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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시집속의 시/김설희/다리의 다리에서 세월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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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5회 작성일 19-07-1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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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시집속의 시/김설희/다리의 다리에서 세월을 발견하다


다리의 다리에서 세월을 발견하다
―권순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중에서


김설희



구절초 하얀 길에
좁다란 다리 하나 있다
 
발목은 부러질 듯 아슬하고
녹슨 철골 앙상한 종아리는 자꾸 부서져 내린다
거뭇하게 더께 앉은 저 다리 아래
물의 살이 다리의 종아리를 갉아 먹는다
다리에서 떨어져 나간 자갈이
물의 살에 밀려 자그락거린다
 
누가 입에 물었다 뱉어 놓았는지
아랫도리에 멍이 든 갈대들
다리의 다리를 빠져나온 바람이 쓸고 간다
바람이 물의 살을 삼키려 한다
다리의 다리를 보았다
샛강 낮아진 날 보았다
 
다리의 다리가 위태로웠다


                             ―권순 「다리의 다리를 보았다」전문


다리는 강, 개천 또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통행할 수 있게 걸쳐놓은 교량을 보편적으로 말한다.
벌어진 곳을 연결하여 이어지게 하는 것이 다리다.
끊이지 않고 쉼 없이 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종류도 많다. 돌다리 나무다리 금속다리 콘크리트다리….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또 달라졌겠지만 시 속의 다리는 아마도 철골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아담한 다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오고 갈 수 있는 다리에는 또 다른 다리가 있다.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다리다.
벌어진 사이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리라면 그 다리보다 먼저 설치해야만 하는 그래서 다리보다 더 튼튼해야 하는 다리다.
한 자리에서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다리다.


우리 어머니는,
육남매의 식사와 빨래와 농사에 연기 오르는 부엌과 마르지 않는 도랑과 뙤약볕이 무르익는 밭에 매일 붙박이였었다.
우리 아버지는,
들에 산에 직장에 붙박이였었다.
우리 가는 길에 혹시 작은 강이라도 있을까 하여,
노심초사 다리처럼 우리를 떠받치고 계셨다.
그 다리에 물살은 달려들어 발목을 부러질듯 가늘게 만들고 드디어는 종아리마저 갉아먹는다. 그러는 동안 자식들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이 다리를 위협하는것도 모르고, 아무런 위험도 못 느끼고 안전하게 물살을 건넜다.
다리가 가늘어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쇠락하여 가는 부모를 미처 생각 못했다. 다리의 살이 무너져 자그락 자그락 소리가 나는 것도 몰랐다. 그저 붙박이처럼 있는 다리, 또 있어야만 하는 다리처럼만 여겼다.
이 시를 읽으며 버팀목처럼 우리를 받치고 어디든 건널 수 있게 한 부모님 생각난다.
당신의 멀쩡한 다리가 마르지 않는 물살에 닳고 닳아 허물어지는 아픔도 표현하지 못하면서, 뼈가 보일 정도로 쇠약해진 부모님 생각에 후회가 밀려온다.


이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낳게 한다.
물론 필자와 같은 이도 있겠고, 다리의 다리를 생각하다 끊어진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매파를 생각하는 사람, 다리 아래 물수제비 던지던 추억을 끄집어내는 사람, 토끼풀 반지 주고받으며 건너온 때를 떠올리는 사람, 또 자신은 어떤 다리인가 생각하는 사람, 무심코 지나다녔던 다리를 그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구절초 하얗게 핀 길 위에서, 다리를 보다가 또 다른 다리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에 낡아진 다리의 다리와 멍든 갈대와 관절소리처럼 자르락거리는 다리에서 떨어져나간 자갈들, 이 모두를 바람은 쓸고 간다. 쓸쓸하다.
천년만년 무너지지 않을것 같은 시멘트 재질도 무쇠 같은 인간의 굵은 뼈도 이 바람에 쓸려간다.

세월 속에는 늘 바람이 살고 있다.
태풍, 폭풍, 계절풍, 무역풍, 미풍….
어디로 불어댈지 아무도 모르는 바람이 살고 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람은 무엇이든 쓰러뜨린다.
언젠가는 바람에게 무너지고 만다.
그 바람이 다리의 다리를 위태롭게 한다.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는 시를 읽었다. 건필을 기원한다.





*김설희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산이 건너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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