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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강시현/늙은 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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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32회 작성일 19-07-1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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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신작시/강시현/늙은 중 외 1편


늙은 중 외 1편


강시현



더워지기 전에 바랑을 지고 찾아왔다
초인종 없는 문을 열며 목탁을 두드렸다
기와집 아래 중들의 난투극과 술집과 2차와
뒷목에 잡힌 삐져나온 목살을 떠올리며
티벳 설산의 퀭한 눈을 한 흑갈색 승려들을 생각했다
더 이상 시주를 하지 않는 나에게
봉지 커피 두 잔을 거푸 시켜 마시고는
내게 남은 여름을 가지고 사라졌다
출출해져 막걸리 한 잔이 떠오르며
가을비가 우람하게 쏟아지던 날
창백한 화분을 처마 밑에 내놓아 비를 마시게 하려던 무렵
땀냄새 풍기며 떨리는 손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묻지 않아도 나는 두 잔의 봉지 커피를 내밀었고
그는 햇빛 넉넉한 날 마당에 펄럭이던 낯익은 빨래들처럼
내 마음의 빨랫줄에 단풍잎 같은 서늘한 선문답을 몇이고 널어놓았다
약속 같은 거 없이도 꽃은 피고 또 지듯
더 저물기 전에 산 사람은 어디론가 스며들어야 한다
언제 다시 오마는 말은 버려야할 집착의 파편 쯤
밀짚모자에 가사에 목탁과 떨리던 손을 거두어
정시에 떠나는 열차처럼 무언가를 황급히 잡아 탈 요량으로
목탁도 한 번 쳐주지 않고 빗속의 소실점이 되었다





어둠의 물에 오래 적신 것들은 새벽냄새가 났다



근근이 남의 땅뙈기를 부쳐 먹는 빈농으로
새벽부터 슬픔을 경작하던 바다새들은
섬 쪽으로 부리가 꺾여 죽었다
빈 하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날개는 이제 너무 무거웠고
몰래 뿌린 어두운 뼛가루를 커피처럼 저어 마신
검푸른 이랑에선 따뜻한 눈물꽃 두 송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안개 속 섬들은 뭉치지 못해 끝내 외로웠다
물결은 밤새워 연신 섬의 아픈 가슴팍을 때리다가 동이 트면 잠이 들었다
죽은 자가 감춰둔 일기장을 펼칠 때처럼
어둠의 물에 오래 적신 것들은 새벽냄새가 났다
마음이 먼 것끼리는 서로 귀한 약속을 던지지 않았고
먼 어둠을 건너온 옷자락에선
깊은 속을 뒤집어 보인 차가운 바람 냄새가 펄럭였다
가장 훌륭한 재판관은 자신의 어둠 속에 있는데
지치고 비뚠 입술은
시원한 새벽의 판결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외로움 때문에 다가간 것들은 꿈속의 꿈같이 잘 부서졌고
화끈거리며 빨리 술이 올랐다
어제의 피로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잠 설친 아침이 굽은 등을 하고
어둠의 폐기물 더미를 건져 올리는 것을
붉은 입술의 늙은 등대가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마지막엔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어둠을 먹어본 것들은
본능으로 토해낼 줄 알았다
여태 아침이 새벽을 거르는 일은 없었던 것처럼
어둠의 물에 오래 적신 것들은 새벽냄새가 났다
나이 든 바다새들이 털 뽑힌 날개를 검푸른 이랑에 버린 후
바람의 허기로 가득 찬 젊은 새들이 킥킥거리며
슬픔의 물컹한 덩어리들을 수확하고 있었다





*강시현 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태양의 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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