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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아라세계/신연수/죽어서도 소외된 한하운, 나癩 시인의 슬픈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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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11회 작성일 20-01-2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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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아라세계/신연수/죽어서도 소외된 한하운, 나癩 시인의 슬픈 노래


신연수


죽어서도 소외된 한하운, 나癩 시인의 슬픈 노래



지난 5월 2일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매년 개최하고 있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의 올해 주인공은 시인 구상을 비롯하여 아동문학가 권오순, 소설가 김성한, 시인 김종문, 아동문학가 박홍근, 소설가 전광용, 시조시인 정완영, 평론가 정태용 등 8인이 선정돼 심포지엄과 문학의밤 행사가 진행됐다. 이 중에 끼지 못한 탄생 100년을 맞은 시인이 있다. 바로 한하운韓何雲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씨다」, 「전라도길」, 「보리피리」 등으로 일찍부터 대중들에게 널리 읽혀온 시를 써 온 한하운. 문둥이라는 이유로 생전에도 수많은 소외를 당했는데 죽어서까지 그는 문학인 축에 끼지 못한 것이다.


한하운은 처음부터 문둥이는 아니었다. 그는 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한종규韓鍾奎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한태영韓泰永이었다. 어릴 때 함흥으로 이사,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 이리공립농업학교 수의축산과에 입학했는데 이 때 나병 증세가 처음 나타났다. 현재 남아 있는 이리농림 시절의 사진을 보면 그는 잘 생긴 미남으로 나병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일본 동경에 있는 성혜고등학교와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축산학과를 나와 1943년 함경남도 도청에서 수의사로 취직하는데 한 해 후인 1944년 나병이 심해지면서 그 일을 그만둔다.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함흥시 중앙동 자택에서 요양 중 문학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당시 문학공부는 일본의 문학서적이나 잡지 등을 읽거나 혼자 작품을 창작해 보는 것으로, 숨어 지내는 그에게 어울리는 일이었다. 1948년 그는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서울거리를 유리걸식하면서 종이에 쓴 자신의 시를 팔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이병철李秉哲 시인의 눈에 띄어 1949년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라는 제목으로 「전라도全羅道길」, 「손꼬락 한마디」, 「벌罰」, 「목숨」, 「데모」, 「열리지 않는 문門」, 「파랑새」, 「삶」, 「막다른 길」, 「어머니」, 「개고리」, 「명동明洞거리」, 「비오는 길」 등 13편이 소개된다. 이중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라는 부제가 붙은 「전라도길」을 보면 일제강점기 전국의 나환자들을 강제 수용한 전남 고흥 소록도로 가는 나환자들의 참담한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전문


그리고 또 개구리 울음소리를 표현한 「개구리」 같은 시는 지금 읽어 봐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개구리」 전문


이렇게 소개된 시가 인기를 끌자 2개월도 안된 1949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총 26편이 수록된 시집 『한하운시초』를 발간한다. 《신천지》에 처음 「한하운시초」가 실릴 때처럼 시인 본인도 모르는 가운데 그의 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1955년 5월부터 『희망希望』에 연재된 그의 수기 「나의 슬픈 반생기半生記」를 보면 “서울거리를 유리걸식할 때 서점에 붙은 자신의 시집 광고를 보았지만 문둥이기 때문에 그 시를 쓴 한하운이 자신이라고 나설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하운을 발굴한 시인 이병철도 그의 시초를 엮으면서 “내가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시인 하운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첫 여름이었다. 외우畏友 박용주朴龍周 형의 간곡한 소개로 정처 없는 유리遊離의 가두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 하나를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 그의 관적關籍은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이며 당년 서른 살의 절세환자. 아호를 ‘하운何雲’이라고 불렀으니…. 어찌 구름처럼 떠다니는 몸이었던고…”라고 적었다.


그가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사용한 이름 ‘하운何雲’은 「도연명의 시 사시四時」에 나오는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의 ‘여름날의 구름’과 같다는 뜻으로 지은 그에게 꼭맞는 이름이었다.


이런 한하운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한하운시초』에 실린 시가 인기를 끌자 전쟁 중인 1953년 6월 출판사는 초판에 시 5편을 더 증보한 재판을 새로 펴낸다. 그런데 이 책이 시판되자 8월 1일 주간지인 <신문의 신문>에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은 유령으로, 문화 빨찌산’이라고 말하면서 사회문제가 된다. 월북시인인 이병철이 한하운의 시를 처음 소개한데다 또 「데모」 같은 시를 자의적으로 해석, 날조한 것이 전쟁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일종의 가짜뉴스 사건이었다. 그러나 몇몇 일간신문들이 이에 야합하면서 이 사건은 반년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사건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국회의 의정단상에까지 상정될 정도로 확대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신문 사회부장으로 이 사건을 취재, 진실을 밝힌 오소백吳蘇白은 한하운이 가공인물이 아닌 실재 인물이라고 보도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1955년 7월 발간, 오소백의 『올챙이 기자 방랑기』 참조)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한하운의 대표작인 「보리피리」이다. 이 시는 가공인물 논란이 한창이던 1953년 10월 14일 한하운이 느닷없이 <서울신문> 편집국에 나타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즉석에서 쓴 시로, 다음 날인 10월 15일자 <서울신문>에 처음 실렸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사故鄕事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放浪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니리.


─ 「보리피리」 전문


그러자 이번에는 이 시에 나오는 “인환人寰”이라는 시어를 트집 잡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헤프닝으로 끝나고 하운은 세상 밖으로 나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인환(사람들이 북적북적거리는 거리)의 세상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하운은 시는 물론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 동안은 나환자인 자신을 숨기면서 일반인과 다른 세상을 살고, 또 그런 시각으로 보는 시를 써 왔는데 이 때부터 일반인과 함께 살아가는 문둥이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또 그런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보리피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1955년 3월 제2시집 『보리피리(인간사 발행, 57판 90쪽)』로 맺어졌다. 총 17편의 작품이 실린 이 시집에는 인간 세상에 함께 어울려 살고 싶은 문둥이의 소망이 담겨 있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전문


그리고 같은 해 5월 한하운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인생수기 「나의 슬픈 반생기」를 월간지 『희망希望』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수기는 1957년 1월까지 연재된 후 1958년 10월 단행본으로 발간, 독자들로부터 크게 인기를 끌기도 한다. 그 사이 『보리피리』 역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가 하면 1956년 6월에는 『한하운시초』와 『보리피리』를 한데 묶은 『한하운시전집』(인간사 발행, 46판 185쪽에 시 48편 수록)을 발간하기도 한다. 또 1959년에는 한하운의 유일한 문단친구인 박거영이 『한하운시감상』을 펴내는가 하면, 1960년에는 자작시 해설집인 『황토길』이 발간되기도 한다. 소위 전성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이 해 한하운은 나병의 음성판단을 받아 사회에 복귀하게 된다.


그가 사회에 복귀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출판사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를 차려 그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자신의 작품을 찾는 일이었다. 또 나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제약회사를 창설하는가 하면, 경기도 안성에 1만여 평의 미개간지를 매수해 나환자들의 생업을 위한 농장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1962년 10월에는 화가인 이항성李恒星과 처음으로 판화를 곁들인 시화전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고 시화집까지 발간한다.


그러나 한하운의 시작품 활동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1964년 12월 그 스스로가 정리한 『정본定本 한하운시집』에 수록된 시 55편과 이후 1975년 작고할 때까지 발표되었거나 유고로 남은 50여 편을 합쳐 봐도 평생 그가 쓴 시는 100여 편에 불과하다. 그기다 그의 시가 발표된 지면을 보면 1955년 4월 5일 <평화신문>의 「비창悲愴」을 비롯하여 1956년 12월 《자유문학》의 「은진미륵불」, 1964년 계간 《시문예》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1966년 1월 1일 <인천신문>의 「회심回心」, 1967년 12월 《현대문학》의 「보리피리」 재록, 1968년 5월 《사상계》의  「장승長丞」, 1970년 2월 《시인》의 「춘일지지春日遲遲」 등 5편 외에는 대부분 이름 없는 잡지나 특수지, 회보, 교지 등 독자가 극히 제한된 곳에 발표된 것들이었다. 정상인이 되어서도 한하운은 끝까지 소외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환자의 경우 면역력이 취약한 탓으로 다른 질병에 노출되기 쉬워 대부분 건강이 좋지 못하다. 그 역시 1967년 발병한 간경화증으로 오래 병고를 치러야 했으며, 또 사회적 편견 탓에 제대로 된 발표지면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린 영광은 1973년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소록도에 그의 자필로 된 시비 「보리피리」가 새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75년 2월 28일 오전 10시 25분 그는 인천시 북구 십정동 산 39번지 14통 2반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곁에는 반평생 그를 뒷바라지 한 미감아 출신 유임수 씨가 전부였다. 그는 현재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5 장릉묘원(묘지번호 183번) 고요히 잠들어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소외와는 달리 그의 묘소 뒤에는 김포시와 김포문인협회가 설치한 그의 생애 및 시 2편 등의 입간판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또 묘소 입구에는 유택의 위치를 안내하는 표지판까지 설치되어 그를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살아온 인천에서는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전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가 사망 42년이 지난 2017년 12월 부평구에서 그와 연고가 없는 백운공원에 시비를 세우고 ‘시인으로서 부평문학의 한 획을 만든 한하운’이라고 치켜세운 후 ‘부평사람’이었음을 강조했다. 언제부터 한하운이 부평사람이었는가?


부평의 청년들이여
이제 아세아의 잠에서 깨어나
70년대의 찬란한 햇빛에
얼굴을 들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을
누가 부평이라 하였는가
얼마나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부평 평야는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
높솟은 계양산은 우리의 이상으로 하늘에 닿고
한강이 은룡銀龍으로 굽이치고
강화, 영종섬이
관악산이 남한산이 북한산 산들이
부평을 품안고


(중략)


부평의 청년들의 가슴마다 피어
부평의 개발에
부평의 건설에
내연하는 봉사
자발하는 협조.


새 부평을 창조하여
뭉쳐 뭉쳐서
부평의 청년들이여
이제 어두운 이씨조선의 잠에서 깨어
70년대의 새 시대를 창조하는
이 나라에 빛나는 부평 청년이여


─「부평 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 일부







* 작품 연보


1949년 (30세)
4월 《신천지新天地》에  이병철李秉哲 선選으로 「전라도 길」 등 시 13편 수록. 
5월 30일  첫 시집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정음사正音社에서 발간. 6×6판, 67면.
시 26편 수록


1953년 (34세)
6월 정음사에서 『한하운시초』 재판 발간. 시 5편을 증보, 총 31편 수록. 
10월 15일  <서울신문>에 시 「보리피리」 발표


1954년 (35세)
11월 《실화實話》에 산문 「문둥이와 거지의 세계」 발표


1955년 (36세)
3월 20일  제2시집 『보리피리』를 인간사人間社에서 발간. 57판, 90면. 시 17편 수록.
표지가 청색, 흰색 두 종류로 제작됨
4월 5일  <평화신문平和新聞>에 시 「비창」 발표
5월~ 57년 1월  《희망希望》에 인생수기 「나의 슬픈 반생기」 연재


1956년 (37세)
6월 15일 『한하운시초』와 『보리피리』를 합친 『한하운시전집韓何雲詩全集』을 인간사人間
社에서 발간. 46판, 185면. 시 48편 수록
12월 《자유문학自由文學》 3호에 시 「은진미륵불」 발표
12월~ 57년 1월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수필 「나의 시작수업詩作修業」 발표


1958년 (39세)
4월 10일  장편소설 「사랑은 슬픈 것인가」 기고
4월 《현대現代》 2권 4호에 수필 「천형시인天刑詩人의 비원悲願」 발표
7월 《신문예新文藝》 1호에 수필 「큰 코 다친다」 발표
9월 《신문예新文藝》 3호에 수필 「인간人間에 대한 반항정신反抗精神」 발표
10월 30일  인생수기집 『나의 슬픈 반생기半生記』를 인간사人間社에서 발간. 46판, 317면.
11월 《사진문화寫眞文化》 12호에 시 「인간추방人間追放」과 수필 「사진寫眞에 대한 불연속
적不連續的 관견管見」 발표
12월 《신문예新文藝》 6호에 수필 「어느 날의 단상斷想」 발표


1959년 (40세)
2월 이리농림 교지인 《새싹》 6호에 시 「벽화壁畵에 부치는 글」, 서울대 《수의대학보《 2
집에 시 「어느 Velt는 살고 있다」 발표
8월 《신태양新太陽》에 수필 「우리도 인간人間이다」 발표
8~ 9월 《신문예新文藝》 14호에 「영원한 민족의 서정시-소월의 시를 말한다」 발표


1960년 (41세)
3월 《여원女苑》 55호에 수필 「첫사랑의 요오델가」 발표
8월 15일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길』을 신흥출판사新興出版社에서 발간. 46판, 254면.
10월 15일 《새벽》에 수필 「방랑放浪과 향수鄕愁」 발표
10월 《사랑》 2호에 시 「명동明洞 3」 발표


1961년 (42세)
4월 덕수상업고등학교 교지 《덕수》에 수필 「자아」 발표


1962년 (43세)
9월  《여원女苑》 85호에 수필 「황토길의 인생과 시」 발표
10월 20일 문화교육출판사文化敎育出版社에서 화가 이항성李恒星의 판화를 곁들인 『시화집
詩畵集』 발간. 46판, 117면. 시 53편 수록
10월 25일 《전원》 2집에 시 「전원田園」 발표


1963년 (44세)
1~2월 《새빛》에 시 「세월歲月이여」 발표
3~4월 《새빛》에 시 「오마도五馬島」 발표
7월  《여상女象》 9호에 수필 「애염전愛染箋」 발표


1964년 (45세)
5월 《새교실》 9권 5호에 수필 「분뇨소」 발표
12월 『정본定本 한하운시집』 간행
미상 《국회평론國會評論》 창간호에 시 「포인세치아꽃」 발표
미상 계간 《시문예詩文藝》 1호에 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 발표


1965년 (46세)
1월 7일  동인지 《이방인異邦人》 1호에 「꽃세월」 「흙전쟁戰爭」 발표
12월 《재무財務》 120호에 수필 「물전쟁」 발표


1966년 (47세)
1월 1일  <인천신문仁川新聞>에 시 「회심回心」 발표
3월 《세대世代》 44호에 수필 「향풍香風」 발표
6월 27일 <일요신문日曜新聞>에 시 「금유월今六月」 발표


1967년 (48세)
1월 30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펴낸 『현대한국문학전집 (18)- 52인 시집』에 시 「전
라도길」 등 9편 발표
12월 《현대문학現代文學》 156호에 시 「보리피리」 재록


1968년 (49세)
4~5월 《새길》 151호에 시 「올봄에도 꽃은 피는데」 발표
5월 《사상계》 181호에 시 「장승長丞」 발표
7월 《새교실》 5학년용에 수필 「나의 솨하鎖夏」 발표
12월 26일 <경기매일신문>에 시 「정情」 발표


1969년 (50세)
4~5월 《새길》 159호에 시 「귀향歸鄕」 등 발표


1970년 (51세)
1~2월  《바른길》 37호에 시 「행복幸福」 발표
2월 《시인》에 「춘일지지春日遲遲」, 「낙엽落葉」, 「춘와春蛙」, 「파고다공원公園」, 「포인세치
아꽃」 등 시 5편 발표
5~6월 《새길》 168호에 시 「어떤 인생人生」 발표
6월 《교정》 129호에 시 「귀로歸路─고향으로 가는 길은」 발표


1971년 (52세)
2월 21일 『THE KOREA TIMES』에 시 「보리피리」 영역 소개


1974년 (55세)
9월 《새빛》에 만시輓詩 「곡哭 육영수 여사 영전靈前에」 발표


1975년 (56세, 이해 2월 28일 사망)
10월 17일  삼중당에서 『보리피리- 한하운시전집』을 문고본으로 발간


1976년
12월 《경기문예京畿文藝》 창간호에 수필 「마지막 계절季節」 수록


1977년
3월 30일 《경기문예京畿文藝》 2집에 시 「나병癩病의 날에」와 소설 「사람은 슬픈 것인가」
수록
6월 《한국문학》 44호에 유고시 「백목란白木蘭꽃」 외 19편 수록


1979년
3월 《월간독서月刊讀書》 27호에 유고로 미완성 소설 「길 위에 선 남자」와 수필 「나와 내
주변의 여인상」 메모 「절규의 편린」 수록


1982년
4월 5일 지문사知文社에서 김창직金昌稷 편저로 『가도 가도 황토길』 발간


1984년
6월 15일 부부시인 이종석李鍾奭 김정숙金正淑이 도서출판 부름에서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발간


1991년
11월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45」로 『보리피리』 발간


1993년
1월 한하운 일대기를 소설화한 김선의 『가도 가도 황톳길』 발간


2010년
11월 12일 『문학과지성사』에서 『한하운전집』 발간. 대판, 867면.





*신연수 시인.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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