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Art-Artist
이경림/시인(2006년 겨울호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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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물화에 대한 반란, 그리고 적의의 도시시와 돌출적 상상력의 세계
이경림 시인
1989년《문학과 비평》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에『토씨 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이 있으며, 시산문집으로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가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강사이다 .

늪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건 육만년 전 내가[img2]
우리 딸을 낳은 건 삼만 오천년 전 우리 딸은
지금 제 뱃 속에다 팔천년 째 아기를 키우고 있네
우리 딸은 뱃속에 있는 제 아기가 보고 싶어
매달 산부인과로 초음파를 하러 가네
오만 살 쯤 먹은 의사가 둥그런 박 같은 내 딸의 배 위에
조갑지만 한 기계를 대고 슬슬 굴리면
내 딸의 뱃속에 있는 내 딸의 딸이
팔을 쑥 내밀었다 얼굴을 쑥 내밀었다 황급히
무슨 늪 같은 것 속으로 들어가네.
나는 사람의 뱃속이 늪인 줄 육만 살이 되어서야 알았네.
늪이 저렇게 둥그런 바가지 속이라는 것도,
온전히 사람이 되려면 사람의 늪 속에서
만년을 견뎌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
'엄마, 코가 뭉툭 한 게 엄마 닮았나? 나 닮았나?'
내 딸은 아직 삼만 오천 살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자기라는 걸 모르네 지금 뱃속에 팔천년 째
키우고 있는 것이 제 엄마라는 것도 모르네
'아직 철이 덜 든 게야'
팔만 살 까지 세다가 나이를 까먹었다는 노파가
웃는 듯 우는 듯 말했네

同 寢
한 구덩이와 동침 한다
처음 만난 구덩이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 어떻게 생겼는지 미처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의 깊은 陰部 속으로 내려갔다
밤새 뭔가 질주하는 것들의 바퀴 소리가 들렸다
한소끔 소나기 같기도
욕설 같기도 한 것들이 지나갔다
창 밑에서 누가 잠깐 사랑을 하는지
낄낄거리는 소리 들리다 만다
개새끼 죽여버릴 꺼야!
죽여라 죽여!
각목을 든 시간들이 떼로 몰려가는 발꿉 소리가 들리고
호루라기 소리, 고함소리…… 악다구니……들
지나가고 다시 잠잠하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기계적인 그의 시도는 끝이 없다
그와 동침한지 벌써 오십년이 지나 간다
이상하다
날이 새지 않는다
젠장, 이렇게 지루한 섹스는 처음이다.
시는 삶이다. 시는 놀이다. 시는 널뛰기다. 재기차기다. 고스톱이다. 술래잡기다. 고무줄넘기다. 사방차기다. 공기놀이다. 윷놀이다. 도도, 개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시는 그저 시다. 시가 무슨 쇳덩어리 에밀레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죽어라 매달려 목매지 말자. 놀고, 놀고, 또 놀다 지치면 아아, 한 편의 시를 쓰자. 개같이 쓰자. 소같이 쓰자. 돼지같이 쓰자. 시 냄새로 진동하는 저자에서 살찐 시를 잡아 끓인 국밥을 후루룩거리며 지나가다 수작 거는 건달이라도 만나면 한번 씩 웃자. 그래 그러자! 그게 시다./이경림
추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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