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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권두칼럼/백인덕/아직은 반짝이는 ‘함의含意’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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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권두칼럼/백인덕/아직은 반짝이는 ‘함의含意’들
백인덕
아직은 반짝이는 ‘함의含意’들
1.
길에서 저녁을 만났던 기억이 희미해졌다. 저녁에 집을 나서거나 돌아오지 않는 생활을 너무 오래 지속하고 있다. 조금 출출하고, 약간 쓸쓸하고, 그 보다는 열 배쯤 간절하게 독한 술 한 잔이 못내 그립던, 그런 느낌과 감각을 잃어버렸다. 불어난 체중은 걷기를 귀찮게만 하고, 한층 격렬해진 도시의 소음은 애써 가라앉힌 불안과 공포를 서슴없이 휘저어 떠오르게 한다. 나날이 악화하는 대기 질은 저녁의 잔별을 올려 볼 엄두조차 낼 수 없게 하고, 흐려진 시각은 휘황한 네온사인을 보는 게 아프다. 이제 저녁은 되도록 어둡고 조용하게 잠을 청하거나, 인터넷을 서핑 하는 또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2.
세계의 불평등의 심화와 그걸 해결해야 할 인적 자원의 고갈 위험을 간파한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호소가 새삼 저녁을 눈물겹게 한다. “우리 아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우리가 제 손을 더럽히며 우리의 변기를 닦는 사람보다 열 곱절 많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 ‘제3세계’에서 우리의 키보드를 조립하는 사람보다 백 곱절 많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먼저 산업화된 나라가 아직 산업화 되지 않은 나라보다 백 곱절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저 자신의 운과 다른 아이들의 운이 그렇게 다른 것이, 그 불평등이 ‘신의 뜻’도 아니고 경제적 효율에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도 아닌 필연적인 비극임을 어릴 때부터 배워 알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누군가 과식하는 동안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으려면 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궁리하기 시작해야 한다.” 최소한 이 사회는 실패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실패가 아니라 그 이전 세대들의 실패고, 회복 가능한 작은 실패가 아니라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전면적 실패하는 점이다.
3.
오랜만에 저녁을 배회했다. 파블루 네루다를 아직도 기억하지만, ‘시가 내게로 왔다’를 암송하거나 꺼내 읽지는 않는다. 이제 영감Inspiration은 휴식만큼이나 어렵고, 행복은 불행의 짧은 휴지休止일 뿐이라서 울어 행복하던 순간의 울음마저 고역이 된 지 오래다. 길은 도로를 피해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으로만 길게 이어져 있고, 사람은 도로 근처에서만 서성인다. 대부분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전화를 하거나 반대 방향의 도로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시장은 없고 주차 공간이 넓은 성전聖殿이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개미지옥에 떨어진 개미처럼, 아니 새 꽃밭을 발견한 벌 떼처럼 윙윙대는 날개소리가 저녁 하늘 높이 쏘아 올라간다. 시는 아직도 속죄와 용서를 지시하고, 구원과 새벽을 잉태하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았지만, 위험이 또 다른 위험으로 대체되고 구원은 끝없이 지연된다.
4.
현대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를 쓴 작가, 아니 현대인에게 가장 거추장스런 ‘가면persona’을 선사한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말했다. “사람은 제 조부모에게나 쓸모 있었을 것만 배운다. 삶을 제대로 사는 방법은 죽은 자에게만 가르칠 수 있다”고. 교육은 미래를 예견하거나 생성하지 못한다. 창발성emergence은 불현 듯, 미지에서 솟구치는 성질이다. 형태로 파악할 수도 끌고 가지도 못 한다.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이지 않은 시가 아니라 지금 막 솟아난 시다. 시는 작고 힘이 없지만, 시의 가벼운 날개에서 세상을 떼어내기란 태양을 불어 식히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지상의 내리는 저녁의 걱정 중, 그나마 아직 반짝이는 것은 ’시적 고뇌‘ 뿐이다. 사소함의 날들이 시시하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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