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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나온 용/이수길 박사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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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6,438회 작성일 08-01-2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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底 이수길 박사의 회고록
개천에서 나온 용
초판1쇄 인쇄 2007. 12. 5.|발행 2007. 12. 10.
지은이 이수길 외|펴낸이 정기옥|펴낸곳 리토피아|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
ISBN 978-89-89530-78-7 03810
값 15,000원

1.프로필
이수길 박사는 1928년 풍산읍에서 출생하여, 1950년 원산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의사검정시험을 거쳐 제5회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1959년 뮌스터대학 의과대학, 베를린 자유대학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일본 동북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3년네는 중앙대학교 외래교수로 있었으며,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헉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대구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다. 독일연방 소아과 전문의로서 독일연방 방사선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프랑크푸르트대학병원과 마인츠대학병원 교직원으로 봉직했다. 1966년 사단법인 한국소아마비협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1972년 사단법인 마인츠 한독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현재 독일 마인츠시에서 소아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다.

이수길 박사는 누구인가
  ◉ 피난 시절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의사가 되어 독일에 유학, 독일 대학병원 교직원을 거쳐 소아과병원을 경영하면서, 의료사고 한번 없이 연 최소 40만 명을 진료한 명의.
  ◉ 60년대 간호사 파독 사업의 주역으로 한국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훈을 세운 인물.
  ◉ 간호사를 북한의 지령으로 독일에 취업시켰다는 간첩 혐의를 받아 동백림 사건 때 납치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 결국 독일에 영주하게 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 동백림 사건으로 10년 가까이 지속된 한독 간의 외교 냉각기를 무너뜨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민간 외교활동을 벌인 인물.
  ◉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10만 명의 소아마비 한자들을 위하여 한국소아마비협회를 창설하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아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인물.
  ◉ 한국에서는 최초로 선천성심장병아동 무료수술 운동을 전개하여 독일과 미국에서 수술 받도록 해 시한부 아동들을 구한 한국 생명운동의 창시자

2.차례
1부 간호사 파독의 첫걸음
한국 간호사 독일 진출의 물꼬를 트다 / 012
한국 간호사 독일취업 이전에는 민간차원의 간호학생들이 유학 옴 / 014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을 주선하게 된 동기 / 016
1차 간호사 파독 / 023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의 재회 / 029
박정희 대통령과 45분간의 독대 / 031
독일병원에 취업한 간호사들, 독일 간호사와 동등한 대우 받음 / 034
2차 간호사 파독부터는 해외개발공사에서 전담 / 037
3차 간호사 파독 / 041
난산難産의 4차 간호사 파독 / 043
간호사들의 독일생활 적응 / 047
527명의 간호사를 취업시킨 대가로 겪은 피눈물 나는 수난과 역경 / 056
아이엘아이(I.L.I) 어학학원(서울 종로)에서 간호요원 파독시킴 / 065
이종수 박사(한국기독교 난민구제회)가 시작한 간호요원들의 취업 / 067
난민구제회의 인력수출 사기행각 사건으로 한국지부장 구속 / 070
파란만장했던 간호사 파독의 주역에서 물러나 다시 마인츠대학병원으로 / 073
한국종교계와 독일종교계에서 한국간호사 파독 중지운동 전개 / 076
3년 계약을 마치고 귀국하는 간호사 / 079
독일병원협회가 주관한 한국간호요원들의 교체 취업 / 081
한국 간호사 취업 병원노동조합의 반대로 좌절 / 087
독일 상류사회에 진출한 한국간호요원들 / 090
간호보조원들의 서독 취업 / 091

5년 이상 근무한 간호요원들 독일 영주권 취득 / 094
한국 간호요원과 필리핀 간호요원들의 파독 경쟁 / 098
한국정부의 간호사 파독정책이 갈팡질팡하다 / 100
파독 간호사 20주년 기념 대잔치 / 102
2003년 1월에 보내온 이미령 간호사의 서신 / 104
파독 간호사들의 피와 땀을 이용하는 조선일보와 육군사관학교 교장 / 109

2부 분단의 비극, 동백림 사건
동백림사건에 휘말려 모진 고문을 당해 죽을 뻔 / 114
임석진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수해 터진 동백림사건 / 118
중앙정보부 국제법 어기며 유럽에서 한인들 강제연행 / 121
서독에서 납치된 16명 때문에 독일 여론 악화 / 124
서독 언론과 서독 정부의 강경조치(날짜 순 정리) / 130
하루아침에 간첩 두목으로 몰려 날벼락 맞아 / 136
동백림 거점 북한대남공작단사건 발표 / 152
한국 역사상 5심까지 오른 전무후무한 과대포장 정치재판 / 155
납치된 지 한 달 만에 서독으로 귀환 / 160
서독에 귀환한 후 서독정부와 언론의 반응(날짜 순 정리) / 166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는 유신독재정권 / 169
독일 특사와의 교섭결과 및 현안 타결 / 172
동백림사건을 비누거품으로 만든 영웅은 김종대의 친구 라스케(Raske)박사 / 175
나를 간첩두목으로 조작한 장본인은 이○택 대공수사과장 / 176
한국정보부 첩자로 누명 받아 서독에서 추방 위기 / 179
영국 유학생들이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왕래한, 세칭 ‘소小 동백림사건’ / 185
김대중을 납치하여 없애 버리려 고민하고, 김형욱을 암살한 유신정권 / 188

3부 장애를 넘어, 격랑을 넘어
유별나게 출세한 북청 물장수의 후손 / 194
마비된 왼쪽 다리 / 198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병마 / 203
친일파로 몰린 아버지 / 205
의학도가 되는 첫길 / 208
한국전쟁과 빨갱이 의사로 총살당할 뻔 했던 순간 / 213
심한 설사병 때문에 구원된 생명 / 216
LST화물선을 타고 간 피난길 / 218
의사검정시험을 거쳐 한국의 의사가 됨 / 225
서울대학병원 외과에서 연수를 시작 / 229
서울대학병원 소아과 의국에서의 생활 / 233
서울 심장부인 명동에서 개업 / 238
청운의 뜻을 안고 독일 유학 / 241
서독 땅에 디딘 첫 발 / 247
독일대학 역사와 의학교육 / 250
명문 뮌스터 의과대학 입학 / 254
동무, 왜 변소에는 김일성 동지의 초상화가 없습니까? / 258
최초의 동양인으로 프랑크푸르트대학 정형와과병원 조교로 임용 / 262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 받아 / 267
마인츠대학 소아과병원 재임명 공무원으로 발령 / 273
대구 출신 신부와 올린 초고속 결혼식 / 277
운석雲石 장면張勉 박사와의 인연 / 283
마인츠대학병원에서 두 번째 방사선과 전문의 과정 밟아 / 288

4부 민족을 위해, 약자를 위해
사단법인 한국 소아마비협회 창설 / 292
마인츠시에 사단법인 한독협회韓獨協會 창설 / 298
한국에서 최초로 심장 기형아동 돕기 운동 시작 / 300
한독협회 사업을 방해하는 한국대사관과 독한협회 / 309
장○원 피아노 독주회를 후원한다는 신문기사 때문에 성토 당해 / 311
한국 중견학자들의 서독 유학 주선과 장학금 지급 / 314
제2의 고향 마인츠 시내에 소아과병원 개원 / 319
엑스선사의 독일 취업 알선 / 324
브란트수상이 뮌헨올림픽에 김종필 총리를 특별 초청 / 325
대한항공 추락사건에 분통 터트린 마인츠 인근 교포들 / 328
제1회 KBS 해외동포상 사회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 / 331
중단한 철학 공부 다시 하고 싶어 / 335
푹스 시장의 자서전 제33장 때문에 마인츠시 역사에 기록 됨 / 338
비운의 정객 온산 최형우 / 342
정부가 추진하는 의약분업을 측면에서 지원 / 350
이수길李修吉 박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 352

부록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가나다순) / 371
책 속에 나오는 국가와 기관 및 단체 기타 / 385
책 속에 나오는 주요 대회와 건물 및 지명 / 392

3.머리말
나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부모의 태산 같은 걱정 아래 여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피치 못할 성장 환경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좀 늦게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절망한 일이 없었다. 소아마비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스스로의 삶에 용기를 주면서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유년기에 허약한 몸으로 오랫동안 병치레를 했던 것처럼, 아동기와 소년기도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나 자신이 ‘공부’에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중학교와 고급중학교 때는 3년을 월반했다. 고급중학교 2학년 때 3년제 원산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남으로 피난 가서는 가난 때문에 항상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대학도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의사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불굴의 정신으로 어려운 의사 검정시험에 도전하여 최단 기간에 최고의 점수로 의사 자격증을 땄다. 이때부터 의사를 꿈꾸며 다섯 가지를 인생의 목표로 정했다. 첫째는 부모의 도움 없이 자생하는 것, 둘째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 셋째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넷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어 조국에 공헌하고, 마지막으로 민족의 후손들이 기억할 정도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같은 목표는 거의 달성했다고 감히 자신한다.
불편한 신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배타적이며 배울 기회조차 주지 않는 ‘속 좁은’ 한국을 떠나, 나는 독일로 유학해 세계가 부러워하는 의사가 되고자 결심했다. 독일에서는 언어장벽과 인종 차별이라는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길만을 바라보았다. 가장 밑바닥 일부터 배웠기에 다른 독일의사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환자를 돌보았다. 그 결과 독일 국립대학병원 1급 공무원 교직원으로 14년 동안 봉직하였다. 52년간 의업에 봉사하면서 최소 연 40만 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환자들의 건강과 가난한 한국의 소아마비 아동과 심장기형 아동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야말로 나 자신이 가진 한계를 뛰어 넘어 절망을 희망으로 일구어 낸 삶을 살았다. ‘지체 장애’를 가졌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삶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40년 전 당대의 배우들을 뺨칠 정도로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지금의 아내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에 넘친 일이었지만 건강하고 훤칠한 2남 2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이들은 다 독일 의과대학을 거쳤다. 그동안 손자 둘, 손녀 셋의 씩씩한 모습을 보면서 번창한 가문을 이루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한국 초등학교 교과서 「도덕과 예화 자료」(6학년 2학기)에 “이수길 박사의 조국 사랑”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후손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독일의 마인츠에서 택시를 타고 "닥터 리(이 박사)의 병원으로 가자"고 하면 택시기사는 대개 군말 없이 정확하게 데려다 준다. 마인츠에서는 한국계 소아과 전문의 이수길 박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지금도 왼쪽 다리는 온전치 못 한 상태이다. 6세 때 처음 걸었을 정도였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954년 의사 국가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신체 불구에 언어 장벽, 그리고 외국인 차별이 많은 독일 풍토는 쉬울 리 없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독일 소아과 전문의와 독일 방사선과 전문의 자격을 따냈다. 당시로는 흔치 않은 동양인 의사로서 독일 의사들도 어렵다는 전문의 자격증을 두 개나 따낸 것이었다. 그에게 소아과 치료를 받은 독일 어린이와 부모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으면서 1974년부터는 마인츠 시내에 소아과 병원을 개업,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인츠 사회에서 신용과 명성을 얻으면서 저명인사들과 교류도 두터워졌다.
독일 의학계에 발이 넓다보니 1966년 우리나라 간호사 1백 28명의 독일 병원 첫 취업을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6년까지 총 5천 7백 28명의 간호사가 독일에 취업했다.
 
서울교육청 훈화자료 4집 마음의 문을 열고에는 “교포 의사의 훈장”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얼마 전 독일 정부로부터 국가공로 십자훈장을 받은 이수길 박사를 아십니까? 이 훈장은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뚜렷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로 권위 있는 훈장입니다. 이수길 박사를 만나면 두 번 놀라게 됩니다. 우선은 그가 탁월한 의사로, 사회봉사 활동의 공로자로 존경 받는 분이면서도 퍽이나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고, 다음엔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는 자신의 불편한 몸을 이겨내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독일의 의사 자격증을 따내어 현재 마인츠에서 소아과 병원을 개업 중입니다. 60년대에는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진출을 성공시켜 의료 인력 부족을 해소했고, 한국의 선천성 심장 기형아 34명을 미국, 독일 등지에서 무료로 치료받게끔 주선하여 심장 기형아동 돕기 운동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의료계 교류에 기여한 바가 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훈장과 KBS 해외동포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어려운 현실이나 조건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주변이나 환경을 탓하며 쉽게 좌절해버리곤 합니다. 오늘의 ‘나’의 모습에 감사하면서, 주위의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퍽이나 가치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내일의 ‘나’의 모습에 감사하면서 ‘나’를 위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연세대 허감범 교수(대통령주치의)는 후학들에게 “질병만 치료하는 소의小醫보다 사람을 치료하는 중의中醫, 나아가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는 대의大醫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위에 말하는 세 가지 목표를 다 추구한 셈이다. 간호사 독일 취업, 한국소아마비협회 창설, 한국 심장 기형아동 구명 운동, 한국 중견학자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독일 유학을 주선하는 등은 플라톤의 명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의 행복이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하게 해주려 했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스럽다.”를 염두에 둔 일이다.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하나님이 나에게 이 숭고한 직업을 선택케 한 데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내 갈 길을 행해 꾸준하게 전진할 것이다.”라고 한 명언을 귀감으로 삼고 있다.
한강과 라인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다에 이은 이 두 번째 회고록은 40년 간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전용 파트너’가 되어 오늘의 단란한 큰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보필해준 사랑하는 아내의 도움이 컸다. 나는 전문 작가가 아니어서 세련된 문장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거 독일로 떠나기 전 대한민국에서 일했을 당시 신문이나 잡지 등에 의학 관련 기고나 의학도들의 지침서를 만든 경험을 토대로 회고록 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과장하지 않는 진솔하고 담백한 문장을 구사하려 애쓴 것이다.

 2007년 독일 마인츠에서
관제寬齊 이수길李修吉

4.본문 발췌
한국간호사 독일 진출의 물꼬를 트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주장은 거짓말)

간호사 파독은 오늘의 재독 동포사회 형성의 원동력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독 광부들은 3년 계약 이후 체류 연장이 어려워 계약 완료 이후 독일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독일의 중간 전문 직종인 간호사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체류 연장이 허용됐기 때문에 광부들은 파독 간호사와 결혼함으로써 독일에 체류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은 독일과 한국 정부와는 아무 연관 없이 민간인, 민간단체들이 독일 의료기관과의 사이에 이루어 낸 작품이다. 한국정부는 간호사 파독에 대응하는 정책이나 이들의 이질적인 독일사회 적응을 위한 대책을 강구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업적으로 “1963년 12월 22일 서독 광부 파견, 1966년 1월 30일 서독 간호사 파견”을 열거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1963년 이전에는 소수의 유학생들과 독일이 필요한 고급 인력인 의사, 과학자 몇 명이 있었을 뿐이고, 양국 간의 교역은 초기 단계로 미미한 상태였다. 한국 광부들의 독일 파견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61년 초 주한 미국경제원조기구(USOM)의 중개를 통해서였다. 이 기관은 1957년 일본 광부들이 2년간 독일에서 교육 받기 위해 파견된 사례를 알고서, 한국 광부의 파독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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