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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특집Ⅱ내 시의 스승/최성민/시詩의 아버지이신 이가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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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특집Ⅱ내 시의 스승/최성민/시詩의 아버지이신 이가림 선생님
시詩의 아버지이신 이가림 선생님
최성민
문학 계간지 《리토피아》 주간인 장종권 시인의 아버님 부고訃告 소식을 문자로 받았다. 학기 초라 무척 바쁘지만, 시인으로서, 같은 학교의 직장 선후배 선생으로서 쌓아온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어, 다른 일들을 모두 제쳐놓고 조문弔問하기 위해 달려갔다. 항상 건강하고 추진력 있게 활동하던 장종권 주간을 오랜만에 보니, 조금 수척해 있었다. 아마도 아버님과의 영별永別이 힘들었구나 생각했는데, 그동안 당뇨糖尿 때문에 고생하였고, 식단 조절을 한다고 하였다. 조금 이른 시간에 조문을 가서인지, 문상객이 많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필자의 시詩에 영향을 준 시인이나 선생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컨대 이가림 선생님이라고 즉답하였다. 그랬더니 사나흘 안에 가림 선생과 필자와의 관련한 글을 써내라고 한다. 이게 웬 날벼락!
하지만 써 보겠노라고 수락을 하였다. 청탁해준 장종권 주간에 대한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가림 선생님께서 병중에 계실 때 수차례 찾아뵙기를 청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시거나, 필자의 사정이 안 되어서,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뵙지를 못한 죄책감과 장례를 치르는 기간에도 장례식장을 지키며, 제자로서의 노릇을 다했어야 했는데, 본인의 선친先親이 돌아가신 지 채 1년도 안 되어서 나 자신조차 추스르기 어려운 사정이었고, 개인적으로 처한 말 못할 현실 상황 때문에 심적인 고통이 최고조에 달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은 극한의 지경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원고 청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984년 동인천에 있는 대한서림을 서성이다가 시인의 이름이 너무 시적詩的이고 표지 2의 사진이 특이한 시집 한 권을 발견한다. 바로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이가림 선생님의 두 번째 시집인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이다. 아름다울 가嘉 수풀 림林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시인이, 유리창 넘어 얼굴을 내밀고, 장발을 한 신사가 어딘가를 갈망하듯 쳐다보는 모습의 사진이 너무나 문학적이어서 좋았다. 언젠가는 꼭 한 번 찾아가 보리라 다짐하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시집을 밤새워 읽고 또 읽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 시집에서 “60년대 후반에서 이가림이 나온 근처가 새로운 변모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동양적인 사색과 서양적인 이미지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시편들을 읽으며,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 창작 방법을 음미하며 습득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필자는 인하대 국문학과를 다니는 습작 시절을 지나고 있는 젊은 문학도로 열정만 가득할 뿐, 시의 본질이나 시 창작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 배우고 익히는 것이 없어 고민하던 와중渦中에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에 가림 선생님이 쓰신 후기의 “허공에 떠 있는 언어의 쓸모없는 나열이나 장난은 진정한 가치에 이르려는 길을 방해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라는 말씀은 나에게는 소중한 참고서나 지침서에 다름없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시집을 10년에 한 번씩 내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그렇지만 숭실대학교까지 찾아가서 가림 선생님을 만날 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거의 매주 적게는 2-3편에서 많게는 십여 편의 시를 창작하여 당시 인하대학교에 재직하고 계시던 김재홍 교수님께 보여드리곤 하였다. 정말로 고마운 것은 시詩로서의 격을 갖추지도 않았을 습작 시들을 살펴주시고, 불필요한 시행을 사정없이 빨간 펜으로 삭제해주시고, 필요한 조언을 조곤조곤 적어주신 김재홍 교수님에 대한 고마움은 뼈에 사무친다. 그렇게 새가 방앗간에 들고나듯이 뻔질나게 김재홍 교수님의 연구실을 다니던 중, 어느 날 이가림 선생님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를 말씀드리며, 한 번 뵙고 싶은데 숭실대학교까지 가서 만나 뵐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한참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우리 학교 불문과에 이계진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 이계진은 그 당시 상당히 유명하던 아나운서 이름이어서 더욱 놀랐다. 그렇게 이가림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학부를 거쳐 석사학위를 할 때까지 종종 찾아뵙고 맛있는 차를 얻어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가림 선생님과의 본격적인 만남은 1992년 《시와 시학》 겨울호에 「양수리 행」을 비롯한 9편이 시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호 신인상 심사를 맡아 해주신 분들이 서울대학교 오세영 교수님과 가림 선생님이셨다. 심사하신 분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가 신인상 수상식에 참석하여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다. 그런 인연으로 매년 새해 인사를 드렸고, (언제나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가림 선생님과 사모님이신 김원옥 원장님(전 연수문화원 원장님)과 함께 나누던 담소와 좋은 음식 특히 백김치가 너무 시원하고 맛있었다고 기억함) 아프시기 직전까지 매년 십여 차례씩 개인적으로 만나 선생님의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들, 예를 들어 선생님의 필명筆名인 가림嘉林을 고등학교 때 은사인 신석정 시조시인이 지어주셨다는 것이나, 대전 MBC 피디 시절 이야기, 그리고 프랑스 유학 시절의 추억과 낭만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난다. 특히 시에 관한 선생님의 관점이나 신념 그리고 언어의 긴장성에 대해 말씀해주실 때는 정말 나의 시작 인생의 큰 도움이 되었다.
가림 선생님께서 가장 많은 도움과 다정한 조언을 해주신 것은 2000년도에 시와 시학 출판사에서 나온 필자의 첫 시집 『아나키를 꿈꾸며』를 출간하면서이다. 우선 시집의 해설을 기꺼이 써주신다고 해서 너무나 감사하였으며, 특히 첫 시집을 묶으면서 시집의 가제假題를 ‘아들에게’라고 적어서 드렸는데, “최성민 시인은 아나키즘의 이념적 메시지를 시 속에 직접적으로 투여시키거나 발언하는 따위와 같은 경직된 자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건강한 윤리의식을 가진 지닌 시인의 길로서, 딱딱한 전투적 이념을 앞세우는 아나키즘의 ‘정치학’을 향해서가 아니라 넓은 인간적 아나키즘의 열린 ‘시학’을 향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는 해설을 보여주시면서, ‘아나키를 꿈꾸며’로 제목을 변경하자고 제안하셨을 때, 선생님의 시에 대한 통찰력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시집을 준비하는 몇 년 동안 ‘유치환 시와 아나키즘’ 연결하는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아나키즘에 심취해 있었고, 은근하게 첫 시집에 그런 아나키즘의 정신을 담고자 노력하였지만, 시집 전면에 ‘아나키즘’을 내세우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워서 제목을 ‘아들에게’라고 했던 것인데, 시집의 해설을 쓰시면서 필자의 심정을 통찰하고 제안해주시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림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4년이 되어가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활동하던 문인들이건 문학과 지성에서 발을 담고 있던 문인이건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으며, 신인의 시인부터 원로 시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던 가림 선생님. 동료 교수들이나 동년의 문인들에게 ‘가림스키’라 친근하게 불리던 선생님이 보고 싶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하셨고,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셨지만, 필자의 마음속엔 절대로 잊히지 않을 위대한 스승이자 시의 아버지인 가림 선생님을 가슴속으로 목 놓아 불러본다.
*최성민 1992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아나키를 꿈꾸며』, 『도원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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