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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최혜리/네 눈이 저기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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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최혜리/네 눈이 저기에 외 1편
네 눈이 저기에 외 1편
최혜리
물살에 감겨 물살이 되어 얼음의 시간을 향해 떠내려가는 우리 아니, 소용돌이 속에 나는 혼자 있고 발끝에서 한 올씩 풀려나가는 음악, 우리는 허우적거리며 겨우 숨 쉬는 입술을 가졌지 은빛 정어리 떼와 함께 몰려왔다가 유리처럼 부서지는
너, 흩어지는 네 몸 모든 조각들이 눈부셔서 나는 피 흘리고 피 냄새가 저 깊고 검은 물을 깨우기 전 두 다리를 퇴화시켜 지느러미를 얻었지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데 우리는 물에 잠겨 부레가 되어가는 심장에 산소를 채우느라, 아홉 손가락 사이에는 다른 다리를 끼고 검은 길을 만들기로 했다 손이 지나간 곳에는 파랗게 또는 검게 또는 빨갛게 변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너를 쫓아가는 게 좋았지 물속에서 허리에 내 목숨을 매달고 헤엄치던 너는 정말 멋졌는데 너를 따라 물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너는 거기 없고, 너를 찾던 나는 코르크마개를 그만 열고 말았지 유령처럼 낯선 울음이 들려오던 그 구멍이 실은 세상을 빨아 삼키는 단 하나의 입이었을 줄이야
흐물흐물해지는 꿈을 꾼 적이 있어 연체동물처럼 몸이 잔뜩 늘어질 수 있는 흐르고 싶던 날들이 있어서 바닥에 뉜 모든 것을 삼켜본 적이 있다 나는 걸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을 살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그해 여름도 물속에서 보냈지 수압을 견디느라 귀 막고 눈 감은 채, 산소통을 메고 내려오는 전도자들을 피해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어 바다의 끝이 어딘지 이 세상과 내가 함께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네, 눈이 저기에
상처
치매가 인간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치매가 인간의 아픔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거울 속으로 치매들이 누떼처럼 달려들 때, 치매들이 물컹한 똥덩어리를 거울 속으로 집어던질 때,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행위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치매들이 있어
*최혜리 2007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아직도 부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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