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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특선/박혜연/나무의 수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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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3회 작성일 20-01-2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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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신작특선/박혜연/나무의 수화 외 4편


박혜연


나무의 수화

─갑사*를 오르며



몸짓이 좋다
소리가 되어 귀에 꽂히는 말보다
모양이 되어 마음에 들어오는           
너의 몸짓이 좋다


너는 먼저
새들의 하루를 조용히 쓸어주고
너는 먼저
허공 중의 하늘을 받쳐준다
너는
쓸쓸한 이마를 짚어주며
가만 옆에 와 걷는다


소리 없이도 세상 모든 말인 너
월인석보에 새긴 부처님 말씀처럼
만리 밖 눈에 보는 듯
천년 전 귀에 듣는 듯
연두빛으로 번지는 너는
갑사 오르는 길을 환한 봄날로 돋아나게 한다


길을 채우고
하늘로 뻗어가는 너의 무한한 말


너무나 조용해서, 천지간에 가득해서


온몸으로 속삭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그 길에서 들었다


    * 충청남도 계룡면에 소재한 절. 훈민정음 반포 후 새겨진 월인석보 목판 보관.





선운사, 송악



저것은 푸른 방이다


어미 나무 커다란 밑둥에
공기뿌리 내밀어 터를 잡고는
벼랑 같은 날들에 못질을 하고 있다


푸른빛 새어나오는 곳에
달빛 머물 창 하나 내걸고


두 주먹 불끈 쥔 채
바람의 날개 위에
단단한 망치질로 기둥을 잡아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쏟아지는
풍경소리 독경소리는 축도와 같아서


벽을 감싸고 감싸
사나운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벽 쌓고 있다


움켜쥔 주먹도끼 하나로
길 없는 길을 걷고 걸어


벼랑 같은 세월이 나의 길이었다고
저 허공 위에 쾅쾅
푸르게 우뚝 선 방 하나 만들고 있다





통도사의 하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짧은 생으로는
가늠조차 힘든 나라


일주문을 통해 들어온
인연에 목매인 능소화도
신성을 닮고 싶은 연꽃도


청아한 독경 소리로
부처님을 만나는 곳


영축산 넘어 온 바람도
금강계단 앞에서 깊게 고개 숙인다


하로전 중로전 거쳐 상로전에 도착한 중생들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을 통해 적멸보궁에 든다


시작과 끝이 깊고도 넓은
부처의 나라에서 깊고 푸른 집 한 채 얻는다





그리운 방



밤늦도록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방이 있었다
발과 발을 포갠 이불 속에서
막내에게 돌아가며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순한 형제들이 누워있던,
그런 방이 내게 있었다
이른 저녁부터 내린 어둠 위로 둥둥
별들이 떠다니며 은하수가 흐르던 방
밤 깊도록 맨발로 그 강을 건너면
온몸에 별들이 박혀 와
불을 켜지 않아도 서로를 환하게 밝혀주던 방
외딴방*의 고독과 좌절을 밟고
커져가는 방의 침묵을 거쳐 오는 동안
시린 내 발을 녹여주던 것은
작은 그 방의 온기였으니
가을 낙엽처럼 
바람 부는 길 위에서 홀로 흩날리는 날이면
가만 그 방을 열어본다
가만 이불을 들춰본다
그러면 그 안에서 옹기종기 이마를 맞댄
맨발들이 환하게 떠오른다


신발을 벗은 내 발이
그 방에서 순한 이마를 맞대고 하루만 살겠다 한다


    * 신경숙 소설 제목.





피아노



부드럽고 다정한 저음을 밟고 오는 저녁


산등성이 따라 은빛 발자국 남기는
억새와 들국의 낮은 허밍소리 들렸다


노래 속에서 살던 아름다운 것들
바람과 손을 잡으니


나의 몸은 노을을 밟고 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운율이 되었다


포화 속에서 울려 퍼지던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손가락이


흩어지고 흩어지던 생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모았던가


우리 곁을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과 강물과 꽃잎들


그 가벼운 걸음 사이에서
영원을 건너는 이야기


흩어졌던 손가락이
저 석양 아래서 한 몸으로 춤추며


우리의 이야기를 구전 시킨다
허밍 소리 석양처럼 붉다





*박혜연 200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활주로』. 여수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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