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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계간평/백인덕/시는 여전히 ‘유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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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계간평/백인덕/시는 여전히 ‘유령’이 필요하다
시는 여전히 ‘유령’이 필요하다
백인덕
1.
현실은 점점 더 흐릿하고 모호해진다. 우리의 강력한 바람과는 별개로, 또는 전혀 반대로 현실의 ‘확실성’과 ‘진정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보증하지 못하는 일종의 선언적 구호(실은 정치적 슬로건에 가깝다.)가 되어 골목과 대로와 공원과 전시장에서 펄럭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어제오늘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또는 특정한 사안事案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아니다. 현실의 불확실성은 사유와 기술(이때 ‘기술’은 ‘테크네techne’와 ‘서술description’의 중의성을 갖는다,) 두 방향에서 인류의 진화와 함께 그 궤적을 그려왔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장자의 ‘호접胡蝶夢’이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베이컨의 ‘우상들’ 그리고 데리다의 ‘유령들’이 현실의 경계에 대한 사유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인식은 ‘확실성’을 겨냥하지만, 매번 꿰뚫는 것은 일종의 ‘허상’, 또는 ‘감각의 소여’일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하게 현실을 파지把持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신체’, 즉 ‘감각적 자아’)의 불완전성에서 기인하는 불가피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간밤의 천지 진동한 폭우와 천둥에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위태로웠다
번개는 별자리 바뀌는 억만 톤의 파동이었나
밤이 그 새 적도의 경계를 몇 차례 다녀왔는지
짐승들 발굽소리 떠 지어 지나간 시간의
뒤편,
고요한
아침,
말짱한 얼굴이 쨍 소리 내며 세상에 왔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
햇살은 바람과 태연하고 하늘은 흰 구름과 놀고
도로는 침묵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다
폭우와 맑음의 간극은 짧은 잠 한 숨인가
팔과 다리처럼 아는 얼굴인가
햇빛 한 장씩 맑음을 펼쳐보아도
너와 나 지척의 거리가
밤과 아침의 간극인지
―장순금, 「간극」 전문
시인은 불현 듯 ‘(간)밤과 아침의 간극’에 주목하게 된다. 두 지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이고 시인이 개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천지 진동한 폭우와 천둥’)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과거에도 무수히 반복되었고 어쩌면 미래에도 되풀이될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을 죄다 위태롭게 할, 즉 시적 화자의 심리적 동요의 원인이 되면서 현재의 사건으로 전환한다. 이는 “번개는 별자리 바뀌는 억만 톤의 파동이었나/밤이 그 새 적도의 경계를 몇 차례 다녀왔는지”처럼 감각 이후의 사유(‘의문’)에 힘입어 전개되는 새로운 차원이다. 즉 ‘번개(시각)’와 ‘천둥(청각)’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어떤 ”뒤편,/고요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침’을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아침은 향유享有하는 대상이 아니라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라는 의문과 함께 던져지는 일종의 새로운 화두인데, 그 물음은 ‘간극’이라는 어휘에서 집약되어 드러난다. 감각적으로는 ‘폭우와 맑음’, 즉 ‘간밤과 아침’이 극명하게 다른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마치 ‘짧은 잠 한 숨’의 시간처럼 짧은 간격을 두고 있을 뿐인데, 아는 ‘팔과 다리처럼’ 명확하지만 결코 한 뿌리에 둘 수 없는 것처럼, 감각과 인식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현실을 불확실하게 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에는 우리의 언어에 내재한 근본적인 모순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임의적이고 본질적이거나 필연이 아님으로 인해서 그 결합에 의해 생성되는 ‘의미’에 어떤 균열, 틈을 태생적으로 함축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재현의 불가능성 이전에 언어는 변질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햇빛이 이사 왔다
햇빛은 꿈속에 사는 소문인데
어느 구멍으로 흐른 것일까
의자가 있던 자리에
그림자가 남았다
그림자는 기억 속에 사는 유령인데
어느 벽을 허문 것일까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소문이 무성하다
피아노가 중고로 팔렸다고 하고
애인이 떠나자 주인이 버렸다고 하고
피아노와 의자가 사라진 건
애인의 실종과 관련이 깊어서
모두 주인의 애인되기를 갈망한다고 하니
우리는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서랍장이 햇빛을 몰아내고(그래서 소문이 사라졌다)
탁자가 그림자를 몰아내고(그래서 유령이 사라졌다)
새로운 구석과 중심이 되어간다
―강순, 「사라지고 싶은 것들」 부분(《리토피아》, 2018 가을호)
시인은 몇 개의 사물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물의 용도가 아니라 ‘사물성’을 다시 부여하는 방법을 통해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시적 사유를 잔잔하게 풀어내 보여준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이사 온 ‘햇빛’이나 “의자가 있던 자리에” 남은 ‘그림자’는(이런 명암의 대비는 질감의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피아노/의자’라는 사물을 대체한 김각적 투영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들은 마치 ‘소문/유령’처럼 현실에 ‘구멍’을 내고 ‘벽’을 허물기도 한다. 구멍이 나고 벽이 허물어진 현실은 물론 비현실적이다. 거기서는 ‘소문’이 다른 소문을 낳고 그래서 꾸며낸 이야기가 전혀 거리낌 없이 현실인 양 행세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잠재우는, 아니 소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른 확실한 사물을 그 자리에 재배치하는 것이다. 이를 강순 시인은 “서랍장이 햇빛을 몰아내고(그래서 소문이 사라졌다)/탁자가 그림자를 몰아내고(그래서 유령이 사라졌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피아노/의자’라는 사물이 점유했던 공간과 현실성이 ‘햇빛/그림자’ 같은 감각적 소여에 자리를 내주면서 안전해 보였던 풍경(풍경만큼 확실한 현실이 어디 있으랴)이 그 풍경을 구성하는 언어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꿈속/기억’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이런 조건이야말로 한 존재의 언어의 태내胎內라는 점에서 의미를 강화하면 했지 결코 이런 시각을 약화하지는 않는다.
2.
현실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우리의 감각적 특성과 외적 환경, 특히 기술적 진보의 영향 등에 집중하기 쉽다. 사실 인류라는 유적 개념과 자산의 층위에서는 기술적 진보의 영향이 가장 심대하고 위중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 특히 시에 있어서는 이런 유적 개념의 충위보다 실존적인 한 개인의 층위가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날 것의 문제로 설정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바람직하다. 그런 측면에서 ‘자의식’은 현실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개인의 가장 큰 압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귀신을 닮아가는 중이오.
서늘한 기운 몰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개지 않는 안개를 만들고 있소.
길 잃은 자들의 방향성을 짐작하며
나는 밤의 혼란을 지배하오.
혼란 부재 주취의 흔적 말이오.
누군가 찾아온다면 나는
문 걸어 잠근 채
영혼이 빠져 나간 사체가 될지도 모르오.
그때, 내가 깨지 않을 때
방의 불을 끄고
어둠의 사진을 찍길 바라오.
나는 천장에 붙은 채 입을 모아
안개의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이오.
날 찾아온 당신의 방향성은
내 고이 간직할 테니
당신은
내 방 이불 위에서 무릎 모아 둥글게 말린 채
내가 겪었던 불면을 생생하게 바라보시오.
―김성철, 「불면」 전문
시인은 그가 겪고 있는 ‘불면’의 상황을 “나는 귀신을 닮아가는 중이오.”라는 강력한 진술을 앞세워 드러낸다. 이 ‘귀신’이 하는 일은 “서늘한 기운 몰아/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개지 않는 안개를 만들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안개’ 등이 이미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지시하지만, 단적으로 ‘귀신’은 ‘산/죽은’처럼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는 어느 차원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귀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양쪽에 다 걸린, 혹은 저쪽에 있어야 하는데 이쪽으로 추방된, 또는 이쪽에서 간절하게 염원하여 불러낸 저쪽의 존재처럼 무엇이라 명확하게 호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귀신이다. 이 호명할 수 없음은 존재가 스스로 개시開示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성철 시인의 ‘자의식’은 ‘불면’의 상황에 직면해서 존재를 열지 못하는 상태. 즉 현실을 구성하지 못하는 불명확성에 사로잡힌 상태를 가급적 객관화 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시인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현실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자기의 시적 현실을 건설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전면에 드러내기도 한다.
중심 잡고 걷는다는 것은
이미지를 그리며 가는 것이다
제 발로 또박또박 땅을 밟으며 가는 것이다
가슴으로 늘 사람을 향하는 것이다
(중략)
중심은 늘 내 안이다
그 세밀한 소리에 민감할 때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느낌을 받을 때
좌우로 치우침 없이 똑바로 걷는 것이다
밖은 곧 안의 경계이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
중심은 또 다른 중심을 잡고
주변을 견고한 담이 되게 한다
중심을 따라 걷는 길은 늘 행복하다
―우동식, 「중심 잡고 걷기」 부분
시인은 ‘중심은 늘 내 안이다’라는 시적 인식을 필두로 자신의 자세와 보폭을 조정한다. 그가 보여주는 첫 번째 비법은 “이미지를 그리며 가는 것이다/제 발로 또박또박 땅을 밟으며 가는 것이다/가슴으로 늘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이미지’는 어떤 모범적 전형을 말하는 것 같고, ‘땅을 밟으며’는 말 그대로 실천성을 (가슴으로)‘사람을 향하는’은 정체성의 본질적 특성을 지시하는 것 같다. 즉 그가 그리는 모습(이것은 그의 시적 현실인데)은 인간적 성숙에서 빚어지는 시인의 자질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이를 “중심은 늘 내 안이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밖은 곧 안의 경계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확산한다. 내 안의 중심잡기 만으로는 자기가 설정한 이상적 현실을 구현하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내 밖으로 외화外化하면서 단단해져야 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시적 진술을 더욱 듬직하게 한다.
현실, 또는 현실성이 중요한 이유는 어쨌든 우리는 그 바탕 위에서 가치의 기준을 세우고, 기억과 바람을 불러 모아 날 것 그대로의 현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랑은,
지치지도 싫증나지도 않는 놀이를 하다가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술은 남겨놓고
꿈꾸듯
잠깐 나를 스르르 벗어놓고 떠났다 돌아왔을 뿐인데,
다시 세월을 거꾸로 걸어가는 치매 같아서,
어느 길에선가 부딪쳤을지도 모를 헛것이 자꾸만 나타나서
입술 가까이 만발하던 웃음
햇살의 입김 아래 타올랐던 흔적만 우두커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 눈썹을 치켜떠도
눈물의 시간이 올 때까지 끝내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겠다
-김밝은, 「감쪽같은, 어리연」 부분
시인은 과거의 어떤 사랑(“그랬다 사랑은,”)을 현재화 하면서 낮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현실 너머의 현실성을 지향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잠시 “꿈꾸듯/잠깐 나를 스스로 벗어놓고 떠났다 돌아왔을 뿐인데” 그런데 잠시라는 시간의 뉘앙스가 무색할 만큼 ‘치매’, ‘헛것’ 같은 ‘흔적’의 어휘들이 ‘사랑의 깊이’를 덮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이 작품은 사랑이라 하지만 현실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가시화될 때 일순간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인식적 수고를 기울여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확인해야 할 운명의 존재일 뿐이다.
시에는 여전히 ‘유령, 헛것, 귀신’이 깃들 ‘간극과 경계와 혼란’이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것은 결국 단단하게 뭉쳐진 자의식이라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동시에 자기 자신과 맞서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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