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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단편소설/최임수/선인장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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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20회 작성일 20-01-29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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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단편소설/최임수/선인장 꽃


최임수


선인장 꽃



이렇게 하면 어때.
여자는 입술 언저리까지 번져나는 체액을 손등으로 쓰윽 거둬낸다. 그녀의 표정에서 이성의 껍질이 벗겨진 인간과 본능으로 눙쳐진 짐승의 모습이 교차한다. 그의 빗장뼈 부근에서 왈칵 슬픔이 솟구친다. 여자의 희디흰 목덜미에서 십자가를 단 묵주가 미끄러진다. 그것이나 벗어놓고 하지. 남자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게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우뚝한 그의 성기가 미약한 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수컷의 힘을 확인했는지 여자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스웨터에 묻힌 여자의 머리가 보잘것없이 작아 보인다. 그녀는 나이든 여자답게 서둘지 않는다. 두 팔이 무한대 기호 모양으로 휘어져 등 뒤에서 브래지어의 호크를 끊는다. 체조 선수처럼 벌렁 누운 채 바지를 속옷과 함께 한꺼번에 벗겨내는 것이 재빠르다.
어서 들어와.
그는 망설인다. 여자들은 알 리 없다. 무장 해제된 여자에게 남자는 그다지 달아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여자의 벗은 몸을 무연히 바라본다. 한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 있다. 빗장도 없는 성문이 열려 있고 그나마 지키는 이조차 없다. 게다가 여자의 눈에는 저항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그는 여자의 눈과 아랫도리의 거웃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지진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조금 전까지 심장 벽을 뚫을 듯 두드려대던 혈액 덩어리가 얌전하게 좌심방에서 빠져나간다. 시나브로 남자의 체온이 식어간다.
오늘은 그만하자. 남자가 말한다. 왜. 그냥. 싫증났어? 아니. 여자의 눈이 박제된 올빼미처럼 움직임이 없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이 지나간 이후다. 여자들은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을 때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생각은 때로는 잘 구운 팬 케익으로 발화되기도 하고 썩은 동물 사체처럼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여자는 그 낌새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꿈틀거린다. 벽 위로 눈길을 던지고 시트를 가슴 위로 당겨 올리는 것으로 개신거림을 끝낸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잘 헤아린다.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틀려 있지도 않다. 여자가 잠든 척하는 것은 여러 방편 중에 한 가지 보호색의 일종이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얼굴만 가리는 호모 어글리쿠스답게.
씻을게.
여자가 먼저 해야 될 법한 말을 남자가 먼저 한다. 그녀는 시트를 위로 당긴다. 샤워를 하면서 그는 뭔가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되어갈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지 모른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늘 보던 얼굴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거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는 3D 프린터라면 이 얼굴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을까 하고 곱씹는다. 씻을 것도 없는 몸을 애써 물기를 바르고 나와도 여자는 고개를 외로 꼰 채 꼼짝 않고 있다. 그는 한 참이나 주문을 까먹은 수도자처럼 시트 너머로 빈 눈길을 주다가 옷을 주섬주섬 껴입는다. 부탁이라고 다 들어주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남 사정 봐 주다가 애 밴다는 저자거리 얘기도 있다. 애당초 이런 거래는 성립이 되지 않는 원인 무효임에 명백하다.
그는 담배를 핑계로 한동안 머뭇거리다 벽걸이 TV 아래 몇 장의 지폐를 던져두고 방을 빠져 나온다.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여자에 대한 기억은 빗물 흐르는 창문 너머의 풍경보다 뚜렷하지 않다. 길게 앉은뱅이 식탁이 연이어 놓여 있고 식탁마다 변해버린 사람들이 네 명씩 바둑돌처럼 끼어 앉았다. 식탁 위에는 한국형 회식 자리의 전형적인 풍경 그대로 반찬 몇 가지와 가운데엔 해물 찜 냄비가 놓였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남자 하나가 목청을 돋우며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 따랐다. 삼십 년을 족히 뛰어넘은 세월을 비웃으며 그들은 처음부터 높임말은 배제했다. 여전히 변죽 좋은 녀석이 건배를 제의하고 모두들 목젖마저 삼킬 듯이 들이켰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펜대만 굴린 것처럼 보이는 백면서생의 얼굴도 보였다. 낯이 익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터넷은 까맣게 잊고 있던 동창들을 눈앞에 데려다 놓았다. 말이 동창이지 훈련소 입소를 앞둔 장정들을 한데 모은 보충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애당초 무슨 초등 동창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외제 자동차 딜러를 하는 동창 녀석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서 퍼왔는지 예쁜 그림과 함께 시나 현대인의 건강법 따위의 실용 지침을 휴대폰으로 보내주곤 했어도 그러려니 했다. 녀석은 동창의 덕을 실적으로 연결해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너 이번 정기 모임에는 반드시 나와라. 왜. 너 옛날 니 짝꿍 기억나냐. 아니. 짜식, 형옥이 기억 안 나냐, 나도  기억하는데. 형옥? 그래 이번에 형옥이가 나온대. 너 6학년 때 걔 땜에 죽고 못 살았잖아. 
그에게 전화로 모임 일시와 장소를 알려준 딜러 동창은 식탁을 넘나들며 명함을 뿌렸다.
그는 좌중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좌측 맞은편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잘 갈무리된 옷맵시와 방금 미용실을 빠져나온 듯 흐드러진 웨이브의 머리카락, 서글서글한 눈매가 설면하지 않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딜러 동창이 턱으로 한 여자를 가리켰다. 마침 여자도 그를 무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의 뇌리에서 아스라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결들이 맞물려 돌아갔다.
몸피에서부터 옷매무새까지 애당초 둘은 격차가 컸다. 무엇 하나 여자애보다 나은 게 없었다. 심지어 키마저도. 짝으로 앉을 때부터 그는 스스로 왜소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곁에 나이에 비해 성숙한 여자애와 같이 앉았다는 것과 어느 것도 그 아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는 예정된 열패감에 두 볼은 자글거렸다.
수업시간에도 여자아이는 자신감과 활달함으로 빛이 났다. 풀지 못하는 문제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문제점을 생각해 선생님에게 질문하곤 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여자아이에게 부러움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엄마가 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에게 교사의 존재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무게로 늘 경외의 대상이다. 그랬다. 그 아이의 엄마는 큰 바위 얼굴을 한 존재였다.
그는 자폐아처럼 늘 침묵했다. 마치 그럼으로써 여자애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담임이 수업 중에 뭔가를 물었을 때 알고 있는 것이어도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여자아이가 복화술로 그에게 답을 속삭였다. 그래도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불러주는 대로 주워섬긴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너 바보니?
그랬어도 그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가장 밝은 선홍빛으로 반들거리는 여자아이의 아랫입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자, 오늘 명화 국민학교 29회 재경 동창회를 여러분의 성원으로 잘 치러지게 된 것을 다 함께 자축합시다, 하고 소리높일 때까지 그는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삶을 이루었는지 터놓고 말하지 않는 낯선 사람들. 한 학교의 이름 아래 이토록 끈끈하게 들러붙는 무가내. 어디선가 술잔을 들고 어깨를 툭 치며 ‘야 정말 반갑다’ 라고만 외치는 사내들의 무람없음. 그는 그들의 술잔을 받아주며 명정의 늪으로 몸을 방치했다. 2차는 내가… 뭐야 내가… 소리를 들으며 그는 화장실에서 약간의 음식물을 게워냈다.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여자의 음성이 분명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술 못 하네, 그렇게 안 보이더니. 그는 이 여자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 그는 명정 속에 흐릿하게 한 자태를 읽었다. …너 형옥이? 여자의 안구가 반짝거렸다. 알아보긴 하는구나. 근데 불성실하게도 넌 별로 안 변했네. 여자는 말끝에 입 꼬리를 세웠다. 어때, 술 한 잔 더 할 수 있겠어? 보아하니 이미 맛이 간 거 같은데. 그는 여자가 함부로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흘렀는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한 여자아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해야 할 말을 구하려 애썼지만 그 옛날처럼 어휘의 빈곤을 느꼈다. 대신 술기운이란 지원군이 그의 초라한 자존감을 부추겼다.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할 수 있어.


거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지질했던 내 초딩 동창. 너에 대해 꿈도 꾸지 않았어. 거기 나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너란 애는 내겐 남자도 아니었으니까. 그날 네 얼굴을 봤을 때 30년 전의 얼굴이 보였어. 중년의 연배지만 당시의 네 영혼 그대로더라.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가 뛰어 들어 온다면 제일 먼저 달아날 것 같은 조바심. 편하게 앉았으나 하늘 그네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듯한 불안. 늘 남에게 당하고만 살았을 법한 눈매. 변한 게 없었지. 변하지 않았다는 건 재미없는 일이지만 다른 말로 고유의 순수성을 지켜냈다는 말과도 같아. 난 그러지 못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내가 순수했다고 생각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옆에 앉은 지질한 머슴애를 챙겨주고 안스러워 하는 것으로 내 우월감을 즐기긴 했지만. 오해하진 말고. 그렇다고 불쌍하게 여기진 않았어. 선생님인 엄마가 날 그렇게 키웠거든. 교사를 엄마를 둔 나를 넌 얼마나 부러워했는지도 기억해? 너뿐만 아니야. 당시 나를 알고 내게 얼마나 많은 애들이 해코지했는지. 참 좋은 세상이다. 이렇게 손 편지로 쓸 것도 단 몇 초 만에 보낼 수 있으니.


선배, 시간이 남는데 노래 한 곡 더 넣어야 하지 않겠어요?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라폰으로 김 아나운서의 음성이 엔지니어 부스를 울렸을 때까지 그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뒤에서 청취자들의 문자를 갈무리해서 프롬프터에 뛰우는 작업을 하던 서브 작가가 피디님, 하고 외치지 않았으면 그는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사람이었다. 인터라 넷으로 뮤직뱅크를 뒤져 노래 한 곡을 뽑아 모니터 큐시트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그는 그를 딴 세상에 데려다 놓은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알콜로 인한 블랙아웃이 부쩍 잦았지만 어제 일은 부분적으로 기억했다.
브랜드 이름은 알 수 없어도 들으면 알 만한 스타일의 옷맵시와 얼굴 곡면을 도드라지게 하는 귀걸이, 손잡이가 낡았어도 반짝이는 엠블럼이 붙은 손가방. 눈웃음치면 자글거리는 눈주름만 아니라면 여자는 세월을 잊고 있었다. 다만 눈두덩 아래로 그다지 밝아 뵈지 않는 색조가 자신의 삶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여자는 그에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무슨 개발이라고 씌어진 상호 아래 여자의 직함이 ‘실장’이라고 찍혔다. 오래전에 다니던 곳인데 연락처 대신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그에게도 명함이 없냐는 말에 그는 명함 들고 다닌 지 오래라고 말했다. 여자는 자신의 명함에 찍힌 번호로 지금 전화해보라고 했다. 마지막 번호를 누르자 여자의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걸로 명함을 대신할게. 두 사람은 그다지 말을 많이 주고받지 않았으나 그는 여전히 듣는 편이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건 교사였던 여자의 엄마가 오래전 퇴임하고 지금은 치매로 요양원에 있다는 것, 남편과 아이들 근황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는 것, 대체로 행복하냐는 물음에 낯빛이 여리게 흔들렸다는 것.
그리고 둘은 곧 헤어졌다.


대개 네 가지 정도의 운명의 틀 이란 게 있어. 그걸 편하게 프레임이라고 부를게.
같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고 누런 빛깔의 얼굴을 지녔으며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첫째 프레임이야. 둘째. 공산사회의 북한이나 구소련에서 태어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체제 아래 최초로 여자가 수장으로 뽑힌 땅에서 전시도 아닌 평화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
셋째 프레임.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낀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강남에서 잘 나가는 사업을 굴리는 남편과 학원 다니기에 소년기 추억도 말아먹은 아이 둘 거느리고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오래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차를 몰고 다니는 나름의 형편. 어느 날 추호도 내키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이란 여자가 내몰다시피 해서 나와 본 동창 모임. 그리고 넷째 프레임. 그 어줍은 분위기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 꼬락서니의 비현실적인 내숭. 그러니까 셋째 프레임에 당면한 개개인의 판단, 사고 또는 행동 양식 등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 방식이 되겠지. 너를 만난 건 물론 세 번째 프레임에서이고. 이 네 가지 프레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여자 말대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건 셋째 프레임일 터이고 넷째 프레임에서 어떻게 해야 했는지 그로선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예민하다면 자신의 삶이 일거수일투족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어야 옳을 것이다. 집 밖을 나서면서부터 자신의 행적이 낯선 렌즈를 통해 낱낱이 추적되고 있는 현실. 그것이 아니라도 인터넷 포털에 이름만 쳐넣어도 그가 공익적 일을 하고 있다면 그의 일과는 반 이상 노출된다. 자신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길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관심의 ‘배려’를 획득해야 한다. 여자에게 그런 무관심의 ‘배려’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로선 알 길이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팝송만을 골라 DJ의 친절한 곡해설과 함께 방송하던 프로그램에서, 자정 무렵 공부를 하면서도 이어폰으로 방송을 듣는 학생들 대상 프로그램에서도 여자는 익명을 가장한 흔적을 남겼다.
오늘도 우리 가족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남편, 그리고 없는 가정형편에도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이 음악을 함께 듣고 싶어요. 꼭 띄워주실 거죠. 차벨라 바르가스의 ‘라 요로나’.
DJ는 실시간 문자로 올라온 사연을 읽었다. 이어서 친절한 곡해설도 덧붙였다.
영화 ‘프리다’를 본 분이라면 영화 속의 ‘차벨라 바르가스’의 피를 토해내는 듯한 노래를 듣고 가슴 한 부분이 뜯겨 나갔으리라고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 차벨라 바르가스는 생전의 ‘프리다 칼로’와 한때 연인 관계였으니까요. 음악이 나갈 때 그는 DJ에게 사실 확인을 했다. DJ가 싱긋 웃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나가면서 DJ는 말했다.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에요. 시사 프로도 아닌데.  
 
그리고 또 여자를 만났다. 만나야 할 이유도, 딱히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동창회에서 대면한 후 몇 년이 흘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동안 그는 사연을 통해 얼핏 짐작한 것 외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여자가 의도하면 만날 확률은 남자가 움직일 때보다 반이 넘는다. 그게 남과 여의 섭리라고나 할까.
여자는 그에게 주변에서 적지 않게 서성거렸다고, 그것을 알고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는 것과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되물었다. 여자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의중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어릴 적 모습처럼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여자는 그가 지갑을 꺼내는 것을 호기 있게 나무랐다.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겠냐고 꽁냥거렸다. 양고기 꼬치와 중국 수입 맥주를 목젖 아래까지 차오를 때까지 마셨다. 여자는 혼자 지껄였다. 아, 뭐라고 얘기 좀 해봐. 그동안 살아온 스토리, 너의 히스토리 말이야. 혀가 살짝 꼬부라진 여자는 한참 지껄이다 말고 벙어리에게 다그치듯 그에게 투덜거렸다. 할 얘기 별로 없어.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 여자는 의표를 찔린 듯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히죽 웃었다. 여전하네. 지질한 내 짝꿍.
노래주점에서도 여자는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점수는 늘 100점이었다. 여자는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빠른 댄스곡에 맞춰 멋드러진 춤을 혼자 추었다. 여자가 그를 이끌었을 때에도 그는 마른 장작이 되었다. 여자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쁘와종. 불어로 독이라는 향기는 그의 변연계를 죽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춤을 추면서도 노래를 곧잘 불렀다. 그가 여자의 발을 몇 번 밟았어도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었다. 왜 그래, 너 바보니.
그는 노래주점을 나왔다. 여자가 따라 나왔다. 여자가 손목을 낚아채기까지 여자와 계속 함께 있을 생각이 없었다.
화났어? 여자의 언성이 필요 이상으로 높았다. 아니. 그럼? 우리 술 더 먹자.
 술집에서 여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여자의 손가방을 보았다. 몇 년 전 동창회에서 보았던 그 가방이었다. 손잡이가 닳아 보풀이 일어난 것 외에 바닥 귀퉁이도 헤어져 있었다. 여자가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우리 자러 가. 그는 가방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무덤덤한 표정을 향해 여자의 드높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우리… 섹스하자구, 섹스, 몰라? 그가 웃으며 술이 좀 과한 것 같다고 말했다. 너 나 좋아했잖아, 병신같이 그때는 말도 못 했잖아.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잖아. 오늘 날 가져, 많이 늦었지만. 왜 그래야 하느냐고 그가 물어보려다 그는 예의 또다시 말문을 닫았다. 그는 자문했다. 정말 내가 그녀를 좋아했을까. 양계 축사를 이어 개조한 단칸방에서 매일 저녁이면 난투극을 벌이던 부모. 그 난장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대나무 숲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대나무 잎들의 속살거림을 바다의 흰 거품 소리로 듣던 때. 무서움 따위는 아랑곳없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누군가 나를 이 나락에서 건져달라고 간구하던 여린 소망. 이슥해졌을 무렵 댓돌과 이어진 단칸방 창호 문을 열면 게릴라들의 시체처럼 널브러진 엄마와 아버지의 몸피를 가지런히 뉘고 창호 문 근처에서 외로 누워 잠을 청했던 그가 과연 한 소녀를 마음에 품었던 것일까. 순간 갑자기 까닭 모를 슬픔이 솟구쳤다. 그는 내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여자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래, 가자.


잘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늙수그레한 여자의 얼굴 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너 바보니? 하며 웃고 있는 여자아이 얼굴이 겹쳤다. 게슴츠레 감고 있던 눈을 어느 틈엔가 빤히 뜨고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그는 뜨악하다 못해 기겁했다. 여자의 목구멍에서 커다란 전갈 하나가 튀어나와 그의 목울대를 짓이겨놓을 것 같았다. 그는 여자의 몸 안에서 쪼그라들었다. 그는 애써 여자의 눈길을 피했다. 여자의 빗장뼈 위에 머리를 얹었다. 여자는 예의 같은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여자는 말한다. 술이 과했구나, 아니면 너 나이답지 않게 약하구나. 그러나 그의 클리셰는 빗나갔다. 뭔가 잊은 게 생각난 것처럼 여자는 그를 밀쳐냈다. 그리고 카멜레온처럼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의 의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짐작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도덕적이며 규범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가장 비문명적인 방식을 수용할 것. 그것은 명정을 이겨내며 수치심과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는 특효의 수단이라는 것. 강요된 감각이라도 애써 거부하지 않을 것. 바야흐로 그의 시야에서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 얼굴은 간 데 없고 언젠가 본 듯한 외설 잡지의 여자가 그에게 윙크를 했다. 그는 자신의 일정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피돌기는 지휘관이 외치는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처럼 한 곳으로만 솟구쳐 올랐다. 잘 차려놓은 밥상을 받은 고을 수령의 흡족함으로 채 열기를 식히지 않기 위해서인 것처럼 여자는 그의 위에 올라갔다. 여자는 잘 훈련된 조련사 같았다. 불거진 곳과 후미진 곳의 지형을 건너뛰지 않고 물처럼 바닥을 차근차근 채웠다. 무장해제는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그는 좀 전에 자신을 올려다보던 여자의 눈 보다 더 매섭게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나약함과 연관된 모든 부정적인 것들, 이를테면 경솔함, 수치심, 예의에의 과도한 집착, 얼토당토않은 소심함이 화염에 휩싸여 사그라졌다. 대신 폭력과도 닮은, 예컨대 무모함, 과장된 용기, 정도를 넘은 호의, 비열한 집착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는 완벽하게 분리된 남성성의 실체를 들여다보았다. 종족을 절멸시키지 않기 위해 육체가 장치한 이토록 그로테스크한 보완성에 대하여 그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백기를 내걸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그의 빗장뼈 위에 머리를 얹고 말했다. 나쁘지 않았어.


너 혹시 날 비취(암캐)라고 생각하니? 남자 앞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잠재적인 비취야. 요염하고 정치적이며 때론 사악하고 관능적이면서 비합리적이지. 개중엔 철저히 위장된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어. 그렇지 않은 여자도 있겠지만. 그 여자들의 망막에 새겨진 시간에는 남자, 특히 아버지의 억압이 기록되어 있을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내 아버지는 엄마를 억압했고 엄마는 그걸 내게 풀었어. 나는 엄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항상 똑똑하게 살아야 했어. 나는 그동안 여자로 살기보다 한 인간으로만 살았지. 내 분노에 대한 보상은 일상을 묵묵히 견디며 투쟁을 내면화하는 거였어. 남편은 한 사람의 희생물에 불과했지. 하지만 아직도 피 철철 흘리는 그 희생물을 보듬고 살아. 아니면 어쩌겠어. 그게 내 마지막 프레임인걸.


얼마 후 그는 다시 여자를 만났다. 그날은 그들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었다. 그들은 술을 마셨고 여자는 이번에는 지갑을 열지 않았다. 여자의 외양은 이전보다 더 화사했고 가방 또한 다른 브랜드로 바뀌었다. 이번 가방은 잠금 고리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여자는 이혼 후의 생활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그럭저럭 견디며 살만하다고 답하고 여자의 눈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망막에 새겨진 시간이 흐릿하게 보였다. 취기에 편승해서 잠자리로 이끌지 않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문득 여자는 마치 식민지를 해방시켜주려는 총독처럼 선언했다. 선언문은 지나간 시간들을 모두 폐기 처분하는 포고령으로 채워져 있었다. 미안해. 나, 모두 거짓이었어. 그는 거짓의 대상이 궁금했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모든 거, 진실과는 반대편이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가방도, 그리고 내 명함도. 거기다 너와의 잠자리도 진실이 아니야. 널 사랑하지 않아. 그는 파리 한 마리를 재빨리 혀 속에 감춘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였다. 여자는 편년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업을 하던 남편은 어느 날 부도를 냈고 집안의 동산에는 붉은 딱지가 붙었다. 충격 때문이었는지 남편은 목덜미를 잡고 고꾸라졌다. 남편의 목 아래에는 감각이 사라졌고 단칸방의 지난한 세월 속에 불수의 남편을 케어하다 그날 동창회가 첫 외출이었다. 그나마 꾀죄죄했던 동창을 만나고 보니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정도로 정리했다. 여자는 만년체의 서사에서 단문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변환했다. 나, 지금은 고깃집에서 가위로 네 발 짐승의 살점을 잘라. 시급이 6870원이야.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지갑을 못 열어. 그의 눈을 더 크게 껌뻑이게 한 말은 다음 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사랑하고 나서, 아니 섹스하고 나서 10만 원 만 주면 안 될까. 동시에 여자의 눈에서, 늪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맑은 샘물 같은 눈물을, 그는 보았다.


‘여기 인터넷이라는 인류 문명의 눈부신 성과물에 힘입어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 만나는 곳, ‘나는 학교를 사랑해’ 사이트가 있다. 삶이 여물지도 완성되지도 않은, 체온만 뜨거운 아이들이 이제는 주름진 자신들의 삶을 정리 정돈하기 위하여 여울진 물 위의 얼굴처럼 흐릿한 모습들을 서로 발견한다. 여기저기서 환호작약하는 소리가 들리고 드높이 쏘아 올린 성가 뒤에 그들의 꿈을 모자이크로 꿰맞추어 복기해보는 것이다. 드물지만 때론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형해만 남은 추억을 먹이로 쪼며 사랑에 빠진다. 그것이 불륜이든 지순한 로맨스든 한 번도 꽃피운 적 없는 선인장을 바라보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낡은 시대의 풍속화는 휘발유의 유증기처럼 재빨리 증발되어버리고 오래전 앓았던 폐렴 자국같이 검은 형체로 결절되어 남을 뿐이다.’
그는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여자를 몇 번 만났는지 헤아려보았다. 한 달에 네 번 또는 대여섯 번. 만나는 날의 순열에 규칙성을 부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는 흔적이 읽혔다. 카톡 문자는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당일은 피차간에 금기 사항이었다. 환자를 돌보는 여자에게 당일이란 그간의 계획된 부도덕함을 모질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역시 부르면 달려나가는 콜 보이가 아니었으므로. 언젠가 여자가 말했다. 널 만난 날 저녁 남편이 좋아하는 전복을 사들고 갔는데 숟가락을 놓더라구. 왜 그러냐고 했지. 전복에서 낯선 남자의 냄새가 난대. 여자는 낄낄대며 웃었다. 슬퍼 징징거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낄낄대는 여자를 그는 몇 번이나 능욕했는지 모른다. 늘 움츠러들었던 남성성이 연민의 영역을 벗어나 어둡고 축축한 외설의 뒷골목을 서성거리자 난데없는 응징의 기세로 돌변했다고나 할까. 그의 속내는 늘 여자의 남편 편이었다. 그날도 여자는 그에게 귓전에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널 사랑 안 해. 그는 그날 전복값만큼 더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었다.
여자는 늘 상가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어 있는 ‘오피걸’ 광고 속 여자처럼 행세한 걸로 그는 기억한다. 샤워실을 들어서면 언제 그랬는지 칫솔 위에 짜놓은 치약.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가지런히 개켜진 속옷과 겉옷. 양말은 깨끗이 빨려져 화장대의 열린 서랍 위에 널려 있고 종업원을 시켜 귀신같이 가져다 놓은 캔 맥주 하나. 여자의 표현대로 결코 사랑이 아닌 섹스가 끝난 후 여자는 그의 귓전에 버릇처럼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상하게도 그에게 여자에 대한 사랑의 부담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여자를 떠올리면 그는 늘,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무엇이든 조건화된 것이라면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이 그와 여자가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서로 감지하고 있다는 신호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 흔한 카톡 문자의 빈도가 드물어졌다든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어투가 의미가 불투명한 시각에 찍힌다. 그것은 주로 여자가 일방적으로 던지는 방식이어서 여자의 단문은 외롭게 남겨진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여자의 반복된 언질 탓인지 그는 여자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다. 다만 여자에 대한 감정이 연민에 불과하더라도 그조차 어지럽게 널려진 넝마의 형태여서 정돈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케이프 베르데의 기타리스트 ‘바우’의 ‘혼코 디 마르’(바다의 포효)가 스튜디오에 울려 퍼질 때 즈음 ‘깨톡’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만날 곳과 시각을 찍어 보냈다. 만날 수 없다고 할 때는 답신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약속은 확정된다.
여자의 외양과 차림새가 편안하다. 옅은 분홍 립스틱을 한 아랫입술이 아름답다. 그는 예감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약간 불안에 휩싸인다. 끝내 집사람을 보냈어. 여자가 말문을 연다. 집사람이라는 대상은 보통 아내이기 십상이다. 남편을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혀에 민트를 올려놓은 것 같다. 한 달 전이야.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 우리. 그는 어디서부터 살을 발라낼 것인지 궁리하는 푸주한처럼 여자를 살핀다. 마지막 이른 곳은 역시 눈. 여자의 눈 망막에 드리워진 시간이 궁금해진다. 그것은 곧 그의 삶이기도 하니까. 여자와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그는 너무 심심하다. 명품 가방과 함께 화려하게 치장하고 와서 너, 바보니? 하고 술 취해 퉁바리 놓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한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밤이면 하늘의 빛나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아침이면 가장 밝은 빛을 비추는 것의 연원,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한 소년이 만난 소녀와의 시간이 쓸모없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그와 여자의 눈 속에서 지금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던 것이 생각이 난 양 여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짝퉁처럼 보이는 흔하디흔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의 앞에 밀어 놓는다. 삶은 정돈을 찾아가는 법이다. 그것이 복수든 화해라는 형태이든. 여자가 말한다. 그동안 너한테 받은 것 그대로야. 첫날 봉투를 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다른 사내도 아닌 너한테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 네가 그만큼 우습게 보였던 걸까. 날 미친년이라고 불러도 좋아. 이용당하고 조롱당했다고 생각해도 좋아. 난 그동안 내 인생으로부터 충분히 모욕받았으니까. 왜 하필 나였냐고 묻는다면 정말 미안해.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그는 그때의 소년이 되어 말을 하지 못한다. 여자가 너 바보지? 하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그는 여자의 말대로 바보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저 드넓은 우주의 이치와 그 속에 하나의 티끌 같은 행성에서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중함을 껴안고 사는 거라는 소박한 철학이 거대한 물음 부호로 변해 그의 망막 안으로 달려든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현기증은 뇌의 시상하부를 뒤흔들어 신경 전류를 일으키고 그 자극은 누선을 건드린다.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마르그리뜨 뒤라스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대낮에도 울지요. 사랑에 절절 끓어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다. 그의 얼굴은 상점의 화사한 간판 빛에 어룽져 번득인다. 왜 울음이 나온 걸까. 그는 스스로 반문한다. 어른이 되긴 아직 먼 것 같다. 여전히 그 소년에 머물러 있다. 그는 연신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어른의 귀로 듣는다. 그는 어디론가 허청허청 걸어간다.


지질한 내 짝꿍. 여기 공항이야. 이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카톡이네. 아이들 작은 언니에게 맡기고 멀리 있는 큰 언니에게 살러 가. 우린 셋째 프레임에 갇혀서 한동안 넷째 프레임을 공유했어. 너도 알다시피 난 늘 정돈된 삶을 원했어. 너를 통해 이루려고 했지만 더 헝클어지기만 했지. 돌이켜보면 너와의 시간은 오히려 그보다는 나았던 것 같아. 내 망막에 흐르는 시간은 우리들 것이야. 나도 기사를 보았어. 꽃피운 적이 없는 선인장을 바라보는 일. 앞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 다시 마지막으로 털어놓아야겠네. 널 사랑하지 않아, 했던 거. 모두 진실은 아니야. 잘 있어 지질한 내 짝꿍. 끝.





*최임수 2016년 농어촌 문학상 대상 수상으로 등단. 현재 MBC RADIO PD(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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