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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이희수/목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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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이희수/목리 외 1편
목리 외 1편
이희수
낙우송 서 있던 자리가 휑하다
베어진 자리에 나뭇결만 남았다
위연륜爲年輪이 없음을 다행이라 생각지 않는다
내내 안온했다는 것이 왠지 좀 싱겁지 않은가
생은 거듭되는 파도의 도돌이표
나는 한 마리 물고기로 해마다 옆구리에 줄무늬가 선명해질까
벌목되기 전 나무의 생애가 뿌리그루에 출렁인다
거듭 거듭 사계절을 제 속에 새기며
벌목되어서야 전 생애를 들어낸다
아주 죽었다 하지 마라
예봉산 동쪽 오르다 보았다
뿌리만 남은 파면목리波面木理가
싹을 키우고 있다
구로동의 봄
관절의 뼈마디와 핏줄들이 툭툭 붉어졌다
박 반장은 늘 장미 담배를 입에 물고 산다 입에서 장미향 연기가 솟았다 이 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주유소 간판을 전국에 시공하러 다니는 책임자다 갓 입사한 나는 수십 개의 형광등을 총총히 고정하는 작업을 하곤 하였다 박 반장은 작업자들을 몰아쳐 시멘트 바닥에 툭 솟은 볼트에 구멍 뚫린 ㄱ자 파이프 밑바닥을 꽂아 넣어 기둥을 세우는 일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억세고 힘든 작업에서 작업자들은 손가락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빼고는 늘 찬바람 흙바람 부는 거리가 우리 일터였다 시커멓고 광대뼈 툭 불거진 얼굴로 우리들을 호되게 다루는 박반장, 수십 개의 형광등이 박힌 LG 혹은 SK로고가 박힌 건물 위 대형프라스틱 주유소 전광판을 ㄱ자 쇠기둥에 연결하자 어둠이 물러갔다
어둡고 캄캄한 우리 주위가 주유소 간판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주유소 부근을 지나가는 무표정한 얼굴도 낱낱이 다 읽혔다 오늘은 광명시 어제는 오산 주유소가 불 하나를 더 밝혔다 곁꾼으로 불려 다니던 6개월, 밑바닥의 시간은 더디 흘렀다 박 반장은 ‘국도광고(주)’ 금실 박힌 작업복을 영예로운 훈장처럼 입고 출퇴근을 하였다
우리 옆, 세탁공장 굴뚝에서 누리끼리한 연기가 눈물처럼 솟아나곤 하였다 구로동 봄, 1985
*이희수 2007년 《시와정신》 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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