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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단편소설/최민초/달빛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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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단편소설/최민초/달빛 소나타
달빛 소나타
최민초
‘설說마실’, 소설가 지망생들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있다.
그날은 으레 누군가의 합평 작이 한바탕 매타작을 당하고, 그 뒤끝은 대부분 쓰라리기 마련이다. 혀끝에 칼날을 달고 신랄하게 비평하고 그날의 합평 작을 도리깨질 하던 회원들도 막상 당사자 입장이 되고 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제대로 된 소설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거침없이 평하지만 때로는, 그 도道가 지나쳐 자칫 인격을 매도하는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위험한 그네를 탈 때도 있다. 합평 작을 낸 당사자도 그 맷집이 단단해져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막상 쓴 소리를 듣고 보면 속이 좋을 리 없다.
오늘 홍규의 합평 작은 문제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주인공이 왜 혀를 잘리면서까지 미각味覺에 집착해야 하는지, 그 주제가 형상화되지 못했다고 날카로운 비평을 받았다. 주제가 집착인지 미각인지 첫사랑인지 모호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왜 하필 표절 시비 작품이냐, 더구나 제목까지 같고 보니 작가 의식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찻집 벽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분위기는 여전히 묵지근하게 가라앉아 있다. 일곱 명의 회원들은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불쑥 입을 연다.
-오늘 밤 기차를 타는 건 어때?
그는 아마 분위기를 바꾸어 볼 요량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맞장구를 친다.
-무창포 어때? 무창포.
그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싶었을까.
오양임이 반짝 생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반응한다.
-어, 거기? 바다가 갈라진다는 무창포?
-좋지. 바다가 갈라질 때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자조적으로 읊조린 진호는 어쩌면 서하진의 ‘제부도’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모세의 기적을 타고 바다를 건넌다? 오호! 신선한데?
-콜! 미투! 굿 아이디어!
과장되게 반응하는 일행의 모습이 어쩐지 간절하면서도 처연하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무창포를 가든, 이곳 인사동에 남아 있든, 혼자만 아니라면 괜찮다. 나는 오늘 밤 혼자 있는 게 싫다. 3일 전, 나는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받았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는 수시로 내 혼을 갉아댔다. 그녀의 목덜미에 찍힌 점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향했던 적이 있었을까. 나는 한낱 내 친구의 대역에 불과했던 것일까.
무창포 행이 흐지부지 되자 정애가 일행을 부추긴다.
-뭐야? 끝이야? 말이 나왔으면 매듭을 지어야 할 것 아냐?
진호가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낸다.
-콜! 칼을 뺐으면 찔러라도 봐야지. 안 그래?
오늘 호되게 당한 홍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아, 시발 가자구. 가! 가면 되잖어?
진호가 홍규의 뒤통수를 빡 갈긴다.
-잇신발눔이 왜 용감하고 그러세요? 무창포행 차시간이나 알아보세요.
기차를 타고서야 일행의 표정은 조금씩 활기를 띠고 대화는 다채로워진다. 문학, 영화, 연극, 그림, 음악 이야기에서 정치로, 경제로, 산을 넘고 골짜기를 굽이돌아 몇 구비의 능선을 넘나들더니 요즘 뉴스로 뜨거운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다.
밖에서 사 들고 온 김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면서 일행은 Y담으로 넘어가 왁자하게 떠들고 웃었지만 내 마음은 구멍이 숭숭 뚫린 듯 휑하다.
무창포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쯤. 일행은 주인에게 방 한 개만 쓰겠다고 떼를 썼다. 회원들 대부분은 주유소나, 편의점 알바, 음식배달 또는 일일 잡역부로 일하면서 소설에 목을 매달고 있었으므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어쩌다 돈이 생긴 회원이 소주를 사면 감격해서, 혹은 미안쩍어 뒤통수를 긁적대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무창포 행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횡재다.
3, 40대 남녀를 죽 훑어 본 숙박업소 여주인이 하나, 둘, 싯, 닛, 일행을 세어보다가 가재미눈으로 묻는다.
-츠녀 총각이 몽땅 한 방에서 밤을 샌단 말여?
각자의 주머니 사정을 빤히 아는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네! 합창한다.
-혹시 츠녀총각이 단체로다가 요 요런 거, 뭐 요상한 거 하는 거 아녀?
중년여자가 두 손바닥을 비비는 시늉으로 야한 손동작을 해 보이자 오양임이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넉살좋게 받아 넘긴다.
-아유, 아줌씨는 워찌 그케 눈치가 빠른지 물러.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쬐께 눈 감으뿌면 헐씬 멋찔틴디. 잉?
가난한 주머니를 각출하는 그 번거로움은 늘 오양임이 감당하곤 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술을 사고 시간과 이야기로 바꾸는 역할도 번번이 그녀의 몫이다.
일행은 바닥에 비스듬히 눕거나 벽에 기대거나 화장실을 가느라 분주하다.
나는 일행에게서 슬쩍 빠져나온다. 어둠 속에서 파도만이 규칙적으로 철썩철썩 뒤채인다. 그녀는 정말 페루행 비행기를 탔을까.
파도의 울음에도 나는 별로 위로받지 못한다. 바다에 길이 열려 섬 저쪽으로 걸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바다 속으로 침잠될 수 있다면, 나는 그러고 싶었다.
친구의 장례식 1주기부터 7주기까지 나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내 부축을 받으며 휘청거리던 그녀의 내면이 나에게로 건너오던 알 수 없는 열기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질긴 끈이나 탯줄 같은 것으로 연결된 어떤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향기로운 샴푸로 머리를 감고 천천히 말려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의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왼쪽 귀 아래 목덜미에 찍힌 검은 점이 클로즈업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녀의 맨발가락들이 불안하게 옴쭉거리고 평소 그녀가 그토록 경멸하던 남편의 등 뒤로 쏙 숨어버렸다.
나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어떤 빛깔일까. 자식을 잃은 어미로서 나는 한낱 위로의 존재였을까.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내 마음의 밀물썰물을 가만히 응시한다. 너, 정말 그 여인을 사랑했니? 사랑했었니? 사랑하니?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 친구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어머니가 없는 나에게 그녀는 내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스무 살 무렵, 친구 녀석의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녀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의 어머니가 온전히 내 차지가 되리라는 일종의 희열에 들떴다. 나는 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의 죽음을 은근히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녀석은 늘 죽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것이 성공적일지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진기를 둘러매고 여행하기를 좋아했던 친구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했다. 녀석은 매일 매일 토하고 얼굴이 노란 참외처럼 익어 갔다. 녀셕은 버릇처럼 읊조렸다. 나를 가둘 수는 없어, 절대로.
나는 그가 언젠가는 불행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감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를 비웃으며 공격했다. 일자리조차 없는 우리 또래 젊은이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배부른 투정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이승을 떠난 것 같았다. 그는 몽롱한 눈빛으로 읊조렸다. 난 그냥 자유가 필요해. 그 뿐이야. 그리곤 덧붙였다. 내가 죽으면 어머니도 자유로워질 거야.
나는 하늘을 보며 녀석에게 묻는다. 그래서? 너는 구원을 얻었니? 어머니는 자유로워졌니?
내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심장이 터져 산산조각이 날 것 같다. 나는 별들을 욕심껏 품은 밤하늘에게 물어본다. 너희는 자유롭니?
그녀는 왜 갑자기 페루에 가고 싶었을까.
숙소로 돌아오니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화투에 함빡 빠진 일행을 바라보던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방안으로 새바람을 불러들인다.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톡 튀어나온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 발가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어때?
일행이 놀라 너 미쳤니?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내 말투가 다소 진지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순진무구한 그 상태 말이야. 어때?
일행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고, 진호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너 약 먹었니?
박준이 뒷말을 잇는다.
-밖에서 못 볼 걸 봤구나?
아얌아얌 하품을 하던 정애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죙일 말이 없더니? 혹시 너 그날이니?
오양임이 쟈가 계집애로 뵈나 봬? 하면서 선뜻 동의를 표한다.
-한 치도 거짓 없이 순수 상태로 발가벗으라? 좋아!
나는 포도 씨앗을 뱉어내듯 툭 내뱉는다.
-첫사랑 고백하기!
-뭐? 첫사랑?
찌른 칼날을 좀 더 깊숙이 질러 넣듯 나는 오금을 박는다.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생생하게 들려주기!
내 목소리가 제법 비장하다.
-일등에게 상을 주겠어.
-상? 무슨 상?
오양임이 명쾌하게 결론짓는다.
-키스! 키스해 주기!
일행이 눈을 동그랗게 키운다.
-누구에게?
내가 답한다.
-일등에게.
-누가?
-모두가.
진호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미간을 모은다.
-싫은 사람이 키스하면 고역인데?
정애가 달랜다.
-에이, 따지지 좀 말자. 다수결 어때?
다수결 결정은 설說마실의 묵계다. 일행은 화투장을 뒤엎고 한 장씩 고르고 숫자가 빠른 사람부터 이야기하기로 정한다.
첫 번째로 매조를 고른 진호는 아하! 잠시 눈을 감는다.
-내 첫사랑은 말이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귀와 눈과 미세한 솜털까지도 일제히 살아 옴틀거리는 고도의 집중력이다.
-3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말이야.
모두들 모이를 향해 모여드는 병아리들처럼 고개가 모아진다.
-언제? 어디서?
살짝 뜸을 들이던 진호는 막상 입을 열자 거침없이 물살을 탄다.
그는 첫사랑 연인과 다시 만나자마자 무작정 하와이로 떠났다. 1년 전 일이다. 더도 덜도 말고 보름만 있다가 돌아오자, 기약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말이야, 보름 동안 호텔 안에서 섹스만 했단 말이지. 바깥출입도 안하고.
그의 고백은 폭풍을 휘돌면서 태풍을 가뿐하게 건너뛴다. 일행이 눈을 껌벅거리며 이구동성으로 묻는다.
-정말?
-그게 가능해?
오양임이 진호에게 눈꼬리를 치뜬다.
-죽을래? 너 괜히 뻐기는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진호는 흐흐흐, 웃으며 태연하다. 진호는 그 이후, 한 번도 첫사랑을 만난 적도 그리워 한 적도 없다고 매듭짓는다.
-여한도 미련도 그리움도 깡그리 지워 버렸어. 보름동안의 섹스는 지우개였어. 이젠 하얗게 말라 비틀어졌다, 이 말이지.
나는 그렇게 무 토막 자르듯이 감정정리를 깔끔하게 끝냈다는 진호가 부러웠다. 내 첫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나는 그녀가 빨리 늙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어른이 된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내 손길이 필요할 때를 기다리며. 그래서 하루하루 잘 견뎠던 것은 아닐까.
나도 알고 있다. 내 사랑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황된 기대라는 것을. 그리고 가슴골을 파먹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두 번째로 삼광 패를 고른 정애는 거침없다.
-난 첫사랑이랄 것도 없지만, 하여간에 내 첫 남자를 만나자마자 그 집에 가서 그 애 형수를 사이에 두고 잤어. 그 애가 형수를 건너와 나를 만졌어.
-그래서?
-그래서 뭐 그냥 자 버렸어.
-형수를 옆에 두고 말이야?
-으흐흐흐……. 가끔 그때가 그리워. 그땐 정말 불탔거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이상하지? 그 애가 그렇게 좋았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몰라. 쿵닥쿵닥쿵닥쿵쿵쿵……. 그때처럼 가슴 뛰는 일이 내 생애에 또 있을까 몰라.
정애는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내게 입을 뻐끔거린다. ‘내 생애에 또 있을까 몰라’ 아마 그런 말인 것 같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던 홍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정말요? 정말로 자 버렸어요? 섹스 뭐 그런 것도 해가면서?
정애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홍규의 이마빡을 톡 튕긴다.
-그럼 식스센스겠냐? 응큼아!
정작 엉큼한 놈은 나다. 아아, 그녀를 향한 불꽃같은 열정을 나는 어떻게 숨기며 용케 견뎌 왔을까. 이젠 터트려야 해. 속 시원하게. 화끈하게. 그러면 지워질까.
-그날 밤 그 형수 맴이 으뗘스까이? 드러웠으까, 부러웠스까이.
-아따, 대리라는 거 있잖여. 대리만족 했것찌. 허이 박준 대리, 시작해 보시지.
진호의 넉살에 박준이 그의 특유의 근엄한 어조로 말한다.
-난 첫사랑이랑 미친 듯이 뜨겁게 열렬하게 사랑해서 이젠 사랑할 힘도 남아있지 않아. 다 태워버렸는 걸.
오양임이 가재미눈으로 핀잔을 준다.
-연병, 잰 왜 준다는데도 넙죽 받아먹기 싫은지 몰라.
박준도 슬쩍 눙친다.
-난 니가 덤벼들까 노심초사 무서워.
-낭중에 싸우고. 실리박. 추상적으로 말고 구체적으로 고백해 봐.
진호의 말에 박준이 진지하게 대답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씨받이를 할 정도로 정말이야.
오양임이 비아냥댄다.
-꼴에 첫사랑을 하긴 했나봐아? 응?
-니 차례야.
진호가 팔광 패를 뽑은 오양임을 툭 치자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로 변한다.
-난 첫사랑이랑 바닷가를 갔는데 오줌이 너므으 마려웠어. 젤루 높은 바위에 올라가 오줌을 쐐! 쌌는데 00가 너므으~ 씨원했어. 난 첫사랑, 하면 그 자식 얼굴은 생각 안 나고, 그 기억만 떠올라.
그녀는 00라는 단어가 순 우리말이라며 항상 원색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普知는 세상에 두루 알린다는 뜻도 된다고 우겼다. 어떤 사람은 무색해 했고, 어떤 이는 그러려니 했고, 어떤 이는 시원해했고, 나는 뭐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거침없이 솔직하고 원색적인 그 오양임을 나는 지극히 사랑했다.
박준이 묻는다.
-사람들은 없었어?
오양임이 박준의 목을 당수로 탁 치는 시늉을 한다.
-이것아. 관객이 있으니 스릴도 있것찌. 넌 싱겁지만 않았어도 내가 뚝 따 먹었을 텐데.
정애가 날름 받는다.
-지금이라도 후딱 따 먹어. 소금 살짝 뿌려줄게.
-됐어, 싱거울 게 뻔해. 진호랑 딱 보름이라면 몰라도.
정애가 과장되게 진호에게 묻는다.
-강진호. 이 지지배가 원을 해쌓는데 구제 좀 할텨?
진호가 눙친다.
-30년만 지달려. 고일 때까장. 시방은 바싹 가물었어.
오양임이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받는다.
-30년? 조오치. 쪼그라진 곶감 같으먼 워뗘? 기다린다는 자체가 중하지.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기다림……. 뭐 그런 것도 없으면 인생이 허무해서 살고 잡것냐?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이고 욕설이 뒤섞이고 판소리 투의 요설이 물고기 뛰듯 팔딱거린다.
누군가 자조적으로 읊조린다.
-요런 걸 소설 쓰면 쥑일텐데. 근데 왜 소설은 안 나오는지 몰라.
-그거, 다 글발이 양기로 모였기 때문이야. 몰랐어?
-응. 몰랐어.
-그러니까 이것들아. 쥬듕님 닫고 한줌 씨받이로 글발을 모아. 보름동안 밤낮 섹스 하듯 쓰면 소설 까잇거, 안 나오것어?
‘보름’을 강조하는 오양임의 억양에 진호가 자기를 모범 삼으라는 듯이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는 시늉을 한다. 오양임이 아니꼽다는 듯이 받아친다.
-섹스 강은 됐고!
-뭐? 센스 강이라고? 그렇지 내가 센스는 말가웃쯤 있지.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엉뚱한 쪽으로 불길을 던진다.
-홍규야. 넌 맨날 입 다물고 있는데 글 양기는 다 오데로 갔는고?
박준이 얼른 감싼다.
-오늘 합평 작 괜찮지 않았어? 미각은 곧 사랑이다. 고로 사랑은 전쟁이다. 이론이 신선하지 않아?
홍규를 아끼면서도 은근히 자극하는 진호가 또 빈정댄다.
-신선은 개뿔! 혀를 잘랐는데 어떻게 미각을 느껸마? 똑바로 써봔마.
-너나 똑바로 쓰세요. 형!
홍규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확 열어젖히자 11월의 바닷바람이 왈칵 달려든다.
-욧신발눔이. 잘 생기면 다냐! 지적知的이면 다냐! 바람 닫안마. 문 들어온다.
-근데 넌 첫사랑, 뭐 그딴 거 해봤냐?
-나?
나는 입이 근질거리고 숨이 차오른다. 빨리 다 털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 상태인 내 감정을 솔직하게 밝힐 수 있을까. 혹 미친놈 취급을 받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내 감정의 진폭을 확인하게 위해 ‘첫사랑’이라는 미션을 던졌던 것은 아닐까.
내 입술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와 똑 같은 단풍을 쥐고 있던 홍규가 화투 패를 휙 던진다.
-내 첫 사랑은 도둑년임다.
-뭐?
진호가 또 빈정댄다.
-이눔아는 항상 서두는 좋은데 결말이 뱀꼬리란 말이지. 서두는 쪽 빨아들였는데 결말이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간도 크게 표절씩도 하고 말야.
-에이, 난 표절 그런 거 안 했단 말임다. 그런 소설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요.
홍규가 억울함을 꾹 참고 있었던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벌게진다.
진호의 감싸는 듯한 목소리 속에는 뼈가 있다.
-정말 소설을 쓰고 싶으면 그 승질부터 관리핸마. 맷집도 중요하지만 깊숙이 감춘 칼을 벼를 줄 알아야지. 한방을 위해. 이도저도 안 되면 확 때려치든가. 내 말이 티꺼우면 팔부능선을 훌쩍 뛰어넘든가.
모두들 고개를 외로 꼬고 말이 없다. 분위기가 무겁다. 누군들 팔부능선을 뛰어넘고 싶지 않겠는가.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소설이라는 그 깊고 어둑한 늪으로 빠져 들면서 왜 아무도 헤어 나올 생각을 않는 걸까. 누군가의 말처럼 소설은 정말 목매달아도 좋을 나무인가. 고달픈 삶에 대한 위로인가.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구인가.
그동안 한마디도 없이 잠자코 있던 이성구가 뜬금없이 화투 패를 내보인다. 초단이다.
정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놓고 비튼다.
-또 뒷북이여?
이성구는 일행이 Y담으로 한참 웃어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눈만 끔벅이는 존재 없는 존재였다. 어느 땐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 한참 뒤에야 알아듣고 칵칵대서 다시 한 번 웃게 하는 다시없는 싱검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이런 말해도 되능가 몰러, 하고 일장 사설을 늘어놓는다.
그는 부동산 중개사 자격공부를 하는 학원에서 젊고 멋진 한 남자를 만났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외제차를 타고 가서 강남의 멋진 음식점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젊은이는 반듯했고 예의 바르고 배려심도 깊었다. 당구도 볼링도 수영도 선수급 실력이었고 매너도 좋았다. 젊은이는 자주 그를 불러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처음에는 찜질방이나 구석진 곳으로 이끄는 그의 손길이 장난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젊은이를 피했다. 아내는 왜 학원에 나가지 않느냐고 시간표를 체크하면서 다그쳤다. 학원비가 아깝지 않느냐, 앞으로 무얼 먹고 살 것이냐, 잔소리였다. 그는 젊은이를 설득 했다.
-동상,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워뗘? 이상한 짓은 하덜 말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헤어지기루. 괜찮지?
젊은이는 아내도 있었고 딸도 두었지만 도무지 아내에게도 어여쁜 여자에게도 끌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마음을 준 사람은 형님뿐이라고. 그러니까 형님이 내 첫사랑이라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라고 했다. 말을 마친 싱검초는 이 일을 워칙허면 좋댜? 하고 물었다.
그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그래서 형님은 어떤 마음이요? 그 젊은이가 뭐 멋있고 섹시하고 좋아요?
-멋있고 섹시하고 좋기는 허지. 근디 뭐 남자끼리는 게이 뭐 그런 거 아녀?
-그러니까 형님도 게이라도 좋으냐 그 말이오?
-물르것어. 난두 잘은. 좋기는 헌디 그러면 안 될 것 같기두 허구.
오양임이 다그친다.
-그러니까 싱검초 씨. 그 젊은이가 좋고 뭐 그러냐구요?
-아, 좋기는 허지. 근디 거 뭐시냐, 정상이 아니잖여.
-그러니까 그 남자랑 사귀는 거 좋냐구요?
-그 놈은 멋지긴 혀. 매력두 있구, 매너두 좋구, 아 근디 그런 눔이 왜 하필 나 같은 눔을.
잠깐. 잠깐만……. 정애가 싱검초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사이비 목사가 안수하는 시늉을 하며 묻는다.
-그러니까……. 집에 있을 때 그 젊은이가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렇긴 합니까?
-아, 생각이야 잠깐 잠깐 나지. 왜 그러나 싶은 기 영 찜찜허고.
-그러니깐요오. 앞으로 계속 만날 생각은 있느냐고요오?
-아, 사람이 사람을 워치케 안 만나고 산다남?
싱검초의 이야기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모두 지친 표정이었다.
일행은 이쯤해서 마무리하고 단편 소설을 한편씩 쓰기로 결정했다. 주제는 첫사랑이고 제목은 자유롭게 하기로 뜻이 모아졌다. 소설이 완성 되는대로 동호회 카페에 올리고 한 달 후, 합평회를 하는 방식이다.
합평회 날짜를 열흘쯤 남겨두고 나는 동호회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6편의 소설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야말로 칼을 갈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달빛 소나타’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은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줄거리는 내가 진도 바닷가에서 겪은 그 이야기였다. 아아, 빛의 속도로 알게 된 그 여인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도 ‘진도의 달’이라는 소설 한 편을 마무리했는데 놀랍게도 거의 흡사했다. 이것이 표절이라는 것일까. 표절이라면 누가 누구의 것을 표절했단 말인가.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작자作者는 그날 밤 일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혹시 내가 술김에 말해버린 걸까.
그날 밤 진도에 초대된 사람들은 글쟁이들, 소리꾼들, 연극쟁이들이었지만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집 주위에는 멀찍이 별장 두어 채가 숨은 듯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고,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환한 달빛 아래서 모닥불을 피우며 북장단에 맞추어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소리꾼들이 목청을 돋우고 북과 꽹과리로 중모리 중중모리 장단으로 휘도는데 그 소리가 어쩐지 바다 속으로 자꾸 이끌려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둥그렇게 배가 부른 달은 바다에 빠져 일렁일렁 파도를 타고, 애간장을 녹일 듯한 소리꾼의 목청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 남녀의 정사情事처럼 탐미적이었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누군들 자연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랴.
밤새 그렇게 놀이판이 이어지고 새벽녘에야 파티가 끝났을 때, 흐느적이던 사람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나는 정원 귀퉁이에 누군가 쳐놓은 1인용 텐트로 들어가 잠들어 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가 나를 덮쳤다. 그 순간 느닷없이 목덜미의 점이 클로즈업 된 것은 취취몽이었을까. 비좁은 텐트에서 하비작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텐트를 빠져나와 숲길을 무작정 달렸다. 어느 비어있는 집 마당 잔디밭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고 두 마리의 뱀이 교미하듯 한바탕 진한 정사를 치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 다 알몸이었고 대낮처럼 밝은 달이 마당을 환히 내려 비치고 있었다. 눈 아래 철썩이는 파도가 교교한 음률을 만들어 내고, 바다 안에서 달과 바다가 절묘하게 뒤엉켜 교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달빛 소나타였다.
어쨌든 나는 지금 ‘달빛 소나타’라는 소설 한 편을 손에 쥐고 망연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최민초 2001년 《한국소설》 신인상 등단. 소설집. 『자네 왜 엉거주춤 서 있나』, 『꽂지에서 길을 잃다』, 『아내의 스무 살』. 한국소설 작가상, 지방 문학상 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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