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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김영식 번역/모리오가이 소설(리토피아소설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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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소설선․1
기러기(雁)
초판1쇄 인쇄 2006. 5. 1.|발행 2006. 5. 6.
지은이 모리 오가이(森鴎外)|옮긴이 김영식|펴낸이 정기옥
펴낸곳 리토피아|출판등록 2001. 1. 12. 제2-301
ISBN-89-89530-63-6 03830
값 9,500원
1.프포필
번역자-김영식/리토피아로 등단. 수필가.
저자-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는 소설가, 희곡가, 번역가, 평론가이며 근대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한 후, 육군 군의로 임관하였고, 1884년부터 4년간 독일로 유학했다. 귀국 후 최초의 소설『무희(舞姬)』를 발표했다. 그 후 작가로서는 많은 현대소설과 역사소설, 수필 등을 발표하였고, 군인으로서는 군의총감(軍醫總監)까지 승진하였다. 일본에서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은 지성인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다. 대표작『기러기(雁)』『청년(靑年)』『아베일족(安部一族)』『산초대부(山椒大夫)』『다카세부네(高瀨舟)』『성적인간(ヰタ セクスアリス)』등이 있다
2.차례
13 기러기(雁)
186 다카세부네(高瀬舟)
208 김영식의 기행수첩
3.옮긴이의 말
오가이는 무조건의 숭배대상이며, 특히 지식계급의 우상이었다. 대개의 대중문학을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들, 사회에서는 실제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상당한 지위에 있으며, 소설 따위는 부녀자의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한 사람들조차, 오가이만은 각별하게 취급하며 존경하였다. 말하자면, 오가이는 명치 이래의 중산지식계급의 지적 우상(idol)임과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미학의 창조자이며, 다소 과장하여 말하면 ‘중산층예술’의 규범이었다. (중략) 일본의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사회와 실제적인 생활이나 널리 현세로부터 자칫 위반하여 멀어져버리기 십상인 것을 보고 분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오가이에게 그 잃어버린 이상, 죽어버린 신의 모습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서구적 교양과 동양적 교양과의 통일 융합을 거의 체념해버린 쇠약한 후대의 지식인들은, 오가이에게서 뚜렷이 드러난 성취를 보고, 탄식과 함께 오가이를 숭배한 것이다.(作家論. 中公文庫. 1974)
위의 글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가 모리 오가이에 대해 쓴 글의 일부이다. 근대 일본이 서양의 문학양식을 받아들여 열심히 흉내내고 있을 때, 오가이 또한 독일 유학을 통하여 서구의 문화를 체득한 자이기는 하나, 그는 한학과 서양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향기의 작품을 쓴 것으로 평가받았다.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근대문학의 쌍벽을 이루어, 흔히 ‘소세키와 오가이 같은 대가’라는 식의 표현으로, 같은 수준으로 존경을 받는 작가이지만, 소세키의 작품이 오가이의 작품에 비해 읽기 쉬운 것임에 반해, 오가이의 작품은 역시 비교적 다소 재미가 없다거나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간결한 문체가 독자에게는 오히려 설명 부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작품 속에서 자주 나오는 한문과 외국어, 그리고 철학용어가 독자의 독서 진행을 어렵게 하는 것도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절제되고 정확하고 명징(明澄)하며 지적인 남성적 문체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아 왔고 앞으로도 일본문학의 고전으로 영원히 남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가이가 존경을 받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문학 외적인 삶의 모습에 있을 것이다. 그는 도쿄의대를 나와 군의관으로 임관하여, 비록 도중에 진급은 늦었지만, 결국 군의관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군의총감에 올랐던 사람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면도도 하지 않고 술과 담배, 그리고 갖가지 데카당스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흔히 상징화되어 그려지고 있지만, 오가이는 실제적 삶과 문학적 삶 모두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들은 그가 현실과 이상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그는 삶에서의 자신의 마음 상태를 한 단어로 resignation(체관諦觀)이라고 표현하였다.
‘나의 마음가짐을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하면 좋을지 말하자면, resign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남들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resignation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무기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그다지 변명할 생각도 없습니다.’(「나의 입장」, 1940)
체관이란 무엇인가. 비슷한 말로 체념은 무기력하게 그냥 견디고 살아간다는 말로 흔히 쓰인다. 현실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쉽사리 뛰쳐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이와 싸우고 금방 헤어지는 사람은, 좋게 말하면, 운명에 체관(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사람에게는 체관의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봄직하다. 오가이에게 있어서 체관은 오히려 세상을 그 자체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였다고 본다. 諦는 ‘살피다, 명료하게 알다’이고 불교에서는 ‘진실, 깨달음’의 의미이며, 觀은 ‘보다’이다. ‘삶의 맹목적 충동(쇼펜하우어)’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해소하는, 그리고 나아가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삶이 바로 오가이가 말하는 체관이 아니었을까.
오가이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나도 작으나마 일본과 관계된 일을 하며 매우 실제적 세계에서-실제적이지 않은 이 어디 있으리. 비실제적인 부분도 가진 자의 단어겠지만-돈을 버는 한편, 인터넷의 바다에 ‘일본문학취미’라는 사이트를 섬처럼 띄워놓고 시간 날 때마다 문학과 벗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서당개 3년이라고, 그동안 읽고 쓰는 공부를 거듭하다 보니 3년 전에는 수필로 등단도 하게 되고, 홈페이지는 문예진흥원의 우수문학사이트로 뽑히는 기쁜 일도 있었다. 다시 3년이 지난 올해는 이 번역서 외로 두어 권의 책을 세상에 내려고 한다. 겉으로 보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면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허나 내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슬픈 일도 있었다. 고통이 글로 기화(氣化)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이런 양다리 걸치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둘 다 위축이 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능력이 부족한 탓에 이도저도 크게 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어느 하나 버릴 수도, 버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 현실이 문학의 자양이 되고 문학이 다시 현실을 극복하거나 체관하는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행복하지 않지도 않고, 불행하지 않지도 않다. 나는 그저 담담(淡淡)할 뿐이다. 나의 담담은 오가이의 체관과 가깝지 않을까 감히 빗대어본다.
‘기러기’는 오가이의 대표적 장편소설이다. 어느 정도 삶의 경험이 있어야 공감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엿보인다. 냉철한 문체이지만 그곳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은근한 유머로 드러나 담담한 미소를 머금게 하며, 특히 오다마라는 여주인공의 성적 심리묘사는 가히 자극적일 정도로 놀랍다. 또한, 이 소설은 근대일본의 몸과 정신을 깊이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일문학전공자들을 위한 일한대역판이 나온 적이 있으나, 이 번역서는 전공자뿐 아니라 일본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고려하여 보다 충실하고 자세한 주석을 붙였으며, 비주얼 시대에 맞게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 찍은 사진도 넣는 등, 창의적이고 범용적인 번역판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원어민조차 많은 주석을 찾으며 읽어야 하는 근대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번역의 텍스트로 주로 이용한 신조문고(新潮文庫)의 주석이 많은 참고가 되었고,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취득 및 확인이 용이해진 점, 그리고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작품의 배경지를 기꺼이 안내해주신 아지마 기이치 씨(安島喜一)의 덕분으로 부족하나마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오가이의 대표적 短篇小說 ‘다카세부네(高瀬舟)’를 함께 수록하였는데, 이는 국내 초역인 것으로 안다.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
2006년 4월 김영식
4.본문 발췌
1.
오래 전의 이야기다. 나는 그때가 메이지(明治) 13년(1880)이라는 것을 우연히도 기억하고 있다. 어떤 연유로 몇 년도인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그때 나는 도쿄의대 건물 건너편에 있는 가미조(上条)라는 하숙집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가미조가 메이지 14년(1881)에 화재로 불타 버렸을 때 나 또한 그로 인해 거리로 나앉게 된 사람이었다. 그 화재가 발생하기 일 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가미조에 하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의대생이었고, 그 외로는 대학부속병원에 통원치료를 하러 다니는 환자들이 좀 있었다. 대개 어느 하숙집에서나 특별히 행세깨나 하는 하숙객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손님은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도 좋고 넉살도 좋은 편이라, 하숙집 아줌마가 화로를 끼고 앉아 있는 방 앞의 복도를 지날 때는 으레 말을 걸곤 한다. 때로는 그 화로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방에 술상을 크게 벌려놓고 일부러 술안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둥, 주인아줌마를 귀찮게 하며 뻔뻔스러운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런 사람이 실은 하숙집의 수입을 짭짤하게 해준다. 아무래도 하숙집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인기가 좋기 마련이라 그런 사람은 인기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가미조에서 인기가 있던 내 옆방의 남자는 그런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는 오카다(岡田)라는 학생으로 나보다 한 학년 밑이었으니 어쨌거나 그때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카다가 어떤 남자인가에 대해 설명하자면 먼저 금세 눈에 띄는 특징부터 들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그가 뛰어난 미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얼굴색이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미남이 아니라 혈색이 좋고 체격도 좋은 미남이었다. 나는 그런 얼굴의 남자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나는 청년 시절의 가와카미 비산(川上眉山)과 친한 사이가 되었다. 결국, 극한 상황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마친 문인 가와카미를 말한다. 그의 청년 시절이 오카다와 꽤 닮았다. 당시 조정선수였던 오카다는 체격 면에서는 가와카미보다 월등히 좋았다.(기러기 중)
5.작품평
어느 작가도 오가이만큼 일본의 혼란스런 근대 그 자체를 예술적으로 포섭한 문체를 지닌 작가는 없었다. 물론 소설적 기교가 뛰어난 작가는 많이 나왔으며, 시적 집중도가 높은 작가도 있었다. 추상적 사고에 뛰어난 작가도 나왔으나, 오가이와 같이 사물을 관통하는 뢴트겐적인 묘사력은 없었다. 그만큼 훌륭한 문체를 가진 오가이가 종합적인 대작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기러기]는 그런 종합적 천재의 작품이라는 이상적 형태에 상당히 근접한 작품인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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