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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박분필/논골 동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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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박분필/논골 동네 외 1편
논골 동네 외 1편
박분필
처음에는 아마도 다랑이 논이거나 밭이었을, 이곳에 집들이
아슬아슬 얹혀있다
나는 이 층층의 동네에 가장 작은집 한 채를 갖고 싶고
명태도 떠나고 오징어 대구도 어디론가 가버린 묵호 앞바다에서 하 세월
몸부림만 쳐대는 묵빛 파도를 걷어와 바지랑대에 널고 까슬까슬 고르게
손질하면서 희끗희끗 말리고 싶어지는
그 근원이 궁금해서 눈을 감는다
천 년 전 가장인 내가 묵직한 그물을 들고 비탈진 계단을 올라온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 가장 작고 허름한 너와집에서 뒹굴 듯 달려
나온다
아, 돌아오고 싶었던 천 년 전 내 고향
맨 꼭대기 집에서 서너 계단 내려서면 집, 또 서너 계단 내려가면 집
그렇게 아랫집 어깨에 윗집이 걸터앉아있는 층층의 동네
쌓아올린 탑처럼 보이는 집마다 명태를 말렸던 바지랑대에 비린바람이
펄럭펄럭 말라간다
바지랑대를 지탱하던 못 자국에서 붉은 물이 흘러나와 꾸물꾸물 기어가는
마당을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
천 년 전에 찍은 내 발자국, 막 증발 중이다
빗방울 녹턴
문밖에서 소리가 난다
섣달그믐이 몇 번 지나고 추석 대보름이 몇 번이나 돌아오도록
소식 없던 아버지 발소리가 추적추적 마당으로 들어오신다
발소리만 무겁게 돌아와 저벅저벅 텅 빈 사랑방 방문 앞에서 웅얼거리고
덜컹덜컹 문고리를 흔들고 집안 곳곳에 발자국소리를 가득 심으신다
들판으로 달려 나가 꽉 막힌 물꼬를 트고 오신다
그동안 쌓인 뒤란의 댓잎을 긁어모으고 마당에 떨어진 닭똥을 쓸어내고
댓돌 위 식구들의 신발 속에도 잠시 고였다가 몸을 일으키신다
비옵니다
비옵나니……
식구들의 안녕을 주룩주룩 읊으며 흐르시다가 어느새 숙고사
홑이불처럼 깔린 안개 속으로
아버지 사라지신다
*박분필 1996년 시집 출간으로 문학활동 시작. 시집 『창포 잎이 바람에 흔들리다』, 『산고양이를 보다』 외. 동화집 『홍수와 땟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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