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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아라포럼/천선자/계층적 특징을 나타내는 고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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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28회 작성일 19-07-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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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아라포럼/천선자/계층적 특징을 나타내는 고려가요


계층적 특징을 나타내는 고려가요


발제자:천선자



1: 서설
먼저 고려가요의 특징을 살펴보고, 작품 하나하나를 분류한 다음 해석한 몇 개의 작품의 특징과 유래 등 살펴보고, 속요, 속요의 장르적 특징, 그리고 장르적 특성과 확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2. 특징
고려가요는 주로 민중 사이에 널리 알려진 ‘俗謠속요’를 뜻한다. 넓은 뜻으로는 ‘고려시가高麗詩歌’ 모두를 포함하며 ‘고려가사高麗歌詞’ ‘고려가요’를 줄여서 ‘여요麗謠’ 또는 ‘고려장가高麗張哥’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그러나 좁은 뜻으로는 「한림별곡」, 「죽계별곡」 등 한문계 시가는 ‘경기체가景幾體歌’ ‘별곡체’라고 하고, 이에 「청산별곡」, 「서경벌곡」, 「만전춘」을 통일시켜야 한다.
「가시리」 등의 시가를 흔히 속요라고 부른다. 그런데 경기체가와 속요는 형태상 공통점이 있다. 즉, 신라 사람들이 자기네의 노래를 ‘향가’라고 일컬은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사람들은 중국계의 ‘악부樂府’이니 하는 ‘정악正樂, 또는 ‘아악雅樂’에 대하여 자기네의 노래 즉 속악俗樂의 노래 이름을 ‘별곡’이라는 말을 붙여지었기 때문이다.
그 형식면에 보면 「한림별곡」이나 「청산별곡」 등은 전혀 다른 계통처럼 보이지만, 따져 보면 형태상의 특징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 음수율音數律은 주로 3음절이 우세하고, 둘째 음보율音步律은 일반적으로 3음보이며, 셋째 구수율句數律은 6구를 기준으로 하여 다소의 가감을 보이고, 넷째 대체로 전후 양절로 구분되는데, 「청산별곡」 등에서는 후렴구後斂句가 후절이 된다. 다섯째 일률적으로 수련數聯이 중첩되어 한 가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형은 점차 붕괴되고 변격형을 이룬다. 이 가요의 형식은 신라시대 향가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 특히 「정읍사」, 「정과정곡」, 「사모곡」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단련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는 향가와 같으나 음수율에서 3음절이 우세하고, 음보율은 3음보가 우세하며, 대체로 전후 양절兩節로 나눌 수 있는 점이 그 기본형에 접근하고 있다. 신라 향가 「처용가」가 고려에 이르러서 형식이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려시가는 향가의 발원적인 기능이 상실된 나례儺禮, 잡희雜戲, 백희百戲 등 무대 위에서 불리는 무악곡이 요구됨에 따라서 생겨난 형식이다. 이와 같이 향가문학이 쇠퇴한 후 고려시가는 사실상 정상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가문학의 발달이 완전히 침체된 것은 아니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을 따름이다. 고려시대에는 한문학이 문학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문학적 위치에서 겨우 유지하여 왔고, 평민문학과 귀족문학이라는 두 가지 문학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경기체가가 귀족의 문학이라면 속요는 평민문학이었던 것이다. 속요는 시조 이외의 시가, 즉 장가의 한 형식이 되는 것으로 평민들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우리글이 만들어진 후, 성종 때에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에 문자화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구전되어 온 가요가 문자화된 일례를 『정과정곡』에서 보면, 이 가요가 『악학궤범』에 전하였으나 『익제난고』 「소악부」에 한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구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고, 그 형식이 향가의 10구체와 비슷한 점으로 보아서, 향가의 한 발달 형식으로서의 고려가요로 그 맥을 이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전되어 온 평민문학으로서의 속요는 그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음이 특징이다. 「청산별곡」은 작품의 세련된 면모로 보아서, 「쌍화점」은 기록에 힘입어 개인이 지은 시가 아닌가 추정해봄 직하나 알 길이 없고, 「서경별곡」, 「가시리」 등은 원래 민요였을 것인데, 궁중악곡으로 채택되면서 다듬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귀족문학으로서의 경기체가는 대체로 작자가 알려져 있다.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의 제유諸儒, 「관동별곡」, 「죽계별곡」은 안축安軸, 「상대별곡」은 권근權近이 짓는 등 무신집권 이후에 한 느낌을 주며, 대체로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 서술하였음에 대하여, 속요는 평민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이 허식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내용은 그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문자가 없던 시대라 하더라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져 문자로 정착될 때까지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분류
1) 「정읍사井邑詞」
2) 「동동動動」
3) 「처용가處容歌」
4) 「정과정鄭瓜亭」
5) 「쌍화점雙花店」
6) 「서경별곡西京別曲」
7) 「청산별곡靑山別曲」
8) 「정석가鄭石歌」
9) 「이상곡履霜曲」
10) 「사모곡思母曲」
11) 「상저가相杵歌」
12) 「가시리」
13)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14) 「유규곡維鳩曲」
15) 「나례가儺禮歌」


(1) 경기체가
1) 「한림별곡翰林別曲」
2) 「관동별곡關東別曲」
3) 「죽계별곡竹溪別曲」


(2) 한자로 번역된 고려가요
1) 「계림요鷄林謠」
2) 「망국요亡國謠」
3) 「망국예언가亡國豫言歌」
4) 「완산요完山謠」
5) 「삼장三藏」
6) 「사룡蛇龍」
7) 「한송정곡寒松亭曲」
8) 「이원수요李元帥謠」
9) 「목자득국木子得國」
10) 「우대후牛大吼」
11) 「만수산萬壽山」
12) 「묵책요墨冊謠」
13) 「박노래」
14) 「남구요南寇謠」
15) 「아야가阿也歌」
16) 「보현찰普賢刹」


(3) 한자로 번역된 소악부 가요
1) 「장암場巖」
2) 「거사련居士戀」
3) 「제위보濟危寶」
4) 「사리화沙里花」
5) 「소년행少年行」
6) 「처용處容」
7) 「오관산五冠山」
8) 「서경西京」
9) 「정과정鄭瓜亭」
10) 「수정사水精寺」
11) 「탐라요耽羅謠」
12) 「서호곡西湖曲」
13) 「월정화月精花」
14) 「안동자청安東紫靑」


(4) 항찰로 표기된 노래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
心聞際天及昆심문제천을급근
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
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
望彌阿里刺망미아리자
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
赤烏隱現呼賜丁적오은현호사정


니믈 오ᆞᆯ오
ᆞ ᆞᆫ ᆞ하ᆞᆯ 밋곤
넉시 가샤
사ᆞ샨 벼슬마  ᆞ져

ᆞ라며 아리라


4. 작품의 해석


그  두 공신여
오라니 고ᆞ
자최ᆞᆫ 나토샨뎌  


                         (양주동 풀이)


임금님을 구하여 내신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매
넋은 갔지만
내려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바라다 보면 안 것이다.
그 때의 두 공신이여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자취는 지금에 나타났도다.


―「도이장가」 전문


10세기 초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이 고려 왕건을 위해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에 고려 예종은 이 두 장군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
향찰 표기로 된 이 노래는 신숭겸의 자손이 편찬한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수록되어 있다. 예종은 고려 16대 왕으로 이 작품의 제작 연대는 예종 15(1120)으로 되어 있다.
한자로 번역된 고려가요는 대부분 유실되고 『고려사』 「악지」와 『익재난고』 「소악」부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과 그 유래, 그 내용만을 짐작할 수 있다.


5. 한자로 번역된 소악부 가요


黃雀何方來去飛황작하방래거비
一年農事不曾知일년농사부증지
鰥翁獨自耕耘了환옹독자경운
耗盡田中禾黍爲모진전중화서위


얄미운 참새떼 날아가고 날아오네
한 해 농사 짓도록 놀기만 하더니
홀애비 늙은이 애써 지은 곡식
모조리 다 까먹는구나


―「沙里花사리화」 전문


온갖 부역과 잡세, 위정자들의 약탈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의 불만을 보여준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도 이 노래의 유래가 이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가혹하게 빼앗은 관리들을 곡식을 까먹는 참새에다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경기체가는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한림별곡」은 경기체가의 대표작이며,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부른다. ‘경기체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노래 말미에 ‘경景긔 엇더ᆞ니잇고 또는’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구를 붙이기 때문이다. 고려중엽으로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주로 한학자들에 의해 읊어진 한문 중심, 풍류를 즐기고, 향락을 즐기는 양반, 귀족, 특수계층의 창작물이다.
경기체가는 3음보, 분절체(분장체, 분연체), 후렴구 등의 특성을 갖는데, 이는 고려가요와 공통적인 요소이다. 아래 「한림별곡」의 경우에도 3음보, 분절체, 후렴구의 전형적인 형식적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원순문 인노시 공로사육
李正言 陳翰林 雙音走筆 이정언  진한림 쌍음주필
冲基對策 光鈞經義 良鍾詩 충대책 광균경의 양경시부


위 시장 경 긔 어떠하니잇고
금학사의 옥순문생 금학사의 옥순문생
위 날 조차 몇 분이닛고(유원순 문장 이인로 시 이공로가 사육문 짓고
이규보 진화가 다 같이 운을 달고
유충기의 대책 민광균의 경서 해석 김양경이 부 지으며
아, 시험장의 경치 그 어떠하리잇고
금의 학사의 훌륭한 문생들, 금의 학사의 훌륭한 문생들

아, 나까지 몇이나 되는가)


唐漢書 壯老子 韓柳文集당한서 장노자 한류문집
李杜集 蘭臺集 白樂天集이두집 난대집 백악천집
毛詩尙書 周易春秋 周戴禮記무시상서 주역춘추 주대예기


위 주조쳐 내 외온경 긔 엇더하니잇고
葉엽 태평광기 사백여권 태평광기 사백여권
위 역남경 경景 엇더하니잇고(당서, 한서, 장자, 노자
한유의 문집, 이백 두보의 시집, 백낙천의 시집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주례, 예기
아, 주까지 내리 외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태평광기 사백여 권 태평광기 사백여 권
아, 다 보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안진경 서체, 비백서, 행서, 초서, 전자체, 과두서, 우서남서를
양털붓, 쥐털붓 빗기 들고
아, 내리 쓰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오생, 유생 두 분 선생 오생, 유생 두 분 선생의
아, 글 쓰는 그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황금주, 백자주, 송주, 예주, 죽엽주, 이화주, 오가피주를
앵무잔, 호박잔에 가득 부어
아, 권하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유령, 도잠 두 사람의 유령, 도잠 두 사람의
아, 취한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분홍모란, 흰모란, 진분홍모란
분홍작약, 흰작약, 진분홍작약
석류꽃, 매화꽃, 노랑장미, 자줏빛장미
지지꽃, 동백꽃들이
아, 계속 피어 있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대나무와 복사꽃 고운 두 분, 대나무와 복사꽃 고운 두 분
아, 서로 보고 서 있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거문고, 저, 중금에다 대어향, 주기향의 쌍가야금
금선의 비파, 종지의 해금, 설원의 장고 울리고
아, 밤이 새도록 노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고
일지홍의 빗긴 피리, 일지홍의 빗긴 피리
아, 듣고서야 잠 들겠노라


봉래산, 방장산, 영주 삼신산에
좋은 누각 있어 신선 아이 데리고
녹발선인이 비단 장막 속에서
녹발선인이 비단 장막 속에서
주렴을 반만 걷고
아, 오호를 바로보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가
집 둘레에 버들 심고 대 심어서, 집 둘레에 버들 심고 대 심어서
아, 꾀꼴새 와 우니 반갑구나


당당당 당추자나무 조협나무에
홍실로 홍그네를 맨다.
정소년아 어서 와 줄을 당겨 밀어라.
아, 내가 가는데 남이 갈까
옥같은 손 마주 잡고

아, 함께 노는 경관 그 어떠하리잇가


―「한림별곡」 전문


위의 「한림별곡」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시형인 경기체가의 첫 작품으로 꼽힌다. 노래 내용에는 교만한 신흥 관료들의 방탕한 일면이 있지만 그 당시 문인관료들의 삶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는 대개 고종 3년(1216)으로 본다. 최충헌의 막부에서 일한 문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시형이 모색된 것이다.
『고려사』 「악지」에는 고려 고종 때 여러 한림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한림별곡」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래는 바로 이 시의 첫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인물들이 서로 지어 부르면서 흥취를 돋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사』 「악지」의 속악조와 『악장가사』에 전8연의 노랫말이 실려 있다. 이 두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악장가사』에 실린 노랫말에서는 이 노래 간운데 우리말 부분이 그대로 기록된 데 비해 『고려사』 「악지」에 실린 노랫말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점, 후렴 부분이 전자에는 ‘경景 긔 엇더ᆞ니잇고’로 후자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로 표기된다는 점이다.


5. 속요
‘속요’는 우리말로 기록된 최초의 시가, 또한 민속가요를 줄인 말이다. 또 민속가요란 말 그대로 민간의 속된 의미를 갖는다. 상충문화권의 정통가요인 가곡歌曲 혹은 시조時調에 비해서 정제되지 못한 노래, 곧 잡스럽거나 속된 하층문화권의 노래를 말하며, ‘속가’ 또는 ‘잡가’라 부르기도 한다. 속요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창작되고 향유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속요’를 뒷시대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고속가古俗歌’ 또는 ‘고려속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속요’는 고려속요를 가리키고, 조선시대 말기의 것은 잡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가요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속요의 대부분이 그 본래의 의미인 민간의 속된 가요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오히려 속요라고 지칭되는 대부분의 궁중악의 한 갈래인 속악(또는 향악이라고도함) 악장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므로, 민간의 속된 가요라는 의미로서의 속요라는 명칭은 고려의 속악으로 쓰인 가요에 전혀 걸맞지 않는다고 그 부당성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부당성을 감안하여 속요 대신 ‘속악가사俗樂歌詞’란 명칭을 사용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사적 장르 명칭으로 적절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속악가사란 궁중에서 속악으로 쓰인 가요를 총칭하는 개념일 터이므로 그것의 시대를 고려 때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고려사』 「악지」 속악부에 실려 있는 모든 가요를 비롯하여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의 가집에 실려 있는 노래 가운데 고려의 속악으로 소용된 가요가 모두 포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속악가사에는 우리가 역사적 장르 개념어로서 일반적으로 속요라고 지칭하는 가요군 외에도 사뇌가에 장르가 귀속되는 「정과정곡」 「한림별곡」 「관음찬」 등 불가계 가요와 「처용가」(고려시대의 것) 「나례가」 등 무가계 가요까지 두루 포함하므로, 여러 이질적인 장르 명칭으로 적절한 것은 아니다.

이밖에도 속요를 지칭하는 말로 ‘장가’와 ‘별곡’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는데, 장가는 작품의 길이가 길다는 뜻 외에 전혀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가에 대조되는 개념은 단가이고, 단가는 시조를 가리키는 것이 예사이므로 시조와 대조되는 장가는 가사가 오히려 더 걸맞기 때문에 속요를 장가라 칭하는 이는 없어지게 되었다.
‘별곡’이란 말은 경기체가와 조선시대 가사 작품에 상당수 붙어 있으니 이 또한 속요를 대신하는 적절한 용어라고 보기 어렵다. 이처럼 고려 후기의 특징 가요군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속요’, ‘속악가사’, ‘장가’, ‘별곡’, ‘고속가’, ‘고려속요’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6. 장르적 특성과 확산
속요의 개념을 ‘민속가요(민요, 무가, 불가)를 궁중의 속악가사로 전용하는 과정에서 생성, 발전된 고려시대 이후의 국문 서정시가로 정의할 수 있다. 다시 속요는 민요 계통, 무가 계통, 불가 계통의 셋으로 세분화 된다. 이 세 가지 계통 가운데 작품의 수로 보나 형식적 특성으로 보나 민요 계통이 중심적 위치에 놓이고 무가 및 불가 계통은 속요 장르의 생성과 전개에 있어서 주변적 위치에 놓임을 알 수 있다. 속요는 민속가요 가운데 민요를 궁중의 속악으로 전용한 과정에서 생성, 발전해 갔으며 이러한 속요가 더욱 세력을 얻어 장르의 발전 및 전성기를 맞게 되자 무가 및 불가를 수용하는 데까지 확산되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속요란 민요와 깊은 관련을 맺되, 일정한 거리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 거리는 개편, 윤색의 정도와 창의성의 정도에 따라 작품마다 순수성을 상당히 일탈하고, 그 대신 궁중의 속악 악장에 걸맞게 궁중의 호화스런 분위기, 장엄함과 고상함, 태평성대의 적극적인 추구 혹은 구나 어조가 변질되거나 그러한 의미의 지향으로 전환되어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우선 개작, 윤색의 정도가 별로 심하지 않은 「가시리」를 예로 들어 보자.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ᆞ리고 가시잇고 나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어딧디 살라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와 두어리 마ᆞᆫ
선면 아니 얼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셜온님 보니옵노니 나
가시 듯 도셔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이 작품의 중심 기조基調는 민요임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은 반복과 병치의 원리에 의한 민요 특유의 구조로 짜여 있다는 점, 표현에 있어서 관습적, 공식적,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 시어詩語에 있어서 민중의 소박한 일상어를 쓰고 있다는 점, 등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민요로서의 자연스런 흐름을 깨뜨리면서 행간行間에 나타나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는 아무래도 궁중 연악의 속악 가사로 소용될 때 첨가 윤색된 개작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이라는 투식어가 시적 통사구조상 부자연스럽게 첨가되어 있다는 점과 작품의 주제가, 님과의 이별이라는 깨어진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데다 그 어조도 비극적으로 표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를 여러 차례 삽입 윤색함으로써, 민요 본래의 주제나 어조와는 전혀 상반되게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으로 작풍作風 반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원전이 된 민요의 본래적 모습은 ‘나’이라는 투식어와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를 소가消去하고 보면 범세계적 민요 형태인 4행 1연으로 하는 2연의 민요 모습이 드러난다.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한 민요, 이 노랫말과 악곡이 『시용향악보』에도 실렸는데 『시용향악보』에는 제목을 「귀평곡歸平曲」이라 하였다. 남편과의 이별을 서러워하는 지어미의 일반적 서정을 노래한 세태 민속 가요라 할 수 있다. 남녀의 소박한 사랑과 이별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송축의 후렴이 붙은 것은 궁중으로 유입되면서 생긴 현상으로 본다.
속요는 원래 민간 사회의 민속가요들을 궁중의 속악으로 전용하면서 그 사설을 윤색, 조절하여 개작하는 과정에서 생성 발전된 장르이므로 속요라는 역사적 장르의 발생은 고려시대의 궁중음악인 속악(향악)의 영향이 크다.
악장이라는 명칭은 아직 그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악장이라는 상위개념에 속요, 경기체가, 찬불가, 시경시, 송사의 하위장르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혹은 『악장가사』, 『악학궤범』,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잡다한 양식을 다 포괄하는 개념으로도 논의되고 있다.
『시용향악보』는 편자와 편찬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악보집, 시가의 사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당악唐樂이나 송악宋樂과 같은 외래악이 아닌 우리의 향악을 정리한 악보집이다. 향악은 고대로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기존의 악보는 음의 높이를 지시할 수는 있으나 음의 길이, 즉 장단을 표시할 수 없었는데, 정간보법을 세종이 처음으로 창안하였다. 한 행을 32정간으로 나누고 그 칸 속에 률명律名을 써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낼 수 있는 총보를 만든 것이고, 세종의 정간보는 악보의 두 가지 요소인 음의 높낮이와 장단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뒤에 세조는 이 32정간의 정간보를 개량하여 1행을 16정간으로 하고, 그 16정간을 다시 6분하고 이것을 6대강으로 축소하였다. 『시용향악보』는 16정간 6대강의 궁상하보를 채용하였으므로, 세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악보의 성격상 궁중을 중심으로 하여 특수한 귀족사회에 한정된 문헌이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애 살어리 랏다
멀위라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니어 우니로라 새여
널리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가던새 가던새 본다
물아래 가던새 본다
앵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새 본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야

나즈란 다내와손뎌
바르란 또엇디 호리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 랏다
다ᆞ래 살어리 랏다
ᆞᆞ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ᆞ래 살어리 랏다
얄리 얄리 랼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사슴미 돗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누룩이 잘 발효되어서
잡와니 내 엇디리잇고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악장가사』


―「청산별곡」 전문


1)널리와 시름한 나도: 너보다 시름한 나도
2)물아래 가던새 본다: 물을 따라 날아가는 새를 본다
3)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이끼 묻은 쟁기를 가지고( 이 부분은 해석에 논란이 많다.)
4)나즈란 다내와손뎌; 낮에는 지냈지마는
5)어듸라 더니던 돌코; 어디에 던진 돌인가?
6)누리라 마치던 돌코: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7)믜리도 괴리도 업시: 미워한 사람도 사랑한 사람도 없이
8)ᆞᆞ자기 구조개랑 먹고: 해초와 굴과 조개를 먹고
9)드로라: 들었다.
10)에졍지; 미상, 부엌이 아닌지 추정
11)사미: 사슴이? 미상, (하지만 의인화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12)올아셔(돛대에)올라서? 돛대에 올라서(해석의 차이가 있다.)
13)가더니: 임을 찾는 화자의 방황을 말함
14)배부른 도긔; 배부른 독에
!5)설진 강수를: 술 도수가 놓은 강술을
16)비조라: 빚어라
17)조롱곳 누로기 누룩이: 조롱박 모양으로 생긴 누룩이
18)매와: 누룩이 잘 발효되어서
19)잡ᆞ와니 내 엇디리잇고: 가지 말라고 붙잡으니 낸들 어찌하겠는가?


이 노래의 짜임은 『악장가사』의 악곡 표시 단위로도 8단위이고, 『악학편고』에도 8곡이라 하여 8단으로 나누었다. 노랫말의 의미의 전개로도 역시 8연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를 고려하며 단락을 짓는다면 청산곡과 바다곡의 두 단락으로 나뉜다. 후반부인 바다곡에서는 제5연과 제6연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래 살어리랏다’ 다음에 ‘어듸라 더디던 돌코’가 연결되어야 의미의 진행이 전곡과 대립된다.
이 노래의 화자는 임과 함께하면 험준한 산이든 아니면 망망한 바다이든 가리지 않고 따르겠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비록 그런 궁벽하고 망망한 곳이라도 또 거기에서 험한 음식을 먹으며 고생을 한다고 하여도 임과 함께하면 행복하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위의 「청산별곡」은 화자의 성별과 신분문제가 논자의 입장에 따라 규정되었고, 특정 구절의 해독이 어렵다. 작자를 알 수 없더라도 그 노래가 궁중에서 불리기 위해 대악서라는 음악기관을 거쳐야 했고, 그 곳의 관리들이 특정한 시험을 통해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던 만큼 원가原歌를 개사, 편사하더라도 여러 부류의 화자를 개입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하였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유민’ ‘반란민’ 등이 있지만, 세 경우 모두 ‘녹슨 쟁기’나 ‘병기’가 화자와 관련한 중요 단서였다. 이 노래는 조선초 『납씨가』의 가사로 대체된 이유를 반란군의 투석전을 연상케 하는 ‘어디서 날아 온 돌인가’에서 찾은 것과 같다.
「청산별곡」의 화자를 「한림별곡」 작자 못지 않게 지식층이거나 귀족층으로 추측하였고, ‘사슴이 돛대에 올라’란 부분을 시적 상징이나 우의성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게 자리잡고 있다. ‘기적을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문학적 장치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정지(부엌)’에 어울리면서 ‘강수를 비조라’의 주제처럼 여성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기녀(1등급은 왕이 상용하는 대악서, 2등급은 음악연습과 교육 담당, 3등급은 시장의 경제활동을 관장하던 경시사에 소속된 기녀), 기녀들은 등급에 따라서 소속되었으며, 다양한 기녀의 역할을 볼 때 화자와 관련하여 주방기에 주목한 이유는 ‘일 무든 장글란 가지고’ ‘에졍지(부엌)’ ‘강수를 비조라’가 그들이 맡은 역할과 친연하기 때문이고, 재색을 갖춘 기녀이지만, 일정한 기량에 이르지 못해 술이나 반찬을 만들어야했던 주방기의 정서가 노래에 개입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8연에서 ‘내 엇디리잇고’에서 ‘내’는 다만 며칠 전에 술을 빚었던 사람으로 술 먹는 일과 무관하다. 배부른 독에 술을 빚었고 에졍지(부엌)이란 공간과 관련됨직한 인물로 주방기를 상정할 수 있다.
사슴이 돛대에 올라서/해금을 켜는 것은 이색(1328∼1396)이 동대문에서 궐문 앞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는 산대잡극을 목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긴장대로 공중 오르기를 평지같이 하며 라는 시의 일부분과 이규보(1168∼1241)의 『명황잡록』 내용에서 “머리 위에 긴 장대를 이고 목상을 올려”놓았다고 표현한 것을 통해 사슴, 장대, 해금은 화자가 실제 공연을 경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속가(민요, 무가, 불가) 등이 기녀들을 통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속악가사로 개사, 편사되어 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디ᆞᆯ  드대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대 졈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아롱디리 -『樂學軌範』


―「정읍사」 전문


1) 하: 달아.
2) 놈피곰: 높이, 높게, 곰은 강세조사.
3) 비취오시리: 비추어 주십시오.
4) 져재: 온 시장, 또는 전주시장.
5) 녀러신고요: 다니고 계신가요?
6) 드대 욜셰라: 진 데를 디디실세라(걱정이 됩니다).
7) 노코시라: 어디에 놓고 계시라.
8) 졈셰라: 내가 찾아가는 데 앞길이 어두울까 걱정된다. 남편이 그릇된 길에 빠질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아내의 심경을 표현한 말로 본다.


『악학궤범』에 우리말 노랫말가사가 자세한 춤의 절차와 함께 실려 있다. 『고려사』 「악지」에 이 노래가 백제의 속악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악학궤범」에 전하는 형태로 보면, 고려시대에까지 전래되어 고려의 속악으로 이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노랫말을 소개한다.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 정읍에 사는 행상인의 처가 남편이 장사 나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바위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른 노래라 하였다.
노랫말에는 남편이 무슨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근심스러운 마음이 배어 있다. 이 노래는 조선조에는 궁중의 나례儺禮에 연주되던 것으로서 삼국 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연주되었다.


솽화雙花店에 솽화 사라 가고신딘
휘휘回回앋비 내손모글 주여이다
이말미 이뎜店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리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잔디 티 덤ㅅ거츠니 업다


삼장三壯寺에 블혀라 가고신딘
그뎔 샤쥬社主 ㅣ내손모글 주여이다
이말미 이뎔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삿기샹좌上座 ㅣ네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귀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잔디 티 덤ㅅ거츠니 업다


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딘
우뭇룡龍이 내손모글 주여이다
이말미 이우믈밧ㅅ긔 나명들명
아로러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잔디 티 덤ㅅ거츠니 업다


술지븨 수를사라 가고신딘
그짓아비 내손모글 주여이다
이말미 이집밧ㅅ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싀구비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덜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잔디 티 덤ㅅ츠니 업다-『樂章歌詞』


―「쌍화점」 전문


1) 쌍화점은 쌍화떡을 파는 가게로 본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다. 그렇게 본다면 그곳에 상주하는 인물이 새끼 광대라는 점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대와 관련된 물건을 파는 곳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2)가고신딘: 갔더니만
3)휘휘아비: 회회족 남자
4)가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5)업다: 그 잠자리같이 지저분한 데 없다. 또는 그 잠자리같이 무성하여 아늑한 분위기를 내는 곳도 없다.
6)블혀라: 불공드리러
7)샤쥬寺主: 주지 곧,
8)술지븨: 술 파는 집, 곧 주점에
9)싀구비가: 싀구박은 술 푸는 바가지.


「만전춘별사」와 함께 대표적인 남열상열지사인 위의 「쌍화점」은 4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연에는 의미의 진행이나 심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첫 연에서 일어났던 내용에서 장소와 장소에 따른 요소만 바뀐 채 반복된다. 어느 장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그곳의 대표격인 한 남성(또는 남성성의 물체)와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 그 사실이 소문으로 퍼진다면 그곳에 상주하는 미미한 존재가 그 소문을 냈을 것이라는 추측 또는 소문의 사전 봉쇄용 엄포,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삼자가 참여하고자 하는 바램과 그에 대한 화자의 대응이 반복되는 것이다.
『고려사』 「악지」와 『고려사』 「열전」 등의 기록에는 이 노래의 제2연의 일부(여음을 제외한 제4행까지)와 내용이 같은 「三藏」이라는 노래가 한문표기로 소개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간신 등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국에서 기생 등을 뽑아 올려 새로 가무단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삼장」과 「사룡」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쌍화점」의 앞 4행은 “어느 장소에 그 장소에 적절한 목적이 있어서 갔는데, 그곳의 우두머리와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이 소문이 난다면 그것은 그 장소의 가장 미미한 존재의 소행일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으로 장소를 중심으로 긴밀한 구성을 이룬다. 반면에 그 장소가 갑자기 잠자리로 바뀌는 제5행과 제6행은 1∼4행에서 보이는 긴밀성에 비해 비약이 심하다. 이와 함께 여러 군데 보이는 「삼장」 노래가 이 노래 제2연의 제4행까지에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 『악장가사』에 전하는 「쌍화점」 노래는 『고려사』 등에 전하는 「삼장」 노래가 원 형태였으나 후일 궁중 연희로 정착되면서 뒷부분이 덧붙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正月ㅅ 나릿 므른
아으 어져 녹져 논디
누릿 가온디 나곤
몸하 올로 녈셔
아으 動動다리 (2연)

二月ㅅ 보로매

아으 노피 현
燈ㅅ블 다호라
萬人 비취실 즈이샷다
아으 動動다리 (3연)

三月 나며 開
아으 滿春 욋고지여
ᆞ미 브롤 즈을
디니ㅕ 나샷다
아으 動動다리 (4연)


―「동동」 일부


「동동」은 8건의 현대역 가운데 직역과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5건, 의역이 3건 있다. 직역한 연구자는 김태준, 홍기문, 박병채와 전규태로 이들은 원전의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시어에 치중하여 현대역 하였으며, 의역한 연구자는 지헌영과 최철, 박재민으로 시적 의미를 따라 가면서 가역하였다. 직역이든 의역이든 간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여음의 처리 문제이다. 대체로 고려속요의 여음은 무의미한 조흥구로 처리되기 때문에 의역에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직역에서도 옮기지 않은 경우가 있다. 박병채가 여음을 옮기지 않은 것과 홍기문이 옮기되 괄호 안에 둔 것도 이런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헌영은 여음의 시적 기능을 한껏 살려 번역하였는데 자못 흥미롭다. 그는 “아으, 동동다리”를 “아으, 두리둥둥 다리리……”(1연), “아으, 두리둥둥 다롱다리”(2,5,8연), “어허, 둥둥 내사랑 두리둥둥”(3,6,7,10연), “아으, 둥둥 내사랑아, 두리둥둥”(4장), “둥둥 내사랑이야 어허둥둥둥 두리둥둥”(9연), “어허 둥둥 내사랑 두리둥둥 내사랑 두리둥둥 다롱다리리……”(11연), “어허 둥둥 두리둥둥……”(13연) 등으로 옮겨 놓았다. 이는 각 장마다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읽어 여음에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계층적으로 나타나는 고려가요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귀족층과 특수층에서 향유하던 고려가요는 사물, 경치, 사람의 이름으로 나열, 서술하였고, 또한 시어도 단조롭고 딱딱하지만, 이에 반해 서민층에서 부르던 고려가요(속요)의 특징은 소박하고 진솔한 감정, 일상의 언어와 그들의 삶(보릿고개를 넘으려고 새벽에 나가서 해질 때까지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노동에 시달렸지만, 노동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흥얼흥얼, 울분을 참치 못해 흥얼흥얼 하던 것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속요 “본래의 의미인 민간의 속된 가요가 아니었다는 문제가 제기되지만, 속요라고 지칭되는 대부분의 궁중악의 한 갈래인 속악 또는 향악라고 함” 설화나 민요가 개작, 윤색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경기체가인 「서경별곡」과 속요인 「가시리」는 민요에서 궁중악곡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전설이나 민요의 바탕에 깔려있는 극복의지는 토테미즘totemism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마다 민간신앙을 숭배하던 서낭당이 그것을 증명하고, 인간의 극복의지 속에 숨어있는 꿈과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의 정서라는 것은 시정신이고, 이러한 문화는 선조들의 영향이고, 또한 선조들의 삶이 우리들의 등불이고,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 『두산백과사전』, 동아출판사. 

2)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강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3)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강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4)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강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5)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6)呂增東 「고려노래 연구에 있어서 잘못 들어선 점에 대하여」, 『한국시가연구(서수생선생회갑기념농촌)』. 형설출판사, 1981, 101∼104편.

7)權正如, 「고려의 속악가사론고」, 『고려가요연구(국어국문학연구총서 2)』, 정음사, 1979. 

8)국어국문학회 편, 『고려가요 · 악장연구』, 태학사. 

9)한만영,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세종조문화의 재인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0)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강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11)이영태, 『고려속요와 기녀』, 경인문화사. 

12)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1984, 153∼

13)『목은선생집』 5, 『한국역대문집총간』 19, 경인문화사

14)『국역동국이상국집』 1, 민족문화추진회, 1980,

15)이영태, 『고려속요와 기녀』. 경인문화사. 

16)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전시가강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17)봉좌문고본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도의, 아박. 

18))김명준,『고려속요의 전승과 확산』, 보고사. 





*천선자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파놉티콘』. 리토피아문학상,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리토피아》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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