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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시/김정미/그늘꽃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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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신작시/김정미/그늘꽃 외 1편
김정미
그늘꽃
기억을 한 잎 씩 손질하다보면,
그늘이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는 우기의 계절이 쏟아졌다
갓 구운 노오란 달은 저녁의 힘이었다 음지는 음지대로 양지는 양지대로 서로를 껴안은 힘
벌레 먹은 나팔꽃에도 아침이 태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면 너무 먼 곳을 돌아와 피는 나팔꽃도 있었다
햇살을 돌아 꽃이 피기까지 녹슨 철문을 밀던 손은 고장 난 울음의 문,
꽃 속에는 우는 얼굴이 들어 있다
그늘진 담장에 기대어 울음을 씻던 날들이다
상처 속에서도 햇살을 만들고 물길을 만드는 다시 여름을 먹다보면
등을 가만히 쓸어주는 손이 따뜻하게 놓여있었다
그늘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늦은 귀가가 골목마다 피어나고 있었다
겨울이 울기 시작했다
겨울은 자작나무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바람 부는 숲은 통곡의 벽,
공중에 이마를 찧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바람이 대신 오래 울어주었다는 것을
제 안의 우거진 울음의 숲 하나가
천둥 번개로 통째로 불타버리고 나서야
빗방울과 바람이 새처럼 날아와 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토닥토닥 등 두드리는 깨진 울음의 손
후드둑 지상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바람의 흰 깃털
울어야 별이 되는 울음이 있다
닫아야 열리는 귀가 있다
자작나무에 앉아 새처럼 우는 겨울은
어깨 한 쪽을 내주고도 끝내 젖지 않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김정미 2015년 《시와 소금》으로 시 등단. 산문집 『비빔밥과 모차르트』. 시집 『오베르 밀밭의 귀』. 2017년 춘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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