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Art-Artist
최문자 시인(2016년 봄호 제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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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울음소리 작아지다』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가 있고, 시선집 『닿고 싶은 곳』이 있다. 한성기문학상 박두진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을 수상했다. 협성대학교 문창과 교수, 동 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배재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Vertigo
계기판보다는 단 한 번의 느낌을 믿었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조종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 착시 현상이 내게도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비
행기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수평비행으로 알았다가 뒤집히는 비행기처럼 등
대 불빛을 하늘의 별빛으로, 하강하는 것을 상승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추락하는 비
행기처럼
그가 나를 고속으로 회전시켰을 때 세상의 모든 계기판을 버리고 딱 한 번 느낌
을 믿었던 사랑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었다 궤를 벗어나 한없이 추락한다 산산이 부
서지는 일이었다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과 올라붙는 느
낌은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함이었다
지상에 없는 잠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 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제 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러나 오랫동안
선생은 내게 20년 무명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무명인 나는 그것이 일상이라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웬일인지 한참을 웃었다. 그냥 그렇게 웃으면서 나는 선생의 손이 참으로 작고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눈이 살짝 오다가 말다가 하는 오후, 빨간 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상한 전율이었다. 선생과 빨강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이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이 새벽의 광기처럼 싱그러웠다. 선생은 이미 대학의 아주 높은 총장 자리까지 올랐던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풋풋한 눈사람의 냄새가 난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오래 청춘일 수 있는 걸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와의 동행이 즐겁다. 얼핏, 뒤를 돌아다보는데 입술이 빨갛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엔 사람 하나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러나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새벽의 광기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를. 그렇게 선생은 혼자 오래 시를 기다려왔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뜻 없는 메아리에서도 소리의 은유를 캐는 사람. 시인은 오래 고독할 것이고, 그러나 불처럼 사랑할 것이다.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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