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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아라세계/신연수/묘사력이 뛰어난 『남생이』의 작가 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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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07회 작성일 19-07-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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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아라세계/신연수/묘사력이 뛰어난 『남생이』의 작가 현덕


묘사력이 뛰어난 『남생이』의 작가 현덕


신연수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편 일대는 물미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재터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깨어진 사기요강이 굴러있는 토담 양지짝에 누더기가 널려 한종일 퍼덕인다.
남비 하나 사기그릇 몇 개를 엎어 놓은 가난한 부뚜막에 볕이 들고 아무도 없는가하면 쿨룩쿨룩 늙은 기침소리가 난다. 거푸 기침소리는 자즈러지고 가늘게 조라들더니 방문이 탕하고 열렸다. 햇볕을 가슴 아래로 받으며 가죽만 남은 다리를 문지방에 걸친다. 가느다란 목, 까칠한 귀밑, 방안 어둠을 뒤로 두고 얼굴은 무섭게 차다.
  “노마야!”
힘없는 소리다. 대답은 없다. 좀 더 소리를 높여 부른다. 세 번째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악성을 친다. 역시 대답이 없다. 다시금 터져 나오는 기침에 두 손으로 입을 싼다. 길 하나 건너 영이 집 토담 밑에서 노마는 그 소리를 곰보아버지가 곰보를 부르는 소리로 들어 넘기고 만다.”


“노마가 급기야 토담 모퉁이 양버들나무를 올라갈 수 있던 날 노마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실로 이상한 날이다. 그렇게 어렵던 나무가 힘 안들이고 서너간 높이 쌍가지 진 데까지 올라가졌다.”


“그날 동네 여인들은 변으로 노마에게 곰살궂게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머리도 쓰다듬고 떡 같은 것도 갖다 준다. 측은해하는 낯색으로 노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노마는 그들이 하는 대로 풀 없는 낯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 속은 어쩐지 겉과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외면을 하는 것이다.
“너는 울지도 않니 남들이 숭보라구.”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노마에게 울기를 권한다. 그러나 자기처럼 아니나오는 울음을 소리만 높여 울면 더 숭이 되지 않을까. 노마는 남부끄러 못 운다. 그러나 영이 할머니가 진정으로 자기가 먼저 울어 보이며 권하는 때도,
“어떻게 울어.”
노마는 사실 제식으로 진정 울려 해도 도시 울음이 나지 않는다. 거기 실감이 닳지 않는다.
호젓한 집 뒤 담 밑으로 돌아가 노마는 짐짓 시리 죽은 표정을 한다. 담벼락의 모래알을 뜯어내며 ‘아버지는 영 죽었다’ 하고 입밖에 내여 외어 본다. 그리고 되도록 울음이 나오라고 슬픈 생각을 만든다. 허나 머릿속에는 담배물부리를 찾노라 방바닥을 더듬는 아버지가 나타난다. 거미발 같은 손가락이다. 창밖에서 쿵쿵 발을 구르며 먼지를 터는 아버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얼굴은 형용을 잡을 수 없다. 그보다는 오늘 노마가 나무 올라가기에 성공한 그 장면이 똑똑히 나타나 덮는다. 갑자기 노마의 키가 자라난 듯싶은 그만큼 보는 세상이 달라지는 감이다.

현덕의 소설 「남생이」의 일부다. 「남생이」는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밑바닥 생활을 하는 노마 가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소작농이었던 노마의 아버지는 마름(소작농 관리인)의 횡포에 항거하다가 소작하던 땅을 뺏기고 인천부두의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한다. 하지만 곧 병으로 노동도 할 수 없게 되자 노마의 엄마가 항구의 들병장수로 나서 생계를 잇는데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부두를 생활권으로 살아가는 각양각색의 하층민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아귀다툼을 어린 노마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현덕은 구한말 최고의 세도가였던 민영익의 측근이었던 현흥택(玄興澤, 1856~1924)의 손자로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허황된 꿈을 쫓다가 가산을 탕진하는 무능한 아버지(현동철) 때문에 어린 시절을 매우 어렵게 보낸다. 일찍 부모 곁을 떠나 5촌 당숙인 현동순의 대부도 집에서 자라는가 하면 이 때 다닌 대부공립보통학교 2년 외에는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인천과 서울 등을 옮겨 다니며 중동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등에 적을 두기도 하지만 학업을 마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의 작품은 노마라는 어린아이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밑바닥 하층민의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살아 있다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따뜻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안겨 주는 것이다. 어린 노마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남생이」 외에도 「경칩」과 「두꺼비가 먹은 돈」 등이 있다.


인천의 대표적 소설가이며 아동문학가인 현덕의 「남생이」는 발표되자마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인천 선창가에서 사는 노마의 가족 이야기를 어린 노마의 눈을 통해 그려낸 이 작품은 묘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으로, 현덕의 뛰어난 묘사력은 「대하大河」로 유명한 소설가 김남천金南天도 감탄할 정도다.


“현덕 형의 「남생이」가 193×년 조선일보 신춘 당선소설로 발표되었을 때 문단이 모두 경이적인 신인의 출현을 절찬으로 환영하였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오랫동안 이 작가에 대해선 경탄을 마지아니하였다. 그 이유를 적으면 이러하다. …(중략)… 문학적인 이유에 속하는 것인데, 묘사력이다. 우리 문학의 선배로 누구누구를 꼽고 또 리얼리즘이니 장편소설이니 산문의 본령本領이니 하여 누구누구를 그의 완성자로 손에 꼽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소설문학은 아직 충분한 묘사정신을 터득치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형玄兄이 「남생이」 이후 계속적으로 발표한 「경칩」, 「골목」 등 일련의 작품이 표시한 적확適確하고 정확正確한 묘사력과 충분한 산문성과 그리고 위태롭지 않은 형상력形象力은 그때 한참 이 방면에다 수련의 중심을 삼아오든 나 자신을 크게 분발시켰었다.” (현덕 창작집 『남생이』 p. 283 김남천 발문)


하지만 현덕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년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그 이후에는 수필 등을 한두 편 발표하거나 그 동안 발표한 것을 작품집으로 발간하는 것에 그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구체적인 작품 활동은 작품연보 참조)


이후 현덕은 1947년 11월 20일, 아문각雅文閣에서 창작집 『남생이』를 발간한다. 월북전 현덕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그의 대표작 「남생이」를 비롯하여 「경칩驚蟄」, 「두꺼비가 먹는 돈」, 「잣을 까는 집」, 「골목」, 「군맹群盲」 등 1940년 전에 발표된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현덕은 월북 후인 1962년 북한에서 『수확의 날』이라는 2번째 소설집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수확의 날」, 「전진하는 사람들」, 「부싱쿠동무」, 「불붙은 탄광」, 「싸우는 부두」 등 5편이 실려 있다. 그 밖에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층層」, 「이놈이 막내올시다」, 「녹성좌」 등이 있는데 이들을 다 합쳐도 그의 소설은 20편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현덕은 「남생이」로 문단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그는 소설가보다 동화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남생이」로 이름을 알리기 전인 1927년 1월 <조선일보> 독자공모에 동화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는가 하면,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동화 「고무신」이 가작으로 뽑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현덕은 소설보다 동화에 관심이 더 많았다. 발표된 작품도 소설은 월북 이전 10여 편에 불과하지만 동화는 40여 편에 이르고 소년소설까지 합치면 50여 편에 이른다. 작품집도 소년소설과 동화집은 월북 전 4권이나 발간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동안 현덕의 동화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1988년 해금이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을 읽거나 작품집을 소유하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금이 된 후에도 그의 책은 구하기가 어려워 우리는 현덕의 동화들을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현덕의 동화가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원종찬 선생 덕분이다. 원종찬 선생은 1995년 「고양이」 등 동화 37편을 골라 『너하고 안 놀아』라는 현덕 동화집을 새롭게 펴냄으로써 비로소 현덕의 동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현덕의 모든 작품을 모은 『현덕전집』을 발간하는가 하면 그동안 이름만 알려져 온 장편소년소설 『광명을 찾아서』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먼저 현덕의 동화를 보자.


“기동이는 포도 한 송이를 가졌습니다. 노마는 유리구슬을 여러 개 가졌습니다. 기동이는 얼마나 맛있는 포도인가를 보이기 위하여 노마 앞에서 한 알씩 따서 한참씩 눈 위에 쳐들어 보다가는 먹습니다. 노마는 얼마나 가지고 놀기 좋은 구슬인가를 보이기 위하여 기동이 앞에서 한 알씩 구슬을 땅바닥에 굴립니다.
말없이 기동이는 아주 맛있게 포도를 먹습니다. 말없이 노마는 아주 재미있게 유리구슬을 굴립니다.
그러다가 노마가 구슬 하나를 내밀고 입을 열었습니다.
“너 이것하구 바꿀까?”
“뭣하구 말야.”
“포도하구 말야.”
“이런 먹콩 같으니.”
“그럼. 구슬 두 개 하구.”
“난 일 없어.”
“그럼. 세 개 하구.”
“그래두 일 없어.”


현덕의 대표적인 동화인 「포도와 구슬」의 일부분이다. 단편소설 「남생이」의 주인공인 ‘노마’와 그의 친구 ‘기동이’가 놀 것과 먹을 것을 갖고 욕심내는 마음을 단순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동화 대부분이 이와 유사한 서술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현덕 동화의 장점으로 독자를 이끌어내는 맛이라 하겠다.


현덕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도에서 자랐다. 그리고 학교도 대부도와 서울 등을 전전하며 다녔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황해도와 서울, 일본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북한에서 대부분을 보낸다.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로 볼 때 현덕은 인천과의 연고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당숙을 따라 대부도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한동안 살았으며, 이 때의 경험이 그의 주요 작품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인천의 작가로 꼽는데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끝으로 현덕의 본명은 경윤敬允이었으며, 대부공립보통학교 학적부를 보면 그의 본명인 경윤이 수덕秀德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현덕이라는 필명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 연보
1909년  서울에서 현동철玄東轍의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
            본명은 현경윤玄敬允.
1923년  대부공립보통학교 입학.
1924년  보통학교 중퇴, 중동학교 속성과 1년 수학.
1925년  제일고보에 입학했다가 집안 형편으로 중퇴.
1927년  <조선일보> 독자공모에 동화 「달에서 떨어진 토끼」 당선.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 가작.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 당선.
1940년  결핵으로 황해도에서 요양
1941년  절필 후 와카모도제약 조선출장소 광고부 근무.
1945년  해방 직후 와카모도제약 자치조직 관리위원장이 됨.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
            소년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 동화집 『포도와 구슬』 간행.
1947년  동화집 『토끼 삼형제』, 소설집 『남생이』 간행.
1948년  보도연맹 가입을 피해 잠적.
1949년  장편 소년소설 『광명을 찾아서』 간행.
1950년  인공치하에서 남조선문학가동맹 제2서기장이 됨.
             9.28 서울 수복 때 월북.
1951년  북의 종군작가단으로 전쟁소설 집필.
1962년  북에서 소설집 『수확의 날』 간행. 이후 생사 불명.


■작품 연보

1. 소설
1938.1. 8~25 <조선일보>, 「남생이」
1938.4.10~23 <조선일보>, 「경칩驚蟄」
1938.6.16~19 <조선일보>, 「층層」
1938.7 《조광》, 「두꺼비가 먹은 돈」
1939.1 《조광》, 「이놈이 막내올시다(꽁뜨)」
1939.3 《조광》, 「골목」
1939.4 《여성》, 「잣을 까는 집」
1939.6.16~7.26 <조선일보>, 「녹성좌綠星座」
1940.2.24~3.29 <매일신보>, 「군맹群盲」
1951년 《영용한 사람들》 수록, 「하늘의 성벽」
1951.5 《문학예술》, 「복수」
1951년  발표지 미상, 「첫 전투에서」
1959.1 《조선문학》, 「부싱쿠 동무」
1959.7  발표지 미상, 「수확의 날」
1961.9 《조선문학》, 「싸우는 부두」


2. 소년소설
1938. 8 《소년》, 「하늘은 맑건만」
1938.10 《소년》, 「권구시합倦球試合」
1938.11 《소년》, 「고구마」
1939. 1 《소년》, 「군밤장수」
1939.4~5 《소년》, 두포전
              (김유정이 3회, 현덕이 2회 연재)
1939. 6 《소년》, 「집을 나간 소년」
1939.10 《소년》, 「잃었던 우정」
1940. 2 《소년》, 「월사금과 스케이트」
1946년 《집을 나간 소년》 수록,
           「나비를 잡는 아버지」, 「모자帽子」
1946. 3 《진학》, 「행진곡」(연재 2회분)
1947. 5  《어린이 세계》, 「아름다운 새벽」(연재 2회분)


3. 동화
1927.1. 2 <조선일보>, 「달에서 떨어진 토끼」
1932.2.10~11 <동아일보>, 「고무신」
1938.5.22. <소년조선일보>, 「물딱총」
1938.5.29. <소년조선일보>, 「바람은 알건만」
1938.6. 5. <소년조선일보>, 「옥수수 과자」
1938.6.12. <소년조선일보>, 「새끼 전차」
1938.7.10. <소년조선일보>, 「싸전 가게」
1938.7.17. <소년조선일보>, 「맨발 벗고 갑니다」

1938.7.31. <소년조선일보>, 「내가 제일이다」
1938.8.14. <소년조선일보>, 「아버지 구두」
1938.8.28. <소년조선일보>, 「과자」
1938.9.11. <소년조선일보>, 「귀뚜라미」
1938.9.18. <소년조선일보>, 「싸움」
1938.9.25. <소년조선일보>, 「포도와 구슬」
1938.10.30~11.20(3회 연재) <소년조선일보>,「여자 고무신」
1938.11.27. <소년조선일보>, 「대장 얼굴」
1938.12.11. <소년조선일보>, 「둘이서만 알고」
1938.12.18. <소년조선일보>, 「암만 감아두」
1939. 1. 1. <소년조선일보>, 「토끼와 자동차」
1939. 1.16. <동아일보>, 「조그만 어머니」
1939.1.29. <소년조선일보>, 「바람하고」
1939. 2. 5. <소년조선일보>, 「기차와 돼지」
1939.2.12. <소년조선일보>, 「뽐내는 걸음으로」
1939.2.19. <소년조선일보>, 「너하고 안 놀아」
1939.2.26. <소년조선일보>, 「잃어버린 구슬」
1939. 3. 5. <소년조선일보>, 「의심」
1939.3.5~12 <동아일보>, 「강아지」
1939. 3 <소년>, 「삼형제 토끼」
1939.3.12. <소년조선일보>, 「고양이와 쥐」
1939.3.19. <소년조선일보>, 「용기」
1939.3.26. <소년조선일보>, 「실수」
1939. 4. 9. <소년조선일보>, 「어머니의 힘」
1939.4.16. <소년조선일보>, 「땜가게 할아범」
1939.4.23. <소년조선일보>, 「조그만 발명가」
1939.4.30. <소년조선일보>, 「실망」
1939. 5. 7. <소년조선일보>, 「동정」
1939.5.14. <소년조선일보>, 「우정」
1939.5.28. <소년조선일보>, 「큰소리」
1938년 『조선아동문학집』 수록, 「고양이」
1946년 『집을 나간 소년』 수록, 「눈사람」, 「뀡과 닭」
1947년 『토끼 삼형제』 수록, 「큰 뜻」


4. 수필
1939. 5 《박문》, 「부엉이」
1939. 6 《문장》, 「살구꽃」
1939. 9 《조광》, 「장발기長髮記」
1939.9.15~16 <조선일보>, 「지연紙鳶」
1939.12 《여성》, 「잊을 수 없는 그대여」
1941. 6 《신세기》, 「할미꽃」


5. 기타
1932.4 《신생》, (독자문단, 시) 「봄」
1938년 『신인단편걸작집』 수록, 「자서소전自敍小傳」
1938.10 《소년》, 「(시방 생각해도 미안한 일) 말을 다듬다 쥐어 박혀」
1939.1 《조광》, 「신진작가 좌담회」
1939.2 《소년》, 「(나의 중학입학) 입병이 나서」
1939.3 《조광》, 「내가 영향 받은 외국 작가-도스토예프스키」
1939.4 《소년》, 「(아까운 동무들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옛 동무」
1939.5 《소년》, 「(시방 생각해도 미안한 일) 숨어서 다들은 할머님의 욕」
1946.6 《민성》, 「소설 간담회」
1947.1 《협동》, 「새사람이 됩시다」


6. 작품집
1946년  아문각, 『집을 나간 소년』
1946년  정음사, 『포도와 구슬』
1947년  을유문화사, 『토끼 삼형제』
1947년  아문각, 『남생이』
1949년  동지사아동원, 『광명을 찾아서』
1949년  대학출판사, 『고요한 동』 (솔로호프 저, 이홍종과 공동 번역)
1962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수확의 날』

*작가연보와 작품연보는 원종찬 편 『현덕전집』(2009.2.15 도서출판 역락) 에서 인용.





*신연수 시인.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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