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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특집 오늘의시인/정미소/논골담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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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특집 오늘의시인/정미소/논골담길 외 1편
논골담길 외 1편
―묵호의 이야기가 그려진 골목
정미소
해질녘, 여든의 어머니와 바람의 언덕에 앉아서
집어등 불빛 가득한 검은 바다를 읽는 중입니다.
어머니는 만선의 오징어잡이 그물을 끌어올리듯
주름진 골목들을 두루미로 엮어 덕장에 엽니다.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젖은 담벼락에 재워 둔
낙서를 고무다라이 속 먹물로 게우며 훌쩍입니다.
바람이 바람을 밀어 올려 백열등 흔들며 우는 집,
층계마다 바다가 밀려 와 모녀의 등을 적십니다.
전갈자리 성좌가 슬그머니 내려 와 골목을 엮어
검은 바다 쪽으로 저인망을 펴는 담화가 됩니다.
안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소낙비 퍼붓던 병실의 링거에 꽂히던
진통제의 맥박이 가쁠수록
비를 보며 눈이 많이 온다고
탁한 동공이 수레국화 가득한 하늘길을
부종처럼 꾹 꾹 누르던,
여름, 그리고 가을이다.
거처는 눈에 익었는지
발부리에 두고 간 피붙이며 혈육의 보살핌 없이
숙면을 청하는지
두고 간 골목과 막막한 하루를 넘어서 또 하루,
그 너머의 근심이 움푹 패이던
눈자위의 허공이 텅 비어서,
남은 골목을 주웠으면 황금옷을 입었을까
너 없어 쓸쓸한 가을이다.
<신작시>
맷돌호박죽병문안 외 2편
옆집할머니가 옥상에 심은 호박이
넝쿨째 우리집 쪽으로 건너 와 더부살이를 한다
넉살좋은 호박잎 속에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호박순치기도 걸렀는데 누런 엉덩이가 실하다
달덩이 같은 호박 머릿속에 굴리며 호박씨를 깐다
옆집할머니 몰래 호박마차 타고 할로윈 파티를 연다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고 죽 쑤는 상상을 하다가
몇 달째 꿀 먹은 벙어리 된 할머니의 안부를 여쭌다
지병인 치매가 심하여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시란다
맷돌호박이 할머니의 위중을 알아 뙤약볕 건너 왔다
뭉근한 죽 만들어 병문안 다녀오라는 보살심이다
호박찜 만들어 먹은 속이 뜨끔하다.
불심에 든 입춘
대웅전을 비집고 들어 온 봄햇살이
부처님 손바닥에 앉았다
공양미주머니 속에 담아 온
새순 같은 소원을 두루마리로 풀어놓으니,
스님의 목탁소리가 계곡의 잠을 깨운다
공양간에 들어 산나물밥 배불리 먹고
나른한 몸, 툇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눈 붙인다는 것이 그만 오후 네 시다
놀란 봄이 대웅전 기와를 비질하며 내려와
종무소 문설주에 입춘대길이 환하다.
남은 잠 깨우려고 경내 전통찻집에서
차 한 잔 주문하여 마신다.
찻값 받는 이가 잠시 선방에 든 사이
찻값은 부처님 장부에 올려두고 왔다.
아라뱃길의 자전거 다이빙
갯골 물새 발자국이 연둣빛 햇살을 건져 물비늘을 만든다.
나루터 벚나무들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줄지어 달린다.
굴포천 시원에서 한강에 이르는 물줄기는 안으로 익어서,
정서진 일몰을 재워 새 아침에 둥근 빛으로 말아 올린다.
정박한 물새 떼가 일제히 피어올라 아라뱃길이 환하다.
일렁이는 물결 속으로 은빛 자전거들이 일제히 몰려간다.
<시론>
가지 않았던 길의 쓸쓸한 노래
로버트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암송하며, 실의에 빠져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길은 두 갈래였고, 나는 하나의 길만 갈 수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내가 가지 않은 시의 길이 끝내 나를 놓지 않았다. 시는 단풍든 숲속의 좁은 길로 나와 함께 오래 걷고 싶어 한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였기 때문이다. 중곡동 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자취방을 구하고, 부모님과 화양리 재래시장에서 밥상이며 세간살이를 사서 살림을 차렸다. 바다와 느긋한 하늘과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시골버스를 타고 오일장 구경을 하던 태평함이 서울생활에 멀미가 났다. 부모님께서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가시고 나는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조나단브로드스키의 작품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를 한다. 우 우, 영가로 흐르는 화성이 향수병에 시달리는 젖은 발목을 잡는다. 허옇게 부르튼 입술, 비어있는 동공이 음계를 타고 쇳소리를 낸다. 황사 들이치는 사월의 목젖을 들여다본다.
―자작시 「 노래하는 사람」 부분
학교에서는 연례행사로 축제가 열렸다. 문학작품 공모에 시를 응모했다. 첫해에는 최우수상을, 다음해에는 대상을 받고 그 기억이 아직도 두근거린다. 교문 앞 큰 게시대에 대자보로 적힌 내 이름과 작품명, 학보에 실린 심사평과 황금찬, 석용원, 최은하 교수님의 성함도 또렷하다. 최은하 교수님께서 응용미술을 전공하던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 너, 시를 써 볼 생각 없냐?” 나는 단박에 “없어요.”했다. 그리고 미술대학을 졸업하여 30년을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시는 잊었다. 고향이 아닌 안양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학부모님의 소개로 장순금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장순금 시인이 나를 데리고 가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께 소개하였다. 그렇게 시가 왔다.
첫 시집 『구상나무광배』를 엮으면서 젊은 아버지의 죽음과 가난과 행상을 모르던 어머니가 가파른 골목을 오르내리며 오남매의 생계를 일구던 상점들의 이름이 아팠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꽤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더 많은 돈을 불리시려고 운수사업을 하시다가 망하고 건강마저 잃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 몰래 매일 바닷가에 나가서 울었다. 검은 바다에 오징어잡이 배가 집어등을 밝히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철이 들었다. 어머니가 과자대리점에서 과자를 받아서 지금은 묵호등대를 정점으로 ‘논골담 벽화의 길’로 조성된 골목골목의 상점들에게 과자를 납품하는 행상을 시작하셨다. 어머니의 행상으로 오남매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 올 수 있었다. 두 번째 시집 『벼락의 꼬리』를 발간하며, 현재 내가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집의 문을 두드리는 미혼모와 며느리가 가출한 가정의 사남매를 키우는 할머니의 한숨을 놓칠 수 없었다.
열아홉 엄마가 아가를 안고 어린이집 현관을 들어선다.
포대기에 싸인 아가가 엄마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친다.
아가야 울지 마라 착하지 엄마는 캠퍼스의 새내기란다.
미분과 적분에 흔들리다 신명나게 들어 선 새봄이란다.
첫돌지난 대문니가 맘마맘마 하는구나, 배냇짓하는구나.
엄마는 단칸방 월세며 너의 기저귀, 분유를 사야한단다.
알바로 45초만에 햄버거를 한 개씩 만들어내야 한단다.
―자작시 「 열아홉 엄마의 딸」 부분
나의 시는 허물어진 담벼락과 초미세먼지를 견디고 피어 난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과 놀이터에 떨어진 아가의 외짝 신발로부터 온다. 여든이 된 어머니의 몸에 일가를 이룬 한방파스, 물파스, 동전파스, 쿨파스, 케토톱의 향기로부터 발원한다. 하마터면 잃을 뻔한 숲속의 두 갈래 길에서 시에게 등 떠밀린다. 시의 숲은 고요해서 좋다. 특히나 나무에게 말 걸기는 비밀보장이 잘 된다. 사람의 숲에서 속내를 풀었다가 비밀이 소문이 되어 돌아 온 뒤통수를 잘 아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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