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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김길나/비만의 전성시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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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김길나/비만의 전성시대 외 1편
비만의 전성시대 외 1편
김길나
닫힌 입안이 캄캄하다
어둠 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샘 속을 떠도는 푸른 별, 닿지 못해 깜빡이는 그리고 고양이 눈, 꽃의 비애가 방산되는 또 일상의 무의미에 묵비권을 행사하고 생시를 돌리는 동근 사발시계 이런 허기진 것들이 녹아 고여 입 속의 샘이 밥을 부르지 조난 당한 살 토막에 생피를 부어 넣은
선짓국이 끓고 도마 위에서 칼질 당한 생이
불판에 누워 구이로 바뀌는 동안,
순수 청색지대의 푸성귀들은 맵고 짠 수난의
적색 지대에서 벌써 숨이 죽었다
밥상이 차려지고 닳은 밥상 모서리로 오래된 바람이 휘고 사람의 구멍에서 나오는 공허는
그 구멍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허기라고 먹어도 배고픈 밥이 거듭 식욕을 부추기고
군침이 도는 우리의 나날,
비상 신호가 켜진 중부지대에서
허리가 사라진다
빵빵히 부풀어 오른 배로 말하면,
가상 임신 중이라 하고
비만의 전성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무사한 오늘
오래 전에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도 모르게
나 없는 심장이 펌프질을 하고
얼굴 없이 팔다리가 생겨나고
‘나’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나 없는 뇌세포들이 생겨나 가지를 치고
느닷없이 한 순간, 아슬아슬
그 우연의 한 순간,
나 없이 생명으로 발생된 나는
완성 자동화 시스템을 스스로 갖춘
DNA의 작품인 나는
나 이전의 수만 광년의 아득한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해명조차 없이
생명 프로그램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일회적인, 혹은 단절된 나는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던 ‘나’가
어머니 밖으로 나온 ‘나’ 라는 나는
살아온 시간만큼 낯익은,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나는
나이기도 하고 나 아니기도 한 나에게
생일인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나는
*김길라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 『시간의 천국』. 산문집 『잃어버린 꽃병』. 순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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