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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기획탐방/배아라/석모도에서 낙조를 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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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기획탐방/배아라/석모도에서 낙조를 건지다
석모도에서 낙조를 건지다
배아라
수화기 너머로 박 편집장의 섹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만 기다리면 도착한다는 들뜬 목소리다. 밤새 문을 흔들어대던 바람도 지친 듯 스러져 잠이 들고, 따뜻한 햇살이 내려와 어깨를 다독여 주는 포근한 아침이다.
2019년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 설명절도 지나고 리토피아문학회와 막비시동인의 신년 워크샵 및 아라탐방 일정은 1박 2일(1월26일~27일) 강화 석모도에서 진행된다.
들뜬 분위기는 탑승 내내 식을 줄 모르고 시간은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 정오쯤에 강화 품에 안겼다. 그렇게 다다른 황제가든에서의 점심약속. 허문태시인과 남태식 시인은 이미 도착해 반갑게 우릴 맞아 주셨고 정미소 회장님과 일행들은 곧 도착한다고 한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강화도는 조선시대 말엽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철저하게 유린된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를 구실 삼아 프랑스가 침범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를 빌미로 미국이 침범한 사건이다. 침략한 나라와 이유는 다르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외에도 약탈과 환수의 과정이 꼭 닮았다. 프랑스는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조의 의궤와 고서를 약탈했고, 미국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외규장각의 조선왕조 의궤는 2011년 14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고, 수자기는 136년 만인 지난 2007년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돌려받은 기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숨겨진 이면에는 조선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라 불리는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가슴에 새겼던 조선 효종이 북벌계획의 하나로 설치하기 시작해 숙종 때 이르러 완성한 5진 7보 53돈대다. 그중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다. 함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은 조선의 화포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초지진을 내준 이튿날 덕진진과 광성보도 함락되었다. 어재연 장군 휘하 천여 명의 조선 관군은 부상으로 오도 가도 못한 몇몇을 빼고 모두 전사했다. 조선군 진영에 내걸렸던 수자기는 성조기로 대체되었다. 신미양요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숙연해진다. 지금도 초지진의 성벽과 소나무에는 전투 당시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초지진은 덕진진, 광성보와 함께 강화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답사여행의 필수 코스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에 이르는 강화나들길의 2코스 호국돈대길(17km)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침략하는 장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펼쳐진 미군과 조선 관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미양요를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실물 크기의 수자기가 걸려 있어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이처럼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를 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과 540여 개의 문화유적지가 분포해 있으며, 수도권에서 1시간 반 거리로 강화대교나 초지대교를 건너면 쉽게 갈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강화에 왔으니 요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조양방직카페를 우선 둘러보기로 했다. 오래된 방직 공장과 세월의 때가 묻은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는 조양방직은 강화 최초의 인견공장이다. 일본주택 건축양식에 한옥의 미를 가미한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강화갑부였던 홍재묵. 재용 형제가 1933년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하였는데 이는 1936년 서울의 경성방직보다 3년이 빠르다. 조양방직은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품질의 인조직물을 생산하면서 강화가 섬유산업으로 널이 알려지게 되었다.
2013년 티비 드라마 “백년의 유산”에서 조양장직 사무실이 옛날 국수집으로 나오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허름한 공장 입구를 들어서니 빨간 공중전화 박스 세 대와 옛날 버스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채 그들의 시계는 그렇게 정지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누구에게 마지막 통화를 했으며 마지막 손님으로 어떤 사람을 어디에 내려놓고 임무를 마쳤을까. 쓸데없는 궁금증을 뒤로 하고 황소 동상이 보이는 곳으로 걸었다. 조양방직의 전성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하고 독특한 금고가 있는 곳이다. 공장이 한 창 일 때는 일꾼이 돈을 지게로 져서 은행까지 날랐다 한다. 현금과 금괴가 가득했던 좋은 기억을 되새기며 부자 되는 기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쓰여 있는 문구가 보인다. 필자도 금고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작은 별채로 이루어진 건물로 들어가니 갤러리처럼 그림과 조형물을 전시해 두었다. 또 다른 곳에는 예전 전기실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미싱도 전시되어 있다.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돌아다니다 지인도 만났다. 정말 규모도 대단하지만 사람들도 어지간히 많다.
방직기 소리가 요란하던 공장들은 시간 속에 갇혀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그 옛날 직물을 짜며 바삐 움직였을 그녀들의 노고와 애환이 묻어있는 기다란 작업대는 커피 테이블로 바뀌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계획하고 평온과 영감을 얻어가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뾰족뾰족 옛 공장의 외관을 그대로 살린 지붕들. 이 지붕의 모양이 조양방직 카페 로고의 모티브다. 커피 주문도 인내가 필요하다.
꼬리를 길게 문 대기자들 20여분을 기다리고 서야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기다린 시간만큼의 달콤한 순간들을 홀짝거리며 사진을 찍는다.
석모도는 강화도의 서편 바다위에 길게 붙어 있는 작은 섬으로 서울 도심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다. 윤슬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한 낮의 바다 위 석모대교를 건너보라. 짜릿한 오감이 몽글몽글 윤슬을 헤집고 물고기떼를 유혹한다.석모도는 강화군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했지만 2017년 6월 석모대교가 개통되면서 통행료가 없는 다리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대신 주말에는 교통체증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강화도는 (강화8경)1)과 더불어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전등사, 갯벌 체험관 등 곳곳에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다.
강화군 서부에 위치한 석모도에는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의 세 개의 산이 있어 삼산면이란 지명이 생겼는데, 강화도 보문사는 상봉산과 해명산 사이에 있는 낙가산落伽山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예로부터 우리나라 3대 해수 관음성지” 중 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 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발원을 하게 되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있는 절 입구 주차장에서 상가들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10 여분 숨 가쁘게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네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건축물과 다르게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일주문이라고 한다. 이 일주문은 문 밖의 사바세계와 문 안쪽 부처님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문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했다고 하며 이 마을에 살던 한 어부가 그물을 쳤다가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건져 올렸는데 꿈에 나타난 스님이 일러준 대로 현재의 석실에 봉안했다는 전설이 있다.
석실 입구 오른쪽으로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 옆 화단에는 보문사 숭려와 수도사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했던 보통의 맷돌보다 2배 정도 규모가 큰 조선시대의 맷돌이 있다.
석실 앞쪽 큰 바위틈에는 수령이 6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 6.25 전쟁 중에 죽은 것 같이 보였으나 3년 후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되었다.
천인대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도 둘 다 수령이 약 300년이나 되고 둘 다 16미터 내외, 둘레는 4.8미터 정도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노목들의 강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며 와불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와불전은 천인대 위에 조성된 전각으로 전각 내부에는 13미터의 열반대 위에 열반 당시 모습의 석가모니가 10미터 신장의 석상으로 모셔져 있다. 열반대 주위로 1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주위를 돌며 참배도 가능하다.
오백나한상은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어 웃음을 준다. 나한님의 좌대에는 봉안에 동참하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문사의 중심 전각인 규모가 웅장한 극락보전 앞에서 단체 사진부터 찍었다.
극락보존 앞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졌으며, 제작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었다고 전한다. 이 범종은 1975년 古육영수 여사가 회주하여 모셔진 것으로 유명세를 알리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부쩍 늘었다.
절 마당에서 한 10여분 소원이 이루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면 눈썹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바위에 조각한 마애보살상이 있는데, 이 마애보살상은 1921년 표훈사의 스님 이화응이 당시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높이 9.2미터 폭 3.3미터 불상이다.
또한 석모도 민머루해수욕장은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부근에는 맛집도 많이 몰려 있다. 민머루해변, 어류정항은 먹을거리도 많고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다. 민
머루해변은 백사장의 길이가 1㎞, 폭은 50m 정도이며 조개와 미생물이 풍부하고 강화 밴댕이가 잡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교동도도 차로 갈 수 있는 섬이다.
석모도의 겨울은 산과 바다와 갯마을과 섬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며 태연하게 봄을 기다린다. 윤슬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한 낮의 바다를 보는 석모대교를 건너보라. 짜릿한 오감이 몽글몽글 윤슬을 헤집고 물고기떼를 유혹하는 것 같다.
소원을 빌었으니 얼른 발길을 돌려 낙조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전망대카페로 이동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와 차량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전망대카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커피와 차를 마시며 낙조를 보기위해 적당히 뜸을 들이고 있었다. 태양이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준비 운동을 하자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파노라마처럼 연출된다. 태양은 덩달아 신이 난 듯 빠르게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그 여운은 오랫동안 서성이며 바다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여운들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바쁘다.
낙조 그 잔잔한 여운을 뒤로 하고, 어둠을 가르며 석모도 자연휴양림 숙소로 향했다. 석모도 자연휴양림은 바다와 숲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멋과 향기를 느낄 수 있고, 각종 편의시설과 다양한 편의 공간을 제공하여 현대인들의 일상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석모도 자연휴양림은 2011년 개장 되었고, 콘도형인 1차 산림문화휴양관, 독채 통나무집 형태인 2차 숲속의 집으로 나뉘어 있으며 총 200여명 수용 가능한 규모로, 4인실부터 22인실까지 여러 인실로 구성되어 있어 객실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부대시설로는 100명 수용이 가능한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체육활동이 가능한 야외 족구장과 바비큐 시설도 있다.
입구에서 키를 받아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이동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식사부터 준비했다. 석모도 휴양림 2층 207호실 큰 방으로 다들 모여 회와 맛난 음식들이 침샘을 자극한다. 다들 하루의 여독을 술 한 잔에 따라 마시며 출출했던 배를 채운다. 막비동인들의 올 한해 알찬 설계를 그리는 달콤 짭쪼롬한 시간이 이어졌다. 장종권 선생님의 지휘 아래 1년 계획이 일사천리로 계획표는 안성되었다. 기다리던 2부 시간은 어둠을 살살 풀어 헤치며 동이 터오를 무렵까지 이어지다 잠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상봉산을 오른다. 자잘한 암석이 많아서 조심조심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까지 2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된다. 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둘레길을 돌아 내려와 짐을 들고 주차장으로 모였다. 그렇게 인천 서구 청량골에서 점심를 먹고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1)강화8경 :갑곤돈대.연미정.적석사.광성보.초지진.전증사.마니산.보문사
*배아라 201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떠도는 잠』. 《아라문학》 편집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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