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Art-Artist
최영규 시인(2020년 봄호 제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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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침시집』, 『나를 오른다』, 『크레바스』.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바움작품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바람이 되어, 바람의 소리가 되어
새벽까지도 바람은 텐트를 잡아 흔든다
정신에 섬뜩 불이 켜지고
밤새 어둠을 밟고 온 새벽은 칼날처럼 선연하다
고요한 함성,
명치 끝 어디쯤에 뭉쳐 있던 불꽃인가
라마제 때 건 불경佛經 빼곡히 적은 깃발들이
바람 앞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온몸을 뒤척이던 바람은 나를 흔들어 세우고
낭파라를, 갸브락 빙하를, 끝없는 티베트 설원을 간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여기, 이 땅의 끝
초오유 정상 너머로까지 뜨거운 갈기를 세운다
아, 거대한 빙하와 속을 알 수 없는 높고 거친 설산들
그들 앞에 내팽개쳐진 듯
나는 혼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러나 가고 싶은 그곳으로
바람이 되어,
그 바람의 소리가 되어
최영규, 혼자를 연습하며 신독愼獨하는 사내
그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이번에는 네팔 어디라던가, 에베레스트 8,848m 산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어느 부근이라던가. 초오유Cho Oyu, 나는 살아서 갈 수 없는 그곳을 그는 벌써 몇 번을 오르고 또 내려왔다.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문자의 내용은 농담처럼 간단했다. 그러나 나는 서쪽이라는 말에 오래도록 목이 탔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자기 발자국을 찍으며 오르고 또 오르는 사내다.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 하늘땅에서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시간도 만났을 터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서 확인한다고 했다. 천천히 따라오는 마음을 기다려주듯 걸음을 멈춘 채 오래도록 자신을 돌아다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하늘문을 확인하듯, 그는 다시 높은 곳을 향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겠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정확하게 겹치는 설산의 정상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들은 모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시간의 여행자들. 그는 이 끝을 알 수 없는 여행길에서 산이라는 질문을 동반자로 삼은 것은 아닐까.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은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라는데. 그렇게 그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첨예한 자기 발자국을 흰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기록한다. 혼자를 예감하며 맹렬하게 죽음을 연습하는 시인. 밝고, 환하고,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의 문체는 그러니까, 그가 매번 죽음을 담보하면서 받아쓴 정직한 몸의 기록이다./손현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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