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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이문희/저녁산책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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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신작시/이문희/저녁산책 외 1편
저녁산책 외 1편
이문희
흔들릴까봐 바깥으로 나왔어요
꼬리 끊긴 연처럼 마음은
하늘을 몇 바퀴째 빙빙 돕니다
도통 내려올 생각조차 안 하죠
걷다보면 지독한 외로움도 풀어져 안개 걷히고요
죽일 것 같은 미움도 절망 언저리에 가라앉기도 하는데요
이젠 절망 뒤에 희망이 온다는 말
믿지 않아요
절망은 그냥 절망이죠
못된 남자처럼 헤어지면 되요
아름다운 절망이란 없으니깐요
습관처럼 그늘에서 울다 나오면 되거든요
하루를 다 건너지 못한 마음을 일으켜요
붉은 가로등은 누구의 심장인가요
나를 관통한 빈혈의 시간들이 밤과 춤을 추어요
골목에서 마주친 밤고양이 눈빛처럼
나, 밤새 골똘히 어둠이나 쏘다녀야겠어요
칸나가 저녁 문턱을 넘는 풍경
칸나가 피었는데 우린 왜 쓸쓸하죠?
시골 간이역 근처
허름한 여인숙 마당엔 유독 칸나가 붉었어요
그날 우리의 신음 위로 기적은 안달이 나 덜컹거렸고
누군가는 어둠의 아가리를 기어코 찢어대는지
밤새 비명을 질러대곤 했었는데요
누가 내 안에 칸나를 심어놓았나요?
저녁이 칸나의 붉은 울음으로 오고
젖은 목소리로 내 몸을 기웃거릴 때
몰래몰래 늙어가는 저녁이 스스로 주저앉을 때
어둠 속을 왕진하듯 다녀가는
칸나의 이빨자국
나는 어둠 한 장이 되어
정작 너에게로 건너가는 한 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나로부터 오래 돌아가기 위해 칸나가 저녁을 물고 오는
그 때
*이문희 2015년 《시와경계》로 등단. 의정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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