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Art-Artist
조정권(2013년 겨울호,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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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꽃
호수에 앉아
무속력의 수면에
취한다
잔잔히 퍼져오는
소 얼굴에 취한다
저물 무렵 올라오는
하얀 꽃에 취한다
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하얀 꽃에 취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물 속 뿌리를 쥐고
잠 들 물빛에 취한다
찾아야 할 마음도 있지도 않거니와
따라야 될 마음도 없다
가만히 뿌리를 쥔 손놓고
잠 든 물빛에 취한다
반하생(半夏生)
흐르는 물살 위에서 핀 흰 꽃들
조그맣고 하얀 물살이꽃들.
물살이 꽃을 가꾸고
물길을 가꾸고 있다.
나도 물살을 타고 떠내려간다.
물 위에 사는
흐르는 물살,
떠내려가며
물들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며
떠내려가며,
온 산 산새소리 다 합해놓은
저 밖의 시끄러움 하지(夏至)까지 따라가다가
환한 귀로 내다본다.
흐르는 물살 위에서 홀로 질 흰 꽃들
흰 꽃들이
조금 열어놓은
안의 부산스러움
취해있는 듯 깨어있는 듯
물속으로 내려가다가
물 갓 위로 귀 조금 더 얹어놓다가
닫아두다가 열어두다가.......
높고 외롭고 쓸쓸해서
마음이 가난해지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햇빛이 아주 작은 구멍까지 통과하듯, 그의 면밀한 손은 갈라지고 터진 내 마음을 잘 만져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그의 지체는 너무 멀어서 겨울 속에서 움틔우고 있는 생명 같은 것. 그를 무엇이라 불러볼까. 관념이 이미지로 몸을 틀면서 그의 시는 한 줄 선연한 빛 같은 것으로도 보이는데. 그가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인간 최초의 소리와 감각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엇에 관하여 무작정 다가서는 행자. 너무 작거나 커다란 그것들과 마주서서 골똘한 시인이여, 지금 어디 먼 곳을 다녀오시는 중이신지?
1949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시편』『허심송』『하늘이불』『산정묘지』『신성한 숲』『떠도는 몸들』『고요로의 초대』『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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