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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계간평/김영덕/시인들의 독도법讀圖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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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37회 작성일 20-01-29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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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계간평/김영덕/시인들의 독도법讀圖法


김영덕


시인들의 독도법讀圖法



1.
벌써 햇수로 40년이 넘었다. 당시 새파란 육군 소위였던 나는 동료들과 3인 1조로 이른바 남부군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의 험준한 능선과 골짜기를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군사지도를 읽는 독도법 훈련을 받았다. 왕성한 혈기로 천왕봉과 노고단, 피아골과 천은사 앞마당을 단숨에 질주하기도 했다. 짧은 강의실 교육을 마치고 곧바로 5천분의 1 지도와 소총, 손전등과 나침반만 가지고 어둠의 커튼이 짙게 드리워진 능선과 계곡을 가로질러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훈련이었는데, 웬만한 유격훈련보다 그 강도가 셌다.
한 번만 지도를 잘못 읽어도 원위치로 되돌아가 리셋,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므로 실수하면 바로 아웃이었다. 게임 오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전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기동을 하는 야전지휘관이 목표지점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면, 임무수행은 고사하고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물론, 인접한 우군들에게까지 치명적 손실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뿐이라서 소중한, 인생이라는 시간여행에서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독도법을 체득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2019 《아라문학》 가을호는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특집을 편성했다. 시의 적절했다. 아무리 바쁜 현실 속에서라도 시인들이 자신의 현위치와 목표지점의 좌표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는 뜻이었으리라.


2.
정미소 시인이 권두칼럼 「미루나무 따라, 큰 길 따라」로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시절 소사 아저씨에 관한 기억의 편린들을 조심스럽게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서 풀어 놓았다. 그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합창으로 ‘고향의 봄’을 불렀다는 부분에서는 몰입감이 배가되어 마치 내가 그 학생들 중 한 명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칼럼은 오늘날 개인들 삶의 질이 향상되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에 떠밀려 이유 없이 내달리는 삶이 오히려 불안하고 고달프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자문하며 여백 없는 삶에 대한 아쉬움을 차분하게 서술했다. 특히,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옛날에는 시골 마을이라는 고만고만한 작은 커뮤니티에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행복했다. 그 마을에서 제일이면 세계제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타고난 완력이나 손재주 같은 개인적 능력은 물론, 부나 학식, 미모 앞에 붙는 형용사들은 대부분 주관적 기준에 따른 것이어서 그 마을에서 제일이면 나라에서 으뜸이며 세계 최고였다. 그런데 산업화에 따라 큰 도로가 뚫리고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고 기어코 인터넷망까지 개설되면서 탈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끝없이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마을에서 천석군 부자 소리 들으면 평생 남부러울 것 없었는데, 넓은 세상에는 만석군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불행해지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터넷의 보급을 앞세운 무한경쟁의 기제에 휩쓸리면서 사람들은 불행해졌다. 자신을 타인과 반복적으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신석정의 시 「첫사랑」에서 함평 색시는 화자인 시골 총각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인의 기준도 오랫동안 절대평가였다. 아름다움은 본래 주관적인 가치였다. 그런데 아름다움도 비교하게 되고 우열가리기 시도를 하며 억지로 객관화시키는 바람에 무한경쟁이 시작되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함평 색시는 칠같이 검은 머리가
삼단 같이 사뭇 치렁치렁 길더란다


모잡아 맵시가 고운 게 아니라
손으로 짜낸 무명처럼 순박하고
집어낼 듯 모나게 어여쁜 게 아니라
참한 자기처럼 때깔이 곱더란다


어머니와 할머니 선 본 이야기 주고받을 때
나는 그 삼단 같은 머리가 자꾸만 보고 싶었다


                   -신석정 「첫사랑」전문
  
선을 보고 온 어머니와 할머니가 하는 얘기를 몹시 궁금해 하면서도 안 듣는 척, 딴청부리며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을 그 총각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옛날 내 모습이 연상돼 웃음이 난다. 두 번째 행은 숱이 많고 길이가 긴 머리를 ‘삼의 묶음’에 비유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망SNS에 익숙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여자의 외모를 ‘칠같이 검은 머리가 삼단 같이 사뭇 치렁치렁 길’고 ‘모잡아 맵시가 고운 게 아니라, 손으로 짜낸 무명처럼 순박하고, 집어낼 듯 모나게 어여쁜 게 아니라, 참한 자기처럼 때깔이 곱더란다‘고 설명하면 도무지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아 무척 당황해 하고 차라리 어이없어 할 것이다.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은근하고 조촐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審美眼이 결여된 탓이리라.
장종권 시인은 일찍이 환타지에 미친 도시에는 밤이 오지 않는다(「호박꽃나라·4」부분)고 설파했지만, 이 시에서도 기조에 흐르는 맥락은 환타지다. 옛날 동해 작은 마을의 색시와 전라도 함평 색시의 미모를 직접 비교하기는 불가능했다. 아니 단순 비교할 이유도 까닭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금방 찍어 즉석에서 공유할 수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나 사회적 관계망에 올린 사진으로 이 시 「첫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종권 시인의 표현대로 환타지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삭막할까?
《아라문학》 가을호는 속도에 떠밀려 불안한 삶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특집I은 오늘의 작가, 김현숙 편이다. 그의 근작단편 「피서지」는  일상의 숨막힘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여인의 이야기다. 그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은 바캉스, 이곳은 피서지. 빈 자리, 비어 있는 곳이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온전히 비어 있고 싶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그네는 계속 빠른 회전의 제 속도를 유지하면 상승한다. 상승, 상승… 오직 상승의 순간일 뿐이다.‘


3.
특집II는 이름하여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다. 화두가 장난스럽다. 이 시대를 통틀어 시적 내공이 탁월하며 사색가로도 소문난 시인들이 두루 참여를 했다. 이하 ‘시인’은 생략한다.
박일은 ‘시인은 진솔하게 자신의 내면에 반영된 언어를 통해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상상력으로만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다’고 개진하며, ‘시인의 자격을 가진 지 오래되었다는, 그리고 선점했다는 자기과시적인 습관적 편견 하나로 모든 것을 절대시하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원래 괴짜라 남다른 직관으로 파격적인 언행만을 일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충재는 ‘순수시를 향한 열정을 품고 밤을 새워 가면서 시를 쓰는 시인, 시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정화시키고, 시대의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지나는 이들의 의식을 깨워 밝은 지대로 이끌고자 몸부림하는 시인, 돈과 명예가 되지 않지만, 적지 않은 책임과 자기희생 정신을 가지고 사유의 결실로서의 시를 생산해 내려고 가슴앓이를 거둡 행하는 시인,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자 온갖 술수를 앞세워 거짓을 남발하는 이들과 반대 선상에서 거룩한 망명자적 삶을 살아가는 순수한 인격체로서의 언어를 대하는 시인, 이들이야말로 신의 영역 안에서 그 분의 영성을 얻어 시를 쓰는 신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안명옥은 ‘돈이 가치의 척도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명예도 되지 않고 권력도 되지 않고 부도 될 수 없다. 어디에도 유용하지 않다. 그런데 이 유용하지 않음이 오히려 우릴 억압하지 않는다. (중략) 시인은 또한 온몸으로 세상을 밀고 나가는 자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삶의 현장인 일상에서 부딪쳐가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썼다. 문득 허문태의 신작시 2편이 떠오른다.
 

103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양쪽에 목발을 짚고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오른쪽 다리가 바람에 펄
럭인다.


깜깜한 밤길 가족을 데리고 산을 넘고 있었겠지. 옛날이나 지금이
나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밤 산길에는 호랑이가 살고 호랑이를
만났겠지. 호랑이는 늘 같은 말만 하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떡도 없고, 심사숙고 긴 협상 끝
에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뿐. 오른쪽 다리 뚝 잘라주고 가족과 함께
밤 산길을 넘었겠지. 그 사내


깃발. 땅바닥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103번 시내버스를 타
고 영세자영업자 지원 상담을 받으러 가는 중복 지나 삼일 째 되는 날


-허문태 「깃발」 전문


시장은 거래를 통하여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찾아가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녹아들어 있어 냉혹한 곳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따뜻한 체온과 눈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허문태의 시들은 삶의 풍파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에게 운명이라는 나경羅經을 들이대며, 환상의 형상화를 시도한다. 일체의 관념이 배제되어 선이 굵고 사내다운 힘찬 시어로 긴 여운을 남기며 독자들을 종착역으로 이끌고 간다. 약방의 감초 같이 능청스러운 해학의 모자를 쓰기도 하지만, 한 순간 정색을 하고 구도의 길을 묵묵히 가는 수도승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바지락을 까는 여자의 등에서 파도가 찰싹인다.
먹구름을 몰고 달려들던 파도
어선을 움켜잡고 흔들어 대던 파도
절벽을 밤낮으로 후려치던 파도
애타게 파도가 멈추기를 바라며 살았다.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 채
파도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 채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잊은 채
지금까지 기억은 다 잊으라는 것도 잊은 채
바지락을 까는 여자의 등에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어미의 긴 혓바닥이 새끼의 등을 핥아 주듯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허문태 「파도」 전문    


박진형은 ‘시인은 신과 시시한 사람의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신도 아니고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지만, 생각하는 갈대라고 밝힌 블레즈 파스칼의 관점과 유사하기도 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왜 시를 쓰는가? 구체적인 답변 대신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을 패러디 한다. Scribo ergo sum.(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글을 맺었다.
이성필은 ‘시인은 자신의 속내를 반성을 시인하는 사람이다. 시인한 것을 시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람이다. 시인이 신은 아니지만, 결코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헤세가 말했듯이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렇다. 시인은 성찰로서 자아를 찾아 언제부터인지 지금도 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라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시인들의 독도법이다.                 





*김영덕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평론집 『원시적 에너지와 낭만의 방정식』. 아라포럼 대표. 막비시동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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