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5호/특집 오늘의 작가/김현숙/피서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35회 작성일 20-01-23 10:02

본문

25호/특집 오늘의 작가/김현숙/피서지


김현숙


피서지



밤바다는 무섭도록 아득하고 적막하다. 태고의 절대 암묵과 신비를 재현하듯 가없이 펼쳐진 어둠과 겹겹의 검은 물결… 그 검은 공간 위로 겹겹이 떠 있는 몇 개의 시린 조명탄. 차르륵 차륵… 하얗게 부서지며 끝없이 반복되는 조류의 흐름이 없다면 그들 자매에겐 더욱 쓸쓸했을 밤이다.
아이들 괜찮을까. 아무래도 좀 불안하다. 괜찮아. 지금쯤은 아마 다들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걸. 언니 쪽의 우려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칠 않는 기색이다. 열대풍의 화려한 무늬 헤어밴드에 어깨가 환히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끈 티셔츠, 짧은 핫팬츠 차림인 그녀는 삼십대 초반임에도 마치 20대처럼 발랄해 보인다. 휘파람을 불듯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담싹 찬숙의 팔짱을 끼어온다. 북적대는 한낮의 인파는 어디로 다 숨어버렸나. 어두운 해변을 따라 띄엄띄엄 자리잡은 포장마차의 불빛이 겨우 피서지의 정취를 일깨울 뿐 최전방이 멀지 않은 동해의 밤은 적이 삭막한 느낌이다. 그러나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둠침침한 민박촌에서 좀 떨어진 곳, 해변의 한쪽 끄트머리 솔밭 둔덕으로부터 휘황한 빛을 발하며 굽어보는 일급호텔의 자태만은 단연 고압적이다. 그 아래로 다닥다닥 이어진 고만고만한 민박촌의 우중충한 형상이 어둠 속에서도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끈다.
 
어제 지름길인 수로를 이용, 배를 타고 C항으로부터 이곳에 도착했을 때 8월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선착장엔 피서객을 상대로 민박을 유치하려는 많은 아낙들로 붐볐었다. 그들 중 그녀의 남편 J는 가장 나이 많고 지쳐 보이는 한 여인의 뒤를 따라가 묵묵히 그 집을 가족의 숙소로 정하였다. 아낙의 집은 민박촌의 여러 집 중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누추해 보이는 집이었다. 깔끔 떠는 일에 둘째라면 서러울 그녀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남동생 K를 비롯, 비교적 성품이 무던한 그녀의 언니까지도 그 집을 숙소로 정함에 못내 난색을 표했으나 그녀의 남편 J는 모른 척 외면하였다.
손바닥만한 마당이나마 최소한 시멘트 포장이라도 되어 있는 아담한 민박들도 많았으나 하필이면 펌프장의 물이 흘러넘쳐 질척해진 흙마당에 허름한 담장 밑으로 아무렇게나 자라난 푸성귀며 호박 등을 너저분하게 심어놓은, 그리고 흥부네처럼 올망졸망 연년생의 아이들이 무려 일곱씩이나 되는 몹시도 신산한 누옥을 휴가철 가족의 숙소로 정한 J의 심사를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 기왕에 집을 나와 객지에서 돈을 쓸 양이면 되도록 가장 어려운 집을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함께 온 가족 중 그의 의견에 동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소위 신세대라 할 대학 2년생인 그녀의 남동생 K의 반응은 더욱더 상반되었다. 한차례 태풍이라도 불어올 양이면 마을 전체가 온통 다 날아가버릴 듯 열악한 환경… 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누옥에서 보내야만 할 3박4일의 피서 일정에 J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적이 낭패스런 기분임을 숨길 수가 없었다. 누나, 우리가 지금 불우이웃돕기 하러 온 거야. 바캉스… 우린 쉬러 온 거야. 휴식을 위해 온 거라구. 바캉스엔 쾌적한 환경이 필수 아냐. 이번 휴간 완전히 종쳤어.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K는 그렇듯 불만을 터뜨렸고 그런 상황을 지켜봐야만 하는 그녀는 시작부터 벌써 맥이 빠져버렸다.
애초 J가 해외출장 중인 손윗 동서를 대신하여 처형 식구를 비롯, 혼잣몸인 장모, 처남 등 모처럼 처가 식구들과 함께 피서행을 건의해올 때부터 그녀는 내심 한가닥 우려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처가를 대하는 마음이 편편하고 엽렵하긴 하나, 도시 중산층의 정서를 지닌 친정붙이들과 전형적 시골 태생인 J와는 곧잘 아귀가 잘 맞질 않는 그 무엇이 있음을 그녀는 인정치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이곳이 맘에 든다.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왜들 까탈을 부리고 그러니. 길어야 사나흘 있음 떠나잖니. 가족간 논란이 분분한 중에도 결국 세상을 살 만큼 살아온 장모의 후원에 힘입어 J의 의견은 가까스로 통과가 되었고 그로써 숙소 문제는 끝이 났다. 더러워… 세수도 못 하겠어. 마당을 걸어다니기도 싫어.
도시의 단출한 아파트 생활에만 익숙해온 유치원생인 그녀의 딸 예리,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인 언니의 아이들마저 심히 투정을 하며 숙소에 정을 못 붙여 야단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쿵 쿵 쿵…….
짭짜름한 바닷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해변의 한쪽 끝 불이 훤히 밝혀진 대형 텐트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언니, 우리도 저리 가자. 쉘 위 댄스 어때, 신나잖아. 너 왜 이러니… 예리 아빠 알면 큰일날라. 그녀 언니의 낯빛엔 불안한 기운이 가득하다. 걱정마아. 그인 지금 친구랑 한참 술독에 빠져 있을 거야. 민박에 일찍 들어감 뭘해. 좁아터진 방에, 모기향 냄새하며… 아휴, 생각만 해도 숨막혀. 그녀 언니의 염려에도 진저리치듯 말하는 그녀는 그리 쉽게 물러설 기미가 아니다.
도착 당일인 그제 오후던가. 비누, 모기향 등 몇 가지 생활용품을 사러 마을 슈퍼엘 들른 그녀 내외는 뜻밖에도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온 J의 대학동창을 만났다.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친구였다. 두 사람은 반색을 하며 서로의 숙소를 알려주었고 조만간 곧 만나 술 한잔 할 것을 약속하였다. 친구의 숙소는 민박과는 꽤 거리가 먼 피서지 유일의 호텔이었다. 그러나 워낙 바닥이 좁아서일까. 다음날 아침 졸라대는 아이들을 이끌고 해변 단 하나의 놀이기구인 회전 그네를 타러간 그녀 가족은 그곳에서 다시 어제 만난 J의 친구와 마주쳤다. 그도 역시 가족과 함께였다. 자연스레 어울린 두 가족이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으레 그러한 수순이듯 J와 그의 친구는 대작할 것을 약속했고 그 시간이 바로 휴가 3박4일의 마지막 밤인 오늘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이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해놓은 다음 J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녀에게 대신 아이들 감호의 역할을 당부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질식할 듯 답답해진 그녀는 저녁잠 많은 노모에게 잠든 아이들을 맡기고는 언니와 함께 살그머니 밤바다로 빠져나왔다.
쿵쾅 쿵쾅…….
부쩍 커진 음악소리가 찢을 듯 귀청을 때려온다. ‘서울 디스코 텍’… 어느 시골 장터의 곡마단이 연상되는 울긋불긋한 대형 텐트에 삐뚤삐뚤 장난스레 쓰여진 ‘서울’이란 글씨가 꽤나 정겹게 느껴진다. 그토록 끔찍하고 지겹게만 여겨져 도망치듯 피해온 도시가 그새 벌써 그리워지다니… ‘서울’이란 말에 까닭 모를 향수와 이끌림을 느끼며 그녀는 언니의 손을 잡고 요란한 소음이 진동하는 대형 텐트 속으로 몸을 들인다. 터질 듯 시끄러운 음악… 광란의 몸짓. 바다 내음 물씬한 모래 바닥에 임시로 가설된 원형의 무대가 있고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 물결치듯 한 덩어리의 군무가 일렁인다.
와아, 별세계가 따로 없네. 출입구 쪽 좁다란 목로에 자릴 잡으며 환한 얼굴로 그녀가 속삭인다. 아르바이트 학생인 듯싶은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기다린다. 맥주 둘. 마른안주… 천연스레 청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언니가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사흘 동안 너무도 힘들었어. 억압, 억압… 질식할 것만 같았지… 해만 지면 으레 답답한 방에 가둬놓고는 고작 빙고, 빙고 게임이나 카드놀이…돌아버릴 지경이었어. 첫날 아침 둘이 부두에 갔을 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해? 질린 듯한 낯빛이 되며 그녀는 얼굴을 찌푸려 보인다. 기실 그녀에겐 참으로 단조롭고도 따분한 사흘이었다. 동해에 가면 일출, 서해에 가면 낙조, 남해에선 해상관광… 하는 식의 J가 고집하는 판에 박힌 피서 일정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도착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첫날 아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히 동해의 일출을 봐야만 한다며 꼭두새벽부터 J는 가족의 단잠을 깨우며 해변행을 강행하였다. 연이어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그녀를 일깨워 그는 아침식사용 찌개거리를 구실로 다시 또 어장행을 재촉했다. 단순히 어장 구경을 한다기보담은 어장 견학, 어장 탐방이라 하는 편이 훨씬 더 적절한 행차였다. 그러나 미상불 잠이 덜 깬 상태에서나마 동이 트는 부두의 새벽 풍경은 진경이었다.
휘부윰한 우윳빛 안개를 가르며 서서히 입항하는 만선의 고깃배… 터질 듯 가득 찬 그물로부터 쏟아지는 넘치는 각종 해산물, 어패류… 뱃전으로 뛰어오르며 아우성치는 상인들. 부두를 진동하는 비릿한 생선 내음. 파닥파닥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부두의 아침은 도심에 찌든 분진을 일시에 흔들어 깨우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라보고 냄새 맡고 음미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심장의 생생한 고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끝없이 이어진 노점상의, 해수가 콸콸 넘쳐흐르는 해물 가득한 함지박 행렬을 지나 빠른 걸음으로 부두를 향해 다가가며 그녀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그러나 J는 그녀완 딴판이었다. 야외 학습을 나온 모범생처럼 긴긴 함지박 행렬마다에 일일이 시선을 멈추며 들여다보고, 물어보고 다시 또 들여다보곤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반복 행위를 계속했다. 한참씩 그렇게 이어지는 간단없는 행위에 조금 속도가 붙으려나 싶은 순간 마악 부두에 와닿는 고깃배로 시선이 가닿은 J의 발길은 다시 또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예외가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물코 마다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온갖 종류의 해물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목뼈가 부러져라 끈질기게 관찰하고 또 관찰하는 왕성한 탐구심을 보였다. 부두 한켠에 비켜서서 J의 그런 양을 망연히 지켜보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발끝으로 일없이 모래벌을 파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파내고 또 파내어도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막막한 모래벌이었다. 저 끔찍한 집요라니… 아득히 밀려오는 공허와 외로움에 그녀는 오르르 몸을 떨었다. 일정 대상과 사물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 대체로 느낌과 탐미 쪽에 가까운 것이라면 J의 성향은 확실히 탐구와 확인, 그쪽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의 언쟁이 오갔다. 이럴 줄 알았음 생물도감을 가져올 걸 그랬군요. 난 이만 갈 거예요. 혼자 실컷 연구해요.
여전한 집착으로 뱃전을 기웃대는 J를 남겨둔 채 그녀는 노점상 함지박으로부터 급히 몇 가지의 해물을 사들고는 민박을 향해 내달았다. 길눈이 어두워 몇 번씩이나 엇비슷한 골목을 헤집고 다닌 끝에야 그녀는 겨우 가족이 있는 숙소로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해는 어언 중천에 떴고 땀 흐르는 이마를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어시장을 향할 땐 두 사람이었으나 돌아올 땐 제각각인 우스운 꼴이었다. 아침상을 마련하고 모든 준비를 완료, 오직 찌개거리만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보기에 참으로 민망한 아침이었다.


음악이 바뀌었다. 텐트가 날아갈 듯 신명나는, 너무도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언니, 우리도 나가자. 시종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어느 한 순간 훌쩍 몸을 일으키며 언니의 손을 잡아 끈다. 아냐, 난 아무래도 이쪽이 편해.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언니는 동참을 마다한다. 도리없이 그녀는 홀로 자리를 털며 일어나 무대 위로 오른다. 더없이 가벼운 동작으로 곧 군무 속에 휩싸인다. 젊은이들 일색인 무대에서 그녀의 춤은 단연 돋보인다. 정체 모를 단순한 열정이나 격렬함만이 아닌 무언가 편안한 여유와 질서가 느껴지는 완만한 율동이다. 음악과의 혼연일체…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좋은 기분이다. 따분하고 너절한 일상에서 이만큼이라도 좋은 기분이 달리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춤은 점차 무르익는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조명 속에서 그녀를 향해 한 젊은이가 다가온다. 환한 미소에 짐짓 윙크까지 해보이는 퍽 과감한 접근이다. 숱 많은 터벅머리에 하얀 얼굴, 커다란 키… 그가 좀더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연다. 이곳에 올 줄 알았지. 내가 누날 모르나… 두 사람은 푸후, 마주보며 웃는다. 스무 살의 나이답게 K의 춤은 매우 현란하고 아름답다. 리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깃든 유려한 동작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춤이 매우 둔탁함을 깨달으며 그녀는 그만 힘이 빠지고 만다. 숨을 고르며 그녀는 K와 함께 무대를 내려와 그들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언니에게로 돌아온다.
위하여! 세 사람은 유쾌하게 건배를 올린다.
누나 결혼 행복해? 전부터 꼭 묻고 싶던 질문이었어. 요란한 음악 속에서 모처럼의 흔연한 기분에 허를 찌르듯 K가 돌연 질문의 화살을 던져온다. 행복… 행복… 그게 뭐지…….
동생으로부터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녀는 잠시 아연한 기분이 되어 말을 잃는다. 내 결혼은 과연 행복한가… 비로소 그녀는 스스로를 향한 생경한 물음에 잠겨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의 결혼이 과히 행복하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고 또한 자신의 결혼이 딱히 불행하다고도 생각되질 않는 모호한 느낌이다. 때문에 불행한 것 같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무감각한 상황이 바로 불행인 듯싶기도 하고, 또한 행복하다 느껴지질 않는 과민한 상황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는 아이러니 또한 희극이라 해야 할까, 비극이라 해야 할까. 그 역시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럼… 네가 말하는 행복한 만남이란 뭐니. 우선 네 생각부터 들어보자. 수세에 몰린 그녀를 구원하듯 그녀의 언니가 K를 역공한다. K는 답한다. 이상적인 커플이란 작은 일, 사소한 일에서부터 서로 마음이 맞고 정서가 합일되고 그래야만 한다고… 매우 진지한 얼굴로 K는 그렇게 역설한다. 반면 그녀의 언니는 결혼이 어디 한바탕의 놀이 마당이냐, 평생에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몇몇 좋은 날들을 빼고 나면 말 그대로 땀나게, 그리고 피나게 살아내야만 하는 사각의 링과도 같은 치열한 삶이 결혼의 실체라며 반론을 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편에도 쾌히 동감을 표할 기분이 아니다. 스스로가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 없음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심성 깊은 곳에 단단히 감추어져 좀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소위 그 이드id란 것이 K의 사고와도 일치하는 자신의 잠재된 성향이라면, 일상에서 늘 부딪치는 복잡다기한 자신의 평상심은 에고ego, 또한 언니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어쩌다 가끔씩이나 돌출하곤 하는 강한 이성적 사고와 의지는 자신의 초자아, 슈퍼 에고super ego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곳 피서지에 온 이래 그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자신의 마음을 지배해온 것이 줄곧 이드였음을 깨닫는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 설명할 수 없는…….
 모래밭의 텐트를 뒤흔드는 음악 소리 요란하고, 이상적인 커플과 좋은 만남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K도 슬그머니 무대 위로 사라져간다. 그러나 모래 바람에 후끈 날아오는 오존 내음 탓일까. 그녀의 마음엔 까닭 모를 불안이 싹터온다. 황망히 고개를 들어 디스코텍 실내를 휘이, 둘러본다. 얼핏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둥그렇게 뚫린 텐트 창을 통해 누군가가 힐끗 들여다보는 기척이 느껴진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희끄무레 어른대다가는 얼른 숨어버리는 한 남자의 얼굴… 분명히 눈에 익은 모습이다. 극히 짧은 순간의 어른거림이었으나 예사롭잖은 느낌에 그녀는 와락 가슴이 조여온다. 벌써 술자리가 파한 걸까. 하긴 민박에 남겨두고 간 아이들 걱정에 그리 오래 있진 못하리라 예상했었다. 친구와의 술 약속이 없었다면 오늘밤 역시 무덥고 좁은 방에서 빙고, 빙고를 외쳐대며 별 스릴도 없는 게임이나 보물찾기, 낱말 이어가기 등과 같은 지리멸렬한, 지독히도 따분하고 하품 나는 시간을 보냈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빠, 심심해. 우리도 캠프하자. 어둑해질 저녁 무렵 유치원에 다니는 예리가 J에게 그렇듯 아이다운 천진한 제안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그 의견은 종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극성스런 바닷모기로부터의 격리와 보호가 그 이유였다.
가족을 향한 J의 기우는 종종 보호의 차원을 넘어 감호의 단계로까지 발전함이 상례였다.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할 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 속에 자신의 팔길이 만큼의 반경을 정해놓고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 이상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말뚝처럼 버티고 서 있는 일, 해변의 간식으로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라면류는 입에도 못 대게 하는 일 등의 통제가 그에 속했다. 오늘밤의 일만 해도 그러하다. 친구와의 전작에, 음악소리 요란한 디스코텍을 스치다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녀를 발견한다면 얼큰한 기분에 호기롭게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줄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단지 그녀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한 후 그대로 곧장 가버리는 경직성이라니… 뚫어질 듯 텐트 창을 노려보던 그녀는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언니,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 예리 아빠가 왔다 간 것 같애…….
잠시 후 자매는 황황히 디스코텍을 빠져나와 민박촌을 향해 걸음을 옮겨간다. 그러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밭의 는적한 걸음이 여간 성가시질 않다. 다시금 눈앞엔 밤바다가 아득하다. 해안선을 따라 듬성듬성 이어지는 포장마차의 불빛이 묘한 정취를 불러일으키며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 중에서도 민박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빨간 지붕의 포장마차가 유독 눈에 띈다. 희미한 카바이트 불빛을 등지고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의 곁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다. 닿을 듯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술잔을 기울이는 남과 여. 짧게 깎은 스포츠 형 머리의 남자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다. 첫날 마을 슈퍼에서 만난, 둘째 날 회전그네에서 만난 J의 친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한 J의 술자리도 일찍 파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며 함께 있는 여자가 그의 부인이 아님을 확인하는 그녀의 가슴은 일없이 쿵, 내려앉는다. 짧게 마주치는 남자와 여자, 그 두 사람의 눈길이 밤바다의 조명탄보다 더 부시게 느껴져와 그녀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선다.
밤바다의 적막 탓일까. 남자의 뒷모습엔 아무래도 쓸쓸한 기운이 남아돈다. 카바이트 불빛에 흔들리는 남자의 눈빛엔 짙은 우울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가족과 함께 회전그네를 탈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무심코 던지는 농담에서조차 나름대로의 독특한 익살이 묻어나 주변을 환히 웃게 만드는, 극히 범상한 일인 듯하나 그리 흔치 않은 강점을 지닌 남자라 느꼈었다. 언행의 조용함으로 주위에 그 존재가 쉽게 부각되질 않는 J와는 매우 판이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 생생한 기氣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영향을 미치는 그런 성격이랄까. 우연히 그의 가족을 만나 회전그네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그네 안 탈 거야. 어어? 그럼 타는 사람은 뭐야. J! 너도 안 타? 와아, 졸지에 보모 됐네. 까짓것… 한번 타지, 뭐.
우아하고 기운없는 모습을 한 그의 아내가 끝내 그에게만 아이들을 맡기고 그네 타기를 거부하고 늘 점잖은 J 역시 그러하자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러나 다시 곧 활기찬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며 그는 흔쾌히 아이들을 데리고 멈춰선 그네를 향해 다가갔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 기구를 타는 일 따위의 유아적인 행동이 J에겐 그리 맘 내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엔 그녀 또한 하릴없이 그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아이들을 빈 그네로 데리고 가 자리에 앉히고 안전 벨트를 매어주고… 그리고 그녀는 아이들 옆자리를 찾아 그곳에 올라앉았다.
그가 탄 그네는 우연히도 바로 그녀와 나란한 수평의 위치에 있었다. 부웅… 이윽고 회전 그네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점차 더해가는 속도와 함께 허공을 휙휙 나는 듯한 짜릿한 부유감이 그녀의 몸을 감싸왔다. 뜨거운 여름, 핑핑 돌아가는 부신 태양, 푸른 바다, 백사장을 수놓은 오색의 파라솔, 까맣게 띠를 두른 인파, 우와 죽이누나… 그가 거침없는 탄성을 토해냈다. 그녀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에 따라선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객쩍음이었으나 그래도 그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잖음과 과묵, 공리와 절제의 미덕을 중시하여 늘 그런 쪽에 익숙지 못한 그녀로 하여금 소외와 자책, 외로움을 안겨주곤 하는 J에게선 전혀 기대할 수가 없는 면모였다. 성격상 그것이 딱히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쟁점을 떠나 그녀는 그가 지닌 그러한 호쾌함, 활력, 밝음 자체가 단지 유쾌하다 느껴질 따름이었다. J와 그의 친구… 그 두 남자에게 주어진 제반 모든 여건과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민박과 호텔로 구분되는, 가족을 위해 그들이 택한 숙소만 해도 그 점에서 결코 예외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밤바다를 등지고 낯모를 여인과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왠지 처연해 보임은 무슨 까닭일까. 나름대로의 곡절이나 연유야 있으련만 그늘짐, 시름, 침묵 등의 바윗덩이 같은 무거움, 보는 이의 마음을 가만히 한숨짓게 하는 그의 부인에게 드리운 어두움이 바로 그에 대한 해답이랄 수 있을까. 불현듯 그녀는 J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친구와 헤어진 것이 확실한 터, 지금쯤은 벌써 민박에 도착, 염려에 찬 얼굴로 잠든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겠지.
그녀는 좀더 걸음의 속도를 빨리한다. 마침내 저만치에 민박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침침한 어둠 속 노모가 민박 앞을 나와 서성이고 있다. 어쩐 일인가. 노모의 얼굴은 백랍처럼 창백하고 굳어보인다. 자매는 구르듯 노모를 향해 달려간다.
느… 느이들, 어딜 갔다 이제 오냐. 크… 큰일났다. 예… 리, 예리가 없어졌어. 자다 깨어보니 흔적도 없이 애가 없어졌지 뭐냐. 그나마 정 서방 일찍 와서 다행이지… 염려 말라 날 안심시키고는 급히 앨 찾으러 나갔다. 늬들도 어서…….
혼비백산한 노모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다가오는 자매를 향해 후려칠 듯 훠이훠이 팔을 내젖는다. 잠 자던 아이가 없어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예리… 예리가 없어지다뇨…….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혼미하여 그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을 수가 없다. 캄캄한 하늘이 꽈르릉, 일시에 무너져내리는 느낌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소피하러 갔나 싶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지 에미, 아빌 찾아나선 건지, 원 알 수가 있어야지.
무어라 더 이어지는 노모의 장탄식을 뒤로 하고 죽어라 그녀는 밤바다를 향해 뛰어간다. 예… 예리야…….
그러나 밤바다보다 더 까맣게 몰려오는 절망감에 턱까지 숨이 헉헉 차올라 그녀는 그만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겹겹이 밀려오는 검은 파도가 종적없이 아이를 꿀꺽 삼켜버리고 만 듯 그녀는 울음을 토한다. 공포와 절망에 곧 숨이 멎을 것만 같다. J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나. 황망 중에 얼마나 놀랐을까… 돌연 몸을 일으켜 밤바다를 향해 뛰어들며 그녀는 검은 파도 속으로 첨벙첨벙 몸을 담근다.
예리야…….
그러나 그녀의 시야엔 아무것도 없다. 젖은 몸을 휘청이며 그녀는 밤바다를 뒤로 하고 휘청휘청 모래밭을 걸어나온다. 이제 그녀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질 않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정지된 느낌이다. 조류의 흐름마저 멈춰버렸다. 허물어질 듯 그녀는 머리를 감싸안고 다시 모래밭에 몸을 던진다. 주위는 오직 어둠과 적막뿐이다.
안… 돼… 절대로…….
안간힘을 다해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귀에 꿈결인 듯 무언가 윙윙대는 소음 같은 것이 들려온다.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니 낡은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해변 구조대의 안내 방송이다.
긴급 안내 말씀 올립니다. 지금 이 시각 미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온 정예리라는 6세의 여자 어린이입니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밖에 나간 부모를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합니다. 보호자 되시는 분께서는 속히 본 구조본부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서울에서 온 정예리라는 여자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습…….
예리야… 아아…….
죽은 듯 모래밭에 박혀 있던 몸을 훌쩍 일으켜세우며 그녀는 환호에 몸을 떤다. 훨훨 팔을 내저으며 날아오를 듯 허공을 향해 한바퀴 맴을 돈다. 이어서 튕기듯 그녀는 구조본부 건물을 향해 달려간다. 확신컨대 그곳엔 분명히 J가 먼저 와 있을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이래 J는 아이들에게 높다란 망루가 있는 구조본부 위치를 알려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 길을 잃거나 위험시 신속히 그곳으로 갈 것을 거듭 강조해왔다. 그러한 그의 용의주도함이 예리를 찾을 수 있게 하였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일.
아이들을 키워온 것은 팔 할이 부성이었다. 늘 아이들 곁에 있으나 그녀의 마음은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 표표히 표표히 나돌았었다. 가슴이 미어져오는 회한에 망루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걸음에 점차 힘이 빠진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태엽이 끊기듯 그녀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선다. 괜찮아, 이젠… 홀연히 몸을 돌려 그녀는 자신이 향하던 곳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비로소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일제히 정지되어 있다 느껴지던 모든 소리가 다시 생생히 되살아난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그녀는 천천히 결음을 옮겨간다. 백사장 끝 저편에서 반짝반짝 오색등을 밝힌 놀이기구의 음악소리가 유난히 귀를 자극해온다. 오색 불빛의 화려한 원무에 이끌리듯 새털같이 가벼운 동작으로 그녀는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숨을 죽이며 그녀는 잠시 회전그네의 원무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네가 멈춘다. 띄엄띄엄 눈에 띄는 빈 자리를 찾아 나비처럼 사뿐히 빈 자리엘 올라앉는다. 지표를 떠나 서서히 공중으로 오르기 시작한 그네는 점차 회전의 속도를 빨리한다.
빙글 빙글… 핑글 핑글…….
이윽고 휘황한 회전의 시간이 펼져진다. 회전을 따라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 현란한 오색등, 광활한 밤바다, 검은 모래밭… 그 모든 것이 하나 되어 돌아간다. 하나 되어…!! 환상과 희열은 찰나에만 가능한 것. 지금은 바캉스vacance. 이곳은 피서지. 빈 자리, 비어 있는 곳이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온전히 비어 있고 싶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그네는 계속 빠른 회전의 제 속도를 유지하며 상승한다. 상승, 상승… 오직 상승의 순간일 뿐이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