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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이진욱/고봉高捧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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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82회 작성일 19-07-1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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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이진욱/고봉高捧 외 1편


고봉高捧 외 1편


이진욱



일찍 고아가 돼 빈 몸으로 객지를 배회하며
뜬소문만 무성하던 사촌 형이 왔다


몸을 밑천으로 빌어먹어도 빈손이었던 형과
이장한 백부모伯父母의 산소로 함께 인사를 갔다


봉분 넘치도록 삐비꽃이 피었다
꽃에서 고슬고슬 익은 밥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고인이 된 뒤에도 백모伯母는 알았던 거다
남겨놓은 자식이 배곯을세라
밥을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린 것이다


어린 삐비꽃을 오랫동안 씹으며 형은 몰래 울음을 감추었다

적막함만 쌓이던 봉분에 뜨거운 배후가 생겼다


삐비꽃이 또 한 상 올라왔다





책 이사



누수 때문에 벽을 도배하게 되었다
책장을 들어낸 뒤 책을 솎아냈다
읽지 않으면서 버리지도 않았던 책도 묶었다


전공서적보다 시집이 많아지고
산 것보다 서명 받은 시집이 더 많아졌다
미뤄두었던 시집의 젖은 낱장을 한 장 한 장
공손히 받쳐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버릴 수 없는 불안에서 출발한 검열이
몰살시키지 못한 미련으로 쌓였다


책갈피에서 잊고 있던 고지서가 나오고
어떤 책은 문장보다 아름답게 핀 곰팡이를 가졌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감성과 정신이 바짝 일어서도록 내리치는 죽비의 힘도 숨기고 있다
지금 묶여지는 책들은 한 때 피난처였고 요람이었다
아무 때나 꺼내먹을 수 있던 끼니가 되기도 했다
가슴으로 젖어 들지 못한 책과 헤어짐을 앞두고
물 먹은 시집을 천천히 정독했다


살아남은 지식이 죽은 행간보다 쓸모없을 때도 있다





*이진욱 2012년 《시산맥》으로 등단. 시집 『눈물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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