비빈다 다래와
버찌와 산딸기를 넣고 비빈다 찔레꽃 향기를 넣고 비빈다
새의 깃털과 잠자리의 날개와 어린 멧돼지의 울음을 넣고 
비빈다 담비처럼 먹는다
 
담비의 배설물을 분석한다 하늘다람쥐, 청설모, 비단털들쥐,
여왕말벌의 흔적이다 허리가 잘록한 담비, 소식하는 담비,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양푼 비빔밥」 전문
 
수많은 사람들과 아이들과 마주하는 일상을 명쾌하게 사는 것은 다양한 언어들의 홍수 속에서 세탁하고 포용해야 하는 포만함이 시인의 마음이다. 일상의 일터에서 일어나는 오만 가지 색깔들을 버무려 고소한 참기름으로 기호와 취향들을 섞어 이해의 폭을 키웠을 것이다. 다래를 보면서 버찌를 씻으며 산딸기의 달콤함을 삼키며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것을 살펴 상처 없는 맑은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이다. 시인의 시적 상상은 귀여움 속에 대범함을 감추고 사는 멋있는 담비이다. 
 
대관령, 봉평, 새말, 문막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가 시외버스를 몰고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던 길이다
 
아흔아홉 구비 멀미나도록 오른 고갯길
등 굽은 장승이 이정표 되어 손짓하는 삼거리
 오일장터가 북적거린다
메밀국수 한 대접 후루룩 말았을 난전
 
저세상의 아버지가 남겨둔 길을 따라
아카시아 꽃향기 꿀물로 번지는 흐린 지도 속
 
뭉툭한 연필심을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다.


─「낯선 길을 걷다」 전문 
 
아버지의 세상을 돌아보는 여정이 무겁다.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던 그 길에 아버지의 눈물이 풀들을 깨우고 아카시아 꿀물로 나를 채운다. 그리움이 묻어있는 대관령길을 아스팔틀 포장했지만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마음은 포장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낯선 길을 따라 마주하는 사물들과 언어들과의 눈맞춤이 자아를 견고히 만드는 디딤돌이 되고 북적거리는 오일장터에서 고단한 허기를 달래주는 아버지의 국밥을 회상하는 시인의 마음엔 뭉퉁한 세상의 연필심을 세우고 도화지를 채우라는 묵직한 아버지가 살아계신다.  





*박달하 201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사립문을 열다』.  《아라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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